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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23,5-8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마리아인데 비해, 여기 마태오복음에서는 요셉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요셉의 혈통에서 태어날 '다윗의 자손'(마태 1,31)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마태오복음에서 '의로움'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줌이요(25,34-40),
산상설교에서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요(5,6), 하느님 나라와 함께 찾으라고 권유됩니다(6,33).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품행’과 관련됩니다.
그러니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
오늘 예레미야서는 “그날이 오면”을 얘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런데 “그날이 오면”은 동서고금을 통해 많이 노래된 시요 가사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해방을 고대하던 심훈의 시가 있고, 민주주의가 오게 될 것을 고대하던 민중가요 가사도 있고, 심지어 중국 공산당의 군가에도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지요.
‘그날’은 언젠지 모르지만 오기를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날’은 기다리지만 아직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희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기다려지는 날이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지금의 모든 고통과 긴 어둠을 견디게 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이렇게까지 기다릴 만큼 값진 날입니다.
그 모든 고통을 다 견딜 만큼 값진 날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기다리는 날은 어떤 날이고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누구이고, 지금 우리는 어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진정 나는 기다리는 ‘그날’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날’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로써 ‘야훼는 구원이시다’(신명3,21)라는 의미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께서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입니다.”하고 예언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조들이 전쟁 중일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할 때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함께 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힘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ㅜ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그분의 영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옛날에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이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 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고,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 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결혼 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를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 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 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 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고, 둘째 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관계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귀찮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셋째 딸만은 부잣집의 며느리로 들어가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버릇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절대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만은 뱀이 일으키는 감정입니다.
불만을 품고 남을 심판하면 이미 뱀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 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 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나도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남의 죄도 뒤집어쓸 수 있어야 ‘의로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그분 덕분으로 죄를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웃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의로운 요셉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의로움이 곧 사랑이기에 의로운 사람에게만 사랑 자체이신 분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랄프 이야기도 있습니다.
랄프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였는데, 연극에서 ‘방 없어요!’라고 세 번만 하면 되는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연극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고 가난한 이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도대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병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실 수 있으실까요?
아기 예수님을 바란다면 제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은 조약돌로도 성인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교회를 박해 하는 바오로 사도도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 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의로우신 분이 요셉이었고, 그분은 그것 하나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맞아들일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임마누엘,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입니까?>
또다시 성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번, 수천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는 성탄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은 간절한 원의와 열망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3)
예수라는 이름 이상으로 심오하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인가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이스라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 신앙은 이스라엘 역사 안의 중요한 순간마다 강조되고 상기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 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 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이사 43,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부르짖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건가요? 정말 계시다면 어떻게 이토록 큰 곤경과 수모를 겪게 하시는 것인가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이래,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공포에게 떨고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분명 함께 계셨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바르실 때, 예언자들을 통해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처참히 함락되고 파괴될 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할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참담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부르짖고 있는데, 대체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당신 자녀들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나요?”
그러나 우리가 정녕 잊지 말아야 할 불변의 진리 한 가지를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재앙 한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우리 인간을 환대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며, 발버둥치는 인류를 도우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이 큰 환난에 당당히 맞서게 하시며 극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의 응답>
오늘 복음 이야기는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로 성모님을 선택하실 때,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루카 1,26-27).
이것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두 사람이 약혼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도 따로 주어지고 ‘응답’도 따로 이루어진 것은 두 사람이 아직 약혼 단계여서 ‘같이 살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간 일이 먼저 있었고,
요셉 성인을 찾아간 일은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이 드러난 다음입니다.
본문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온 일과 천사와 나눈 대화도 모두 전했을 텐데, 성모님과 천사가 나눈 대화에서는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직접 요셉 성인을 찾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 쪽에서도 요셉 성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셉 성인이 성모님을 믿었고, 성모님의 말도 모두 믿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했으니까 믿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모님과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과 성모님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로 생각했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아기를 요셉 성인의 아기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님과 아기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라는 말은 요셉 성인이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 성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소설을 쓰듯이 상상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루어진 일의 결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또 성모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알려 주고,
아기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알려 준 것은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기도 하고,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달해 준 일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는 일, 누가 옆에서 보고 기록할 수도 없는 일, 순전히 요셉 성인 자신의 혼자만의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성모님이 천사를 만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요셉 성인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나는 마리아를 믿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나에게 한 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천사가 ‘성령 잉태’와 ‘메시아 강생’을 설명해 줄 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들도 미리 알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자신들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 분의 응답에는 그런 고난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응답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기 자신을 모두 봉헌한 일, 즉 전적인 헌신과 희생입니다.
요셉 성인의 응답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일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또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한 일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고, 또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서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설명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요셉 성인과 성모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 즉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고,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 - 우리 하나하나가 "요셉"이자 “임마누엘”입니다 - “깨어있음, 경청, 순종”>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제 12월17일 대림 2부 첫날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O후렴”은 “오! 지혜(O Sapientia)”로 시작되었고,
오늘 둘째 날인 12월18일은 “오! 하느님(O Adona)”으로 시작됩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의 끝은 대림으로 시작되어 우리는 하루하루 설레는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고 있습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엊그제 수도공동체가 선물받은 이해인 수녀의 <이해인의 햇빛 일기>라는 예쁜 시집이 따사로운 햇빛처럼 참 반가웠습니다.
암투병 후 79세 노령에도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아가시는, 영원한 현역의 수녀님의 삶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말 그대로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의 표지가 되는 수녀님입니다.
지난 목요일 12월14일부터는 배밭 배나무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배농사 역시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배나무의 가지치기 전정과 더불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삶의 전지(剪枝)”를 통해 삶의 본질이 투명히 드러나도록 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침 배나무 전지와 더불어 우리 수도형제는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도 말끔히 전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수사님, 이 추운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참 멋지게 전지하노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높은 사다리를 움직이며 가로수(街路樹)를 전지한 수사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를 상징하는 듯한 너무 멋진 메타세콰이어 가로수에 반해 쓴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라는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 2023.12.15
이제 겨울의 시작 초겨울인데 벌써 깨어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하늘 향한 무수한 겨울나무들 같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자가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이런 주님을 앞당겨 맞이하여 모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 공정과 정의, 구원과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화답송 후렴처럼 정의와 평화를 꽃피우며 참으로 멋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의인 요셉입니다.
주님 탄생을 앞둔 하느님의 배려와 준비가 참 완벽합니다.
이미 하느님은 의인 요셉을 예비했고, 당신의 사람,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을 때, 해결사 하느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해 그의 약혼자 요셉을 찾아 오십니다.
여기 오늘 복음을 통해 의인 요셉에게 우리는 세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의인 요셉은 깨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참 영성의 표지가,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가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삶, 깨어 준비하는 삶, 깨어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꿈과 희망, 길과 진리, 빛과 생명의 주님을 기다릴 때 비로소 인내로이 깨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공감과 배려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묘사가 참으로 깨어 있는 의인 요셉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참으로 숨막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배려가, 분별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사랑의 배려, 사랑의 분별, 사랑의 지혜입니다.
우선적 분별의 잣대는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태풍으로 변할 사건을 참으로 깨어 있었던 의인 요셉의 사랑의 지혜로 미풍이 되고 말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하느님은 안도했고 요셉이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둘째, 의인 요셉은 경청(傾聽;敬聽)의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의 사람, 경청의 사람입니다.
경청으로 표현되는 겸손이요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요셉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이런 요셉을 택한 눈밝은 하느님이요, 이런 준비된 요셉을 친히 찾아 오신 주님의 천사입니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한 하느님인지 그대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시나 하느님의 위험한 모험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의인 요셉입니다.
요셉의 은밀한 주님과 만남의 내적 체험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깨어 삶의 깊이에서 이런 내적 체험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요셉입니다.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라는 뜻인데, 또 주님을 믿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처럼 생각되는 참 아름다운 이름 예수입니다.
셋째, 의인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어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이 환히 밝혀집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예언된 임마누엘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임마누엘 이름 뜻은 얼마나 멋진지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또 하나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경청에 이은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현이자 영성의 잣대이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으로 조마조마했을 하느님입니다.
그대로 거룩한 밤, 거룩한 꿈 중에 이뤄진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런 순종을 통해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새삼 영성생활에 날마다의 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의 성패는 이렇듯 밤에 달렸음을 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란 시도 생각납니다.
무려 26년 전 시라 더욱 반갑습니다.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
밤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쉰다
나도 밤에는
그분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쉬고 싶다, 꿈꾸고 싶다, 기도하고 싶다
밤에는!”
- 1997.7.25
이런 순종으로 이끈 이런 밤의 꿈 체험의 기억은 평생 요셉의 믿음을 늘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세례받아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하나가 요셉이요 예수님이요 임마누엘입니다.
참으로 의인 요셉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의인 요셉처럼 깨어 경청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 역사의 과정이>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구원 역사의 과정이 차분히 풀려나갑니다.
한 사람의 관대하고 선한 순종으로 풀려가는 이 순행이 우리를 흐뭇하게 만들어 줍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태 1,19)
약혼녀의 임신이 분명 충격이었을 텐데, 요셉은 격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자기를 내맡기기보다 이성과 신의를 다해 숙고합니다.
만일 마리아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떠나보내주기로 한 겁니다.
파혼으로써 마리아가 보다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물러서 주는 것이지요.
그만큼 마리아를 사랑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태 1,20)
요셉의 결정은 아직 하느님의 계획을 모르는 인간으로서 최선의 지혜요 희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윤리, 도적적 경계를 초월합니다.
아무리 의롭고 신실한 인간이라도 하느님의 뜻은 그의 고뇌보다 심오하고 신비롭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마태 1,22).
예언서에 기록된 '동정녀 잉태와 아들의 출산'(이사 7,14 참조)이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인 동시에,
말씀이신 분이 육을 이루어 세상에 오시리라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지혜와 정의를 이 세상에 이루시리라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들에서는 메시아 도래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첫째,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입니다.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온 죄악은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사이를 갈라놓고 무너뜨렸습니다.
끊임없이 분화되고 확산되는 어둠의 힘이 인간의 마음을 물들이고 희망을 앗아가는 동안 인류는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지요.
오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지고 죄가 되어 죽음으로 들어가시면서 말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세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선사받습니다.
함께 함.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을 솟게 해주는 단어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리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느닷없이 닥치는 삶의 복병들 앞에서는 두려움과 근원적인 고독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지상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셋째 목적은 제1독서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대목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돋아나게 하실 "새로운 싹"(예레 23,5)에 대해 예언합니다.
그 "싹"은 메시아를 가리키지요.
여리고 약한 싹이 자라나 세상에 슬기와 공정, 정의를 이룰 것입니다.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 "새로운 싹"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탈출은 신앙의 원체험입니다.
그들은 대대손손 그 사건을 전하고 기억하며 하느님 백성인 자기들의 정체성을 이어가지요.
그런데 오늘 예언서 저자는 그들이 더 이상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신 하느님을 부르지 않고, 유배와 귀양살이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님께 맹세하리라고 예언합니다(예레 23,7-8).
주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것은 그들 뼛속 깊이 새겨진 원체험의 중심을 이동시킬만큼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예레 23,8).
메시아 도래의 셋째 목적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와 유배를 거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곧 존재의 기반이고 안식처입니다.
그곳으로의 무사 귀환은 생명의 뿌리를 되찾아, 풍요와 번영과 안식을 누리려는 그들의 절박한 바람이 성취되는 순간이지요.
메시아, 곧 구원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고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존재의 본향으로 데려가 안착시켜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 주시고 그리로 들어가도록 이끄실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곧 길이 되어 주셨지요.
창조 이전에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온전한 사랑의 상태가 곧 우리 그리움이 달아드는 최종 목적지요 영원한 본향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 하느님과 함께 살며,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온 인류와 믿는 모든 이들에게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은 우리 각자의 실존을 파고듭니다.
각자가 '지금 여기'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 도전과 약함, 갈망과 실패 등에 따라 그리스도께 희망하는 바가 다를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나에게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나는 구원이 어떤 얼굴로 다가오길 바라나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내게 구원이 될 그 자리에 나의 뿌리와 소명과 완성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분이 내게 오시겠답니다.
마라나타!
어서 오십시오, 나의 주님! 나의 구원이시여!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국제행사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37년과 35년이 지난 행사입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이 두 행사를 통해서 국제행사를 치를 만큼 성장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주최국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행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즈음 스포츠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문화와 경제에서도 ‘한류’를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과 북이 화해하는 ‘평화’의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눈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살고 있지만 삶의 인프라와 문화적인 역량은 서울이 결코 뒤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39년 전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도 그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심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00년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의 도움으로 한국천주교회는 박해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던 가톨릭이었던 한국천주교회가 긴 어둠을 뚫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 있었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에 있었던 ‘103위 성인 시성식’이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행사와 미사를 준비하였고, 완벽하게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전의 행사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세계성체대회는 전 세계 가톨릭을 초대한 명실상부한 국제행사였습니다.
2014년도에는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복자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울은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주관하는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흥식 추기경님은 바티칸의 성직자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4,19구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긴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서독의 탄광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있기까지 순교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헌신했던 성직자와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투쟁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는 경찰에게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젊은이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다음에는 성직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래야만 저 젊은이들을 잡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비자 교리반은 신청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는 매10년 100만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성인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한 이, 헐벗은 이, 굶주린 이, 외로운 이를 주님으로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자동차와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홀로 자전거 여행 중이었는데 차와 부딪힌 것이었지요.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의 운전사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저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차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주차중인 차였기 때문입니다.
그 차는 가만히 있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차 안에 사람이 있었고 또 운전 중인 차였다면 저 역시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운전하면 되냐고?
차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운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차 안에 사람이 없으니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꼭 화를 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경우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지우고 그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화를 낸다고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화를 냄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상황이 더 꼬일 때도 많습니다.
전에 운전하면서 신호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는데 제 좌측에 있는 차가 속도를 내어 직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 차의 왼쪽을 그대로 그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그 차를 향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상대방 운전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저씨? 그따위로 운전하면 어떻게 해요?”
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보험회사를 불렀고, 결과는 상대방 과실 100%였습니다.
화를 내는 길보다 내지 않는 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과 약혼한 상태였지요.
그런데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마음에 담아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한 요셉 성인이었기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쓰면서 화를 내고 복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할 자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할 때 가능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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