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모든 축구팀이 사라져도 한 팀은 남을 겁니다. 어디냐고요? 국가대표팀이죠. 축구 A매치만큼 박진감 넘치고, 흥행 역시 확실한 경기도 없으니까요.” 축구팬 김찬제 씨의 말이다.
사실이다. 축구 A매치는 굳이 축구팬이 아니어도 눈길이 가게 마련이다. 한·일전 같은 빅매치는 더하다. 나라의 명예를 걸고 국가대표 축구팀들이 맞붙는 A매치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최고의 흥행카드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몇몇 나라에선 야구 A매치 인기가 축구만큼 높지만, 안타깝게도 A매치 자체가 드물다. 있다면 올림픽,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아시아경기대회, 새로 생긴 프리미어 12 정도다. 이 가운데 올림픽 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정식종목에서 제외됐고, 아시아경기대회는 한국, 일본, 타이완 세 나라가 메달을 나누는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한 지 오래다. 가뜩이나 일본야구계는 아시아경기대회엔 별 관심이 없다.
프리미어 12 역시 몇몇 참가국은 ‘최강팀 구성’을 공언하지만, 메이저리거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 각국의 최정상급 야구선수들이 출전하는 A매치는 WBC가 유일한 셈이다.
한국은 2006년 초대 WBC에서 4강에 진출한 뒤 2009년 2회 대회에선 준우승을 차지했다. 두 대회에서 선전한 덕분에 한국야구는 2007년부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2013년 3회 대회에선 ‘복병’ 네덜란드에 발목이 잡혀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그때도 한국 대표팀은 가능한 ‘최강팀’을 구성해 출전했다. 이렇듯 야구계가 정성을 기울인 건 역시나 WBC 호성적이 국내야구 인기 유지 및 저변 확대에 큰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KBO가 2017년 열릴 예정인 4회 WBC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WBC의 긍정적 전망과 명확한 한계
3회 WBC 1라운드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연습경기를 치르는 장면
7월 20일 양 총장은 ‘WBC 운영위원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다. 양 총장은 “대회 지분을 갖는 나라가 한국(9%), 미국(66%), 일본(13%) 세 나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WBC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라며 “WBC 조직위원회로부터 3회 대회 결산내용을 보고받음과 동시에 향후 4회 대회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고 말했다.
MLB(메이저리그) 사무국과 공동으로 WBC 조직위를 운영하는 MLB 선수노조의 초청을 받아 양 총장과 함께 뉴욕을 방문한 김선웅 KPBPA(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국장도 “WBC 운영위원회에서 4회 대회를 어떤 식으로 여는 게 좋을지 MLB 선수노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논의 속에서 긍정적 전망과 명확한 한계를 동시에 느꼈다”고 밝혔다.
여기서 긍정적 전망은 4회 대회가 중단없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간 미국 야구계 일부에선 “WBC 인기가 기대보다 높지 않고, 특히나 미국 내 관심도가 여전히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대회 무용론’을 제기했다. 여기다 대회 때마다 각국을 대표하는 유명 메이저리거들이 연달아 불참을 선언하며 ‘야구 월드컵’을 표방했던 WBC는 체면을 구기곤 했다. 하지만, 김 국장은 “MLB 사무국과 선수노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야구협회와 선수협도 WBC를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었다”며 “따라서 4회 대회와 그 이후 대회도 이상 없이 열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명확한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김 국장은 “WBC 운영위원회에 참가한 일부 관계자들은 ‘WBC가 진정한 세계 최고의 국제대회가 되려면 선수들의 경기력이 수준급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선수들이 한창 몸을 만드는 3월보단 각국 프로리그가 끝나는 10월 이후 대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이런 의견에 많은 이가 동조했다”고 전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3월이면 프로리그를 운영하는 한국, 미국, 일본, 타이완 등에선 한창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중이거나 시범경기가 진행되는 기간이다. 선수들의 몸이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정규 시즌을 앞두고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 선수들과 구단 입장에선 ‘대회 기간 중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부상’ 때문이라도 대회 참가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 국장은 “10월 이후 개최 필요성을 MLB 사무국과 선수노조도 잘 아는 듯했다”며 “그러나 양측 모두 ‘MLB 시즌이 끝나면 휴식을 취하길 바라는 메이저리거가 대부분이라, 10월 이후 대회 개최는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WBC 조직위는 4회 대회도 이전처럼 3월 개최를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WBC 1라운드 유치 명분 ‘서남권 돔구장’
올해 안으로 완공이 예상되는 서울 서남권 돔구장
3회 대회 1라운드는 4개국에서 개최됐다. A조는 일본 후쿠오카, B조는 타이완 타이중, C조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D조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렸다. 2라운드는 일본 도쿄와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렸는데 준결승과 결승전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AT&T 구장에서 진행됐다.
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국제대회는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전세계 야구 흥행과 발전에 매우 긍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같은 경우 올해부터 2020년까지 6년 연속 국제대회가 열릴 예정이라, 전체 야구계가 이 호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머릴 맞댈 필요가 있다”며 “KBO는 어떻게 하면 이 기회를 선제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총장의 발언 중 주목할 건 ‘어떻게 하면 이 기회를 선제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 총장은 “4회 WBC 1라운드 유치를 적극 고민할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기자가 7월 하순 일본을 찾았을 때 일본야구 관계자들로부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당시 일본 야구인들은 “WBC 1라운드를 한국에서 개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한국야구 인프라가 눈에 띄게 개선된 만큼 유치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KBO는 예전부터 WBC 1라운드 유치를 계획했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는 3월은 기온이 낮아 국제대회를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돔구장이 많은 일본이 WBC 1, 2라운드 개최를 독식하거나 날씨가 따뜻한 타이완이 3회 대회 1라운드를 유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야구계는 “조만간 서울에 돔구장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며 “돔구장이 생기면 날씨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울시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짓고 있는 ‘서남권 돔구장’은 9월 개장을 목표로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 중이다. 양 총장은 “서남권 돔구장이 완공되면 ‘날씨’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며 “WBC 1라운드 유치전에서 조직위를 설득할 명분이 생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선웅 선수협 사무국장도 “MLB 사무국은 한국, 일본을 매우 중요한 대회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서울에 돔구장이 들어선다면 1라운드 유치전에서 한국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한국의 WBC 1라운드 유치는 성공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변수도 만만치 않다. 바로 흥행 여부와 타이완이다.
WBC 1라운드 유치와 관련한 난제들
타이완 타이베이에 건설 중인 '타이베이 돔구장'. 몇 년째 '내년이면 완공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던 서남권 돔구장처럼 타이베이 돔구장도 언제 완공될지 아무도 모른다
28년 동안 KBO에 몸담았던 양 총장은 이상과 현실을 잘 조합하는 이다. 양 총장은 “WBC 1라운드가 서울에서 열린다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 이후 35년 만에 국제대회다운 국제대회가 다시 서울에서 열리게 된다”며 “하지만, 그런 ‘역사성’과는 별개로 냉철하게 따질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말했다.
우선 흥행 여부다. WBC는 A매치 국가대항전임과 동시에 ‘흥행’이 목표인 야구이벤트다. MLB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손을 잡고 2006년부터 WBC를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WBC가 돈이 되는 사업’이라 판단한 까닭이다. 당연한 이유겠지만, WBC 조직위는 1라운드 개최지 선정을 두고 ‘누가 유치비를 얼마나 많이 낼지’ ‘돈이 되는 지역이 어딘지’를 결정의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양 총장은 “WBC 조직위가 ‘3회 대회 1라운드를 타이완에서 했으니 4회 대회 1라운드는 한국에서 하자’라고 한다면 의외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며 “그러나 한국과 타이완이 유치 경쟁을 벌인다면 유치비가 폭등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치전에 뛰어들 시 대회장이 될 게 확실한 서남권 돔구장도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양 총장은 “서남권 돔구장 관중석이 총 1만8천 석이다. 수익을 내는데 한계가 있는 좌석수”라며 “우리야 ‘한국 최초 돔구장에서 열리는 국제대회’라는 명분이 있지만, 수익 극대화를 노리는 WBC 조직위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좌석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은 ‘유치 라이벌’로 예상되는 타이완의 움직임이다. 3회 대회 1라운드 유치를 통해 긍정적 효과를 얻은 타이완은 4회 대회에서도 유치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타이완은 2017년 완공을 목표로 타이베이에 돔구장을 짓고 있다.
KBO 관계자는 “타이베이 돔구장이 서남권 돔구장보다 규모면에서 큰 것으로 안다”며 “같은 돔구장이라고 한다면 규모면에서 큰 타이베이 돔구장이 서남권 돔구장보다 유치 경쟁에선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물론 타이베이 돔구장은 건축법 위반과 안전 문제등으로 현재 공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2017년 완공도 자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KBO “여건만 갖춰지면 한·일 슈퍼게임 부활도 가능”
1991년 제1회 슈퍼게임에서 한국 대표 김성한(사진 좌측)과 일본 대표 아키야마 고지(사진 맨 우측)가 악수를 나누는 장면. [사진] 제주도 야구박물관
어쨌거나 갖가지 난제에도 KBO는 국내야구 인기유지와 야구 저변확대를 위해 WBC 1라운드 유치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자세다. 양 총장은 “초대 대회부터 3회 대회까지 우린 늘 원정경기를 하는 통에 홈 어드밴티지를 누린 적이 없다”며 “야구 인기유지와 야구 저변확대를 떠나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도 WBC 1라운드 유치를 적극 고민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양 총장과의 대화 중에 기자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양 총장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해마다 국제대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양 총장 말대로 2015년엔 ‘프리미어 12’가 열린다. 메이저리거들의 참가 가능성은 작으나 한국, 일본 등은 자국 리그 최정예 선수들을 선발해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2017년엔 WBC, 2018년엔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2019년엔 다시 프리미어 12, 2020년엔 야구가 다시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큰 도쿄올림픽이 열린다. 하지만, 2016년엔 국제대회가 없다. 한해를 건너뛰는 셈이다.
양 총장은 “최근 축구 한·일 정기전이 부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야구도 적절한 인프라만 갖춰지면 4년에 한 번씩이라도 한·일 정기전을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야구계는 “서남권 돔구장이 완공되면 KBO가 NPB(일본야구기구)와 협의해 한·일 슈퍼게임을 부활하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많다. 빠르면 2016년부터 가능하다는 게 일부 야구인의 생각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양 총장의 말대로 한국야구계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해마다 국제대회를 치른다.
넓은 안목과 체계적인 비전으로 국제대회를 준비하는 KBO의 움직임에 선수협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박충식 선수협 사무총장은 “KBO가 WBC 1라운드 유치에 나서면 선수협도 보조를 맞춰 도와줄 일이 있으면 적극 협력할 것”이라며 “우리가 유치전에 뛰어드는 게 확실해지면 WBC 조직위의 한 축인 MLB 선수노조와 긴밀히 협의해 WBC 1라운드가 한국에서 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WBC 4회 대회가 2017년 3월에 열린다 가정할 때 KBO의 움직임은 매우 시기적절하다. 1~3회 대회 경험에 비출 때 개최지 결정은 대회가 열리기 1년 6개월 전에 결정되곤 했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만난 일본야구 관계자는 "WBC 조직위가 스폰서 유치에 나서고, 대회 일정 등을 짜려면 올해 안으로 1, 2라운드 개최지가 확정되야 한다"며 "늦어도 12월 전엔 4회 대회 개최지가 결정날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