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큼은 열에 아홉도 아니고 열에 열은 다들 미쳤다고 할 것이 히치하이킹이다. 장담건대 내가 아무리 포장을 해도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히치하이킹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일은 없다. 한국에서는 히치하이킹을 하는 사람을 도로에서 본 적 조차도 없고,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집에다 카우치서핑하고 다닐 거라는 얘기는 했지만 히치하이킹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는 안했다. 부모님 성격에 지나치게 걱정하실 것이 뻔하다. 블로그 글을 죄다 읽고 계실 테니 지금은 아시겠지?
좀 아닌 것 같아도 옆에서 자꾸 맞다고 맞다고 하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유럽경험 한 번도 없는 나에게, 유럽에서 평생 살다온 친구가 유럽에 대한 얘기를 하면 뭐 닥치고 듣는 수밖에 없다. 듣다 보니까 그게 맞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개나 소나 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다닐 수가 있으며 단거리고 장거리고 다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가보지도 않은 내가 무슨 반박을 할 수 있나? 자기는 호주에서도 히치하이킹만 하고 다녔다는데 듣다보니까 괜찮은 것 같다.
호주 2주 여행 후 항공권 빼고 1500만까지 예상하던 유럽 여행경비를 1/3인 500만원으로 줄이게 된 데에는 물론 첫 번째에 카우치서핑이 있지만, 두 번째에 히치하이킹이 있기도 했다. 아니 뭐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유레일 6개월이면 300만원은 족히 깨지는데 그냥 유레일 없이 다니고 히치하이킹을 두 번에 한번만 할 수 있다고 쳐도 이게 얼마야...
계획과는 달리 지금 바르셀로나까지 15번의 이동을 하면서 딱 두 번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가장 힘든 점을 꼽자면 히치하이킹을 고민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차에 치여 뒤지면 어떡하나 강도 만나면 어떡하나 아무도 안 태워주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다. 실제 포즈난에서 베를린 갈 때 안 좋은 자리를 잡아서 두 시간 동안 기다리기만 하다가 기차타고 온 다음부터는 좀 많이 꺼려지더라. 더군다나 만에 하나라도 이동을 못하고 하루라도 묶이게 되면 2주간의 카우치서핑 일정이 짜여있는 나에게는 재앙이다. 도미노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계속 하려는 했다. 너무 장거리라 못한 적도 있고, 환전한 돈이 많이 남아서 그냥 기차 탄 적도 있고, 카풀이 싸길래 안하기도 했고, 시간이 부족해서 버스타기도 했고, 하여간 핑계는 많다. 근데 이날은 핑계 댈 것이 없었다. 시간은 많고, 카풀은 버스만큼 비싸고, 거리도 적당했다. 호주에서 15km한번, 유럽에서 300km한번 나름 경험이 있는데도 결정하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자 지도를 보자.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이 없었으면 나는 카우치서핑도 못하고 히치하이킹도 못했을 것.
1번이 구글 추천 경로. 2번이 브뤼셀 평생 살았다는 친구가 추천해준 경로. 언뜻 봐도 이해가 안된다. 지금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파리가 브뤼셀 남쪽인데 왜 엉뚱한 북서쪽에 가서 히치하이킹을 하라는거야. 그쪽으로만 고속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도 아니고 어짜피 나중에 같은 도로 타고 가게 되는데?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 없으니까 그냥 닥치고 하라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초보자는 일단 가만히 듣는 수 밖에 없다. 일단 버스터미널가서 버스 시간이랑 가격 체크하고 왔다. 히치하이킹 방법은 간단하다. 일단 해보고 안되면 돌아가서 버스타고 가야지 별 수 있나?
네덜란드에서 온 언니, 아직 스무살인데도 히치하이킹은 셀 수 없이 했단다.
히치하이킹에서 가장 짜증나는 것 중 하나가 집에서 나와 히치하이킹 장소 까지 가는 과정. 집에서 나와 중부고속도로 빠지기 직전 도로까지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일역까지 가는 것도 귀찮은데 내려서 걸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날도 좀 멀었다. 지하철 내리고 나서도 한 이십분은 더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잘 보이는 곳에 짐 내려두고, 얼굴 타니까 선크림 팍팍 바르고 표지판 꺼내고 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 한번 해주고.
고속도로 진입로 어디에나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는 항상 최고의 장소.
시작시간이 대략 10시. 왼손에 표지판 들고 오른손 엄지손가락 세우고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운전자를 유혹한다. 히치하이킹 하는 날엔 꼭꼭 면도도 한다. 학생같아 보여야 잘 태워준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어딜 가도 깔끔해야 사랑받는다. 가급적 시계를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체크를 하면 마음만 초조해진다. 차는 쌩쌩, 햇볕은 쨍쨍, 나는 불안불안. 이미 열흘전 포즈난에서 베를린 갈 때 잘못된 장소에서 두 시간이나 뻘짓하다 온 나로써는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리는 남쪽인데 브뤼셀 북서쪽에서 엄지 올리고 있으니 깝깝할 뿐. 지나가는 할머니가 충고도 해줬다. 벨기에 말이어서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이곳이 잘못된 장소이니 그냥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을 것이란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들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금이라도 남쪽으로 가서 하는 것 그리고 그냥 버스 타러 가는 것. 아 더워 뒤지겠다. 시간 한번 볼까 말까 볼까 말까?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또 말을 건다. 자기 프랑스 국경 근처까지 간단다. 아싸. 이게 어디야 일단 타야지. 시계 보니까 45분 지났더라.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하다.
이 사람이 여행객인지 아닌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다. 손에 표지판까지 들고 있는 게 딱 히치하이커.
브뤼셀에서 파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브뤼셀 -> 투르네 -> 릴 -> 파리 순서대로 가는 것이 좋단다. 나는 파리 표지판 들고 있으면 파리로 가는 누군가가 와서 태워줄 줄 알았다. 저 아저씨는 중간에 들르게 되는 도시의 표지판을 다 만들어 다닌다. 프랑스 국경 옆에 있는 도시가 바로 투르네였고 저 아저씨는 릴까지 갔다가 서쪽으로 간단다. 보아하니 나보다 두배는 족히 되보이는 거리인데 걱정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졸다가 깼는데 벌써 내려야 한단다. 내리니까 좀 암담하다. 그냥 소도시 고속도로 진입로. 에라 모르겠다. 어짜피 릴까지는 같은 길이니까 나는 그냥 저 아저씨 따라 가기로 했다.
당당한 모습에 놀라서 사진을 안 찍어 놓을 수가 없었다.
나도 좀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을 좀 항상 찍고 싶었는데 이전까진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ㅠ
이번엔 한 십분 정도 기다렸는데 차가 한 대 선다. 아싸 오늘은 뭔가 잘 되는구나. 릴까지는 간다기에 일단 탔다. 다음 히치하이킹을 위한 최적의 장소는 릴에서 고속도로로 나가기 직전에 있는 주유소 혹은 아무데나 라도 고속도로 위에 있는 주유소 그것도 안 되면 고속도로 진입하기 직전에 있는 도로에 라도 내려야 한다. 태워준 아저씨는 타이에서 온지 7년이 되었다는데 우리와 의사소통이 전혀 안됐다. 아저씨가 프랑스 말을 할 줄 알아서 프랑스 말으로라도 좀 얘기를 해보려 했는데 프랑스 말도 거의 못했다. 벨기에, 프랑스 쪽에 사는 사람이 프랑스말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_-?? 근데 착하긴 굉장히 착한 아저씨였다. 우리가 기차역으로 가는 줄 알고 무려 시내 중심지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려고 하더라. 중간에 내려야 하는데 이거 말이 안 통해서 큰일이다.
어찌어찌 얘기를 해서 차를 돌렸다. 나를 보고 정차할 수 있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한다. 고속도로 진입로 직전에 내렸는데 앞뒤로 살펴봐도 히치하이킹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 안쪽으로 쭉쭉 걸어 들어 가다보니 다른 히치하이커들도 보인다. 서로 굿럭 한마디씩 해주고, 정차하기 쉬워 보이는 곳에 배낭 내려놓고 아저씨랑 다시 시작. 이번에는 한 삼십분은 기다린 것 같다.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데 차 한 대가 선다. 고속도로 주유소까지는 태워준단다. 주유소까지면 충분하다. 프랑스 말을 한 개도 못해서 아저씨가 얘기 대신 다 해줬다. 정말 이 아저씨 만난 건 이날 최고의 행운이었다. 아저씨 경험상 일단 주유소까지만 가면 어떻게 된단다.
둘이서 같이 사진 찍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소개시켜 줬다.
밥 좀 먹고 가자 해서 일단 앉았다. 잔디에 앉으면서 야 이거 소풍 온 거 같다고 하니까. 인생이 소풍이란다. 소설가 다운 대답이다. 하하. 전날 저녁에 해먹고 남은 거 도시락 싸 왔는데 많아서 아저씨 하고도 나눠 먹었다. 서양 사람답게 빵에 치즈로 밥을 먹더라. 사실 당연한 건데 나는 약간 놀랐었다. 500km는 더 가야 하는 아저씨가 여유가 철철 넘친다. 내가 걱정해 주니까 밤 열시 전까지만 가면 괜찮지 않겠냔다. 정말 대단한 아저씨다. 젊은 애들도 밤에는 몸 사리는데 나만한 아들이 둘이나 있는 아저씨가 거침이 없다.
파리에 도착하니 저녁 네 시 반쯤. 점심밥 먹은 시간 빼고 대략 다섯 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버스 타는 것 보다는 한 시간 늦게 왔지만, 이날 히치하이킹은 정말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이 후 아직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좀 부끄럽지만, 언제고 히치하이킹만으로 떠나는 여행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히 하게 됐다.
첫댓글 아~장거리 히치하이킹 이였군요.^^
추억에 남을 경험이 되었겠어요.
한국 설악산에서 친구들이랑 한번 히치하이킹해봤는데..ㅋㅋ 저녁 설거지 내기였었는데.... 새삼 기억나네요.ㅎㅎ
ㅎㅎㅎ 지금쯤이면 돌아왔겠군요..6개월이니. 즐겁게 잘 보고있습니다.
네 한국에 잘 있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