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박은지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마르코 9, 47-48
눈을 빼 던졌다 혀도 빼 던졌다 결국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지 귀신이 되었다 흙을 밟다가 거울을 보다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먼 땅이 바다가 되고 담장은 끝없이 올라가고 아이들의 발자국이 사라지고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에는 언제 어떻게 가지? 갈 수는 있는 거야? 마음이 답답했다 마음이? 그렇다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마음껏, 아주 마음껏 죄를 지어볼까 어떻게든 신에게 내 위치를 알려야 한다 귀신 친구를 기다렸다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끝내 머리도 잘라버릴 귀신 친구들아 혼자보다는 여럿이 더 즐겁고 덜 무서워 남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예비 귀신 친구들은 아이의 긴 머리를 쓰다듬다 불태웠다 불에 탄 머리는 축축하게 식어갔다 우리의 이름을 찢어 자신의 이름에 덧붙이기도 했다 물에 잠긴 마을 위를 배를 타고 돌아다녔다 숲에서 빛만 거두었다 어둠만 남은 숲은 서서히 작아지다 깊은 밤 사라졌다 강물을 막고 구름을 멈추었다 물고기와 새가 죽었다 신은 천지창조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만들었다 인간은 여섯째 날 태어났다 저들 모두 귀신이 된다니 덜 즐겁고 조금 많이 무서워졌다 가까운 땅이 바다가 되고 담장은 더 튼튼하게 올라가고 한참 동안 귀신 생활 수칙을 적어 내려가도 저들 모두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 한 개의 코와 한 개의 입을 갖고 두 팔을 휘저으며 두 다리로 걷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살아있었다 담장 밖 인간들만 자꾸 눈 없이 귀 없이 코 없이 입 없이 다가오고 한 눈으로 보느라 지친 나는 눈을 감고 아직 남아 있는 마음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귀신 친구들은 남아 있는 몸을 맞대며 내일을 기다렸다 나도 슬그머니 등을 기대었다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4 겨울호 ---------------------- 박은지 / 1985년 서울 출생.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여름 상설 공연』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