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코 손목시계는 과거
일본 정밀공업 제품의 정수(精髓)였다. 1917년 하토리 긴타로(服部金太郞)가 세운 수입 시계 취급점 하토리 시계상에서 출발한 세이코는 이후 일본 최초 손목시계와 세계 최초 쿼츠(수정 발진자) 탑재 손목시계를 내놓는다. 1969년 처음 나온 쿼츠 손목시계 한 개 가격은 45만엔으로 차 한 대 값에 달했다. 그 가격에도 기계식 손목시계가 넘볼 수 없는 '한 달 오차 5초 이하'라는 정밀도를 무기로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일본이 스위스 시계 산업을 앗아갔다'고 국제적 화제가 일 정도였다.
그러나 45만엔짜리 쿼츠 시계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이제는 1000만원짜리나 1만원짜리나 시간 오차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급속히 보급된 스마트폰은 정밀도를 내세운 세이코의 시계 사업을 빈사 상태로 몰아갔다. 명품 마케팅의 전쟁터인 프리미엄 손목시계 시장에서 세이코는 유럽 명품 마케팅에 밀려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그렇다면 세이코 시계를 만들던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 아직 건재하다. 프린터와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공장 자동화 장비 등을 만드는 종합 정밀기기 제조업체 세이코엡손(이하 엡손·Epson)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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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스이 미노루 세이코엡손 사장은 “가격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완제품을 내놓음으로써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고 말했다. 엡손은 골프 스윙을 분석해주는 기계(오른쪽 위)와 착용하면 3D 영화를 볼 수 있는 안경(오른쪽 아래) 등 완제품을 연이어 출시하고 있다./엡손 제공
1964년 세이코 시계가 도쿄올림픽 공식 시간 측정기로 채택되자 세이코 자회사인 신슈 세이키는 측정된 시간을 기록하기 위한 프린터 개발에 투자해 1968년 세계 최초 미니 프린터 'EP-101'을 출시했다. 그 뒤 EP-101의 후속으로 '선 오브 EP-101(Son of EP-101)'을 출시했는데 이 제품이 대히트하자 1975년 그 이름에서 '엡손(Epson)'이란 브랜드명을 고안해냈다.
그 뒤 승승장구하던 엡손은 모바일 기기와 대형 LCD TV 보급 여파로 프린터와 프로젝터를 비롯해 사업 전반이 어려워지면서 2012년까지 7년 연속 매출이 줄며 고전했다. 매출은 2008년 1조1000억엔대(약 10조원)에서 2012년 8000억엔대로 추락했고, 2008년엔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2013년 매출은 전년보다 18% 늘어난 1조36억엔으로 5년 만에 1조엔대 매출을 회복했다. 영업이익은 전년의 4배인 850억엔, 2014년에는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51% 증가한 1200억엔에 달할 전망이다.
그동안 엡손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중심에 우스이 미노루(�井稔·60) 엡손 사장이 있다. 그는 회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던 2008년 사장에 취임했다. 53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일본의 나가노현 스와(諏訪)시에 위치한 엡손 본사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도쿄 북쪽 나가노(長野)현의 스와시는 물이 맑은 것으로 유명한데, 깨끗한 물이 대량으로 필요한 시계·카메라·렌즈 산업 등이 전후(戰後) 크게 번성했다.
1. 엡손은 과거 일본 정밀 제조업의 간판 주자였는데 지난 몇 년간 크게 고전했습니다.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완성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스스로의 힘과 책임으로 최종 고객이 기뻐할 수 있는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엡손은 일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액정 부품을 아주 많이 만들었습니다. (엡손의 휴대전화용 액정 부품 사업은 10년 전만 해도 엡손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수익성이 높았다. 노키아에 대량으로 납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희가 아무리 좋은 부품을 만들어도 휴대전화 업체가 스마트폰에 시장을 빼앗기니 곧바로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스스로 최종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비즈니스로 승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엡손은 글로벌 판매 네트워크가 있고 브랜드도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충분히 못 했던 겁니다. 세이코 시계도 그렇습니다. 엡손의 시계 기술력은 여전히 최고이지만, 최종 제품(손목시계)의 브랜드 파워가 충분하지 않으면 결국 사업이 어려워지는 셈이지요.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우스이 사장이 최종 제품에 집중하는 전략을 강조하면서 5년 전 전체 매출의 3분의 1에 달했던 부품 사업은 현재 전체의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2. 최근 제조업은 필요한 부품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수평 분업이 대세인데, 부품부터 최종 제품까지 전부 만드는 수직 통합 구조로 가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수평 분업 구조에서 부품만 납품하다 보면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어려워집니다. 사업을 스스로 주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업체가 이익을 최대화하려면 역시 자사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최종 상품을 취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최종 제품이라면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골프 스윙을 분석해 주는 상품도 그중 하나입니다. 무게가 15g밖에 안 되는 M트레이서라는 기기를 골프 클럽의 그립 쪽에 달기만 하면 됩니다. 측정 데이터가 스마트폰에 무선 전송돼 스윙 궤도, 속도 등 5종류의 해석 결과가 표시됩니다. 스윙 속도의 측정 오차는 약 2%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올해 초 시판했는데 인기가 좋습니다. 엡손이 다른 업체보다 이런 제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엡손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헬스 케어용 모바일 기기는 정밀 센서 기술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센서가 인체의 동작이나 각종 신호를 잡아내는 부분은 전부 아날로그입니다. 아날로그 기술의 정밀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디지털 기술의 정밀도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
4. 정밀기계 강자라는 엡손의 강점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입니까.
"엡손의 강점을 저희 스스로는 '쇼쇼세이(省小精)'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고, 작고, 정밀하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 등 최근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추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가치입니다. 저희의 강점을 살려서 소비자에게 어필할 만한 특징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나갈 겁니다. 지금까지는 스마트폰 하나가 모바일 기기 시장을 주도해 왔지만, 앞으로는 제품군이 다양화·세분화될 겁니다. 이 분야에서 매력적인 최종 제품군을 넓혀나갈 생각입니다. 각 분야에서 전문가용 최고 수준 제품-예를 들어 스포츠 제품은 운동선수용, 헬스 케어 제품은 의사용-에서부터 고객 기대에 부응하는 제품을 내놓은 뒤, 일반 고객이 사용하는 제품으로 영역을 넓혀갈 겁니다."
5. 기술 분야의 톱이었던 사람이 경영의 톱이 되면 어떤 강점이 있습니까. 양쪽을 경험해 본 입장에서 어떤 점이 가장 다릅니까. (그는 30대 중반 프린터 부문에서 '마이크로 피에조'라는 최고급 잉크 분사 기술을 만들었던 엔지니어였다. 이 기술은 현재 세계 프린터 기술의 핵심이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조직을 이끄는 것은 역시 다릅니다. 제가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장이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술을 아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기술을 아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대중이 그것을 정말 필요로 하고 편리하다고 생각할까'라는 문제까지 깊이 고민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저희는 디지털카메라의 발전과 함께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대량으로 출력할 것이라고 예측, 디지털 사진 프린터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요. 저희가 얻은 교훈은 '독선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린터 기술에 강하다는 자신감이 그런 판단을 낳은 것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류 기술자가 경영자가 될 때 아주 유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경영 전문가로서 기술을 이해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 반대 경우가 더 유리하다고 봅니다."
6. 어떤 점에서 유리합니까."하나의 기술을 끝까지 파고들어 본 사람은 기술과 경영에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이 많다고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 선택하고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생각해도 시간과 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쪽으로 방향을 압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옵니다. 우선순위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회사의 힘을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결단력과 함께 식견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기술을 끝까지 추구해서 성공해 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7. 엡손만의 특별함을 보여줄 최종 제품으로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공장에서 사용할 소형 두 손 로봇이 있습니다. 기존 조립 로봇은 손이 하나라서 정밀 조립이 어려운 데다 작업이 바뀔 때마다 아주 복잡한 관련 프로그램을 새로 입력해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개발 중인 두 손 로봇은 사람 크기 정도로 작은 데다 손이 두 개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립 공정을 재현해냅니다. 또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을 넣어서 기본 프로그램만 입력하면 로봇이 알아서 공정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조만간 상용화할 예정인데, 초기 시장은 연간 200억엔(약 1900억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