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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카페 게시글
_정치/외교/안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역사를 보는 눈
무직자-1 추천 1 조회 468 11.05.31 01:34 댓글 3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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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5.31 05:12

    첫댓글 ㅎㅎㅎㅎ이미 우편향(?)된 남한땅에서 "역사"운운하는 것이 맛이 간 것이지 않습니까?
    소망교회 쓰레기들이 어디서든 판치는 세상에서 역사인들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여북했으면 쥐새끼들이 근현대사를 없애려고 까불락거리다가 외려 <국사>를 부활하는 작태는
    안그래도 남한땅에서 사기질 당한 역사를 더 난장판으로 전락시키려는 짓거리이지, 더 뭐겠습니까?

  • 11.05.31 18:46

    당신은 사기라고 포기할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파헤쳐서 밝은 세상으로 꺼 내는 적업을 쉬지를 않슴다 약이 오를지 고마울지는 당신의 선택

  • 11.06.01 00:45

    역사는 사기다!
    그거 누가 한 말이죠?
    이거뭐 조중동이 항상 애용하는 양비론의 일종인가요?

  • 11.06.01 01:06

    저는 윗글에 동의합니다. 역사는 '선택적 기록'이라고 봅니다.
    집단이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기 싫은 것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죠.
    지금도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박적산성을 저들은 호산성이라며 고구려 성벽의 기초 위에다 중국식 성벽을 올리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자 입니다.
    이러한 살아남는 자는 진화의 법칙은 우여한 돌연변이가 우연히 환경게 맞아서 적응해서 살아남게 된거지요.
    우연함에 우연함..그것이 역사입니다.

  • 11.06.01 01:10

    저는 경상도에 삽니다. 그럼, 전라도 충청도에 사는 사람들은 피지배층입니다. 왜냐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까요.
    계백 장군의 후손이 전라도나 충청도에 있습니까? 지금 백제의 후손들은 일본에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했다하지만 우리 한반도 사람들의 성씨를 보십시오. 대부분이 신라계입니다. 경주 김씨, 김해김씨(가야계이지만 신라로 편입) 밀양박씨(박혁거세) 우리나라에 연씨(연개소문), 을지씨(을지문덕), 온씨(온달) 이런 성씨는 매우 소수입니다. 역사는 어차피 강자가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 11.06.01 11:14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것이 아니고 2국를 통일한겁니다.....신라 백제.....고구려는 망하고 바로 발해건국 신라 발해 2국...통일신라는 말도 안돼는 소리 그리고..신라의 성씨가 우리나라에 있는것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탄생할때....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쳐서 몰살 면하고..경주에...봉토를 준겁니다...신라는 우리나라가 아님니다....신라= 차이나 백제=제펜 고구려=코리아 이게 역사의 진실입니다.....!!!!

  • 11.06.01 01:19

    조중동...이거만 말하면 그냥 진보가 되는가보지요?
    조중동이 말하면 무조건 우파, 신자유주의, 친일, 이라고 생각하시나 보지요.,
    짝퉁 좌파들(좀 티미한 인간들)이 무조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려대는 말이 조중동입니다.
    조중동만 말하면 상대가 꼬리를 내리지 싶지요..
    참 어이 없습니다. 조중동이 말하면 무조건 앂어대면서도 조중동의 논리와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도 아는게 없으니 사실에 대한 박박도 못하며서 '조중동'을 욕하면 무조건 진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참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욕을 하면서도 그 욕에 대한 근거도 못대는 분들이...

  • 11.06.08 03:22

    무직자-1님이,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이해을 하겠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읽었던 신문이 (어린이)조중동입니다..7,80년는 민주대 독재였습니다..
    그당시 그들의 역활을 애써 무시하려는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7,80년대보다, 훨 다양한 색깔들을 가지고있습니다
    조중동이 가지고있는 이념적 논조에 대해서 뭐라 하는것이 아닙니다..
    언론의 의무인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쓴다면, 조중동 이라는 유치한 고유명사는 없었을겝니다
    그리고 조중동 비판하면 좌파되는 건가요?...저는 비가 무지 걱정되는, 꼴통에 가까운 짝퉁보수랍니다

  • 11.06.01 03:29

    단언컨데, 우리국민들은 비를 무척 두려워하는 국민이 될거라는 사실입니다,,
    조중동이 최근에 비에대해서 이야기하던가요?..
    저는 비를 무지 걱정하는 현실안주자 이기에, 저는 확실히 짝퉁보수주의자입니다

  • 11.06.02 02:26

    창민님 의견에 백만 표!!!!

    창민님의 이념적 ,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그래도 창민님 글 만큼 찬찬히 읽으면서
    사교육계에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고뇌와 깊이가 있고 균형감각을 가지려 애쓰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적 고뇌가 너무 깊은 것이 오히려 생업활동에 방해가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 11.06.01 13:24

    무직자-1님의 말에 상당히 공감이 가고 있습니다.

  • 11.06.02 02:24

    역사의 현장에 실재하지 않았던 이상 어느 누구도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좋은 예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이곳에도 우수용 할아버지 같은 분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우수용 할아버지와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 11.06.02 02:18

    우수용 할아버지의 눈물나는 역사의 증언입니다.
    -----------------------------------------------
    저는 일정(日政) 때 조선인 징병 1기 해당자로 금년에 86세가 됩니다. 우리 세대의 해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앞으로 얼마 안 있어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세대는 영원히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꼭 해두고 싶은 말을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 11.06.02 02:18

    일본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神風) 대원이었던 경남 사천시 출신 탁경현씨가 1945년 5월 11일 비행기를 몰고 오키나와 섬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대를 향해 돌진, 자폭하여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날, 저는 당시 대전에 있었던 일본군 제224부대 병영 안에서 징집된 육군 일등병으로 폭약상자를 등에 메고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일 전쟁이 몇달만 더 끌었더라면 저는 아마 어느 전선엔가 보내져서 훈련받은 그대로 인간 지뢰가 되어 적군의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저와 탁경현씨는 지금 똑같이 반민족행위자라는 말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 11.06.02 02:19

    그런데 탁경현씨가 죽은 후 석 달 만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해방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성과가 아니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돌변에 의하여 저절로 주어진 요행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해방 덕분으로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저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6·25전쟁 때 경찰전투요원으로 참전하였습니다.지금은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으면서 안락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 그때 죽었던 탁경현씨는 일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반민족행위자라 하여, 외로운 넋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같은 동족들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살아서 국가유공자행세를 하고 있는 제가 죄스럽고 부끄럽습니

  • 11.06.02 02:19

    탁경현씨와 저는 나이도 그 당시 20대 전반으로 같은 세대였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습니다. 그것도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은 선대들의 원죄를 물려받아 병역의무가 없는 대신 참정권이 없어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는 열등한 2등 국민이었습니다. 그 서러움은 젖먹이 나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더욱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 11.06.02 02:19

    같은 동족 어른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이라는 속삭임이 간혹 어렴풋이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궁창에서 살고 있는 소녀가 꿈속에서 신데렐라를 보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가 주어져 저 자신이 징집 1기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두려웠습니다. 죽는 게 무서웠습니다.

  • 11.06.02 02:19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

  • 11.06.02 02:20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 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 11.06.02 02:20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 11.06.02 02:20

    고향에서 제가 보았던 환송행사가 사실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거짓 행사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내 탓은 아니고 남 탓이었을까요? 우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나라 잃은 선대들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구차스러운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11.06.02 02:20

    다만, 지금 반민족행위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세대의 대부분이 어떻게 되어서이든 간에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냈고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이루는 데 기초를 닦은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만은 기억해주십시오.

  • 11.06.02 02:21

    이번에 만들어진 '친일인명사전'인가에는 일본군에 복무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정 계급 이상의 장교는 넣고, 그 이하의 저와 같은 사병들은 개처럼 강제로 끌려갔던 보잘것없는 희생자라 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이름을 뺐다더군요. 그렇다면 그 명부에 등재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있는 완전한 인격을 갖추었고, 이름이 빠진 저희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능력조차 없는 책임 무능력자란 말입니까?

  • 11.06.02 02:21

    이건 우리 세대 전체에 대한 모독입니다. 넣으려면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 넣어야 했습니다. 군인은 장교건 사병이건 넓은 의미에서 모두가 병사입니다. 임무를 위해 내던지는 목숨의 무게는 모두 같으니까요.

  • 11.06.02 02:34

    <사족>

    조선이 독립국이 된 것은 천우신조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해서이지 조선의 독립운동이 강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미국이 일본을 박살내자 덩달아서 동남아 전체, 중국, 조선이 멋도 모르고 얼떨결에 일본의 지배로 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미국을 숭상하라는 의도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폄하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항일 운동은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거의 소멸단계에 접어들었고, 40년대에는 전무한 상태로 한반도는 거의 일본화되는 동화시점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만 일으키지 않았거나, 전쟁에 패하지않았더라면 조선은 지도상에서 만주인들의 운명을 밟았을 것입니다.

  • 11.06.02 02:42

    결론적으로 이유야 어쨋든 우리가 독립국가가 되어 살아있다보니 과거 친일이 어쩌고 저쩌고 큰 소리 치는 것이지, 실상은 어느 누구도 친일분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단죄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죄를 하려면 외부의 영향력 없이 단독으로 독립했어야 배신자라고 소리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류에 편승하여 인민재판식의 역사 단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깊이 고뇌하는 글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이런 점에서 깊이 고뇌하고 아우르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정치, 이념의 모리배들이라는 것입니다.

  • 11.06.02 12:31

    시대상황이 어쩔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시대에 태어나서 보고 배운것이 현실성있게 살아왔노라 말하면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왜 라는 나는 조선인인데 하는 사죄의 반성은 있어야 하고 그가 지금껏 누리는 것에 대하여 당당할 수 없다는것 또한 스스로의 어느나라국민인가를 깨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지금껏 그가 어떻게 살았어야 하는 결과론적으로 그를 이해하려는 합리성을 찾을려고 하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지요. 우리는 한민족이라는것을 잊지않고 용서할 준비는 되어있지만 용서를 구하는 마음자세는 그 후손들에게도 짐으로 있다는것이지요. 지금까지의 행보는 용서를 구하는것이 아니었다는것이 역사이지요

  • 11.06.02 11:04

    공감하기는 좀 어렵네요... 역사라는게 기록한 사람과 해석한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혀지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객관적 사실과 함께 그 의의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도 있기에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완용은 시류에 부합했기에 나쁘기도 합니다만, 매국노라서 나쁘기도 합니다. 자신의 조국을 배신했고 그로 인해서 여러 사람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는데 그걸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 11.06.02 11:15

    전 십몇년전에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인물인 안병직 교수의 수업도 들었습니다... 그때 그분 주장이 일제시대때 우리나라가 일정부분 발전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객관적인 수치만 보자면 일제시대때 도로도 포장도 되고, 유아사망률도 떨어졌을 것이며, 경제도 성장했겠지요. 하지만 일제시대의 발전상은 우리 민족의 의사보다는 일본인의 편의와 수탈을 위한 성격이 강했지요... 단순히 일제시대 때의 발전상만 보고 그 의의를 잊어버린 학자의 현재 모습은 제가 굳이 말씀 안드려도 되겠지요?

  • 11.06.02 16:58

    행운으로 얻은 독립을 당시 당사자도 아닌 후세가 마치 후세 자신들의 독자적 노력으로 독립을 이룬 양 식민시절 선조들을 단죄를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기만과 갈취행위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렸는데 독립업적은 후손들 자신들이 이룬양 사기를 치는 행위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할 문제입니다. 특히 진보라는 작자들!!!
    강제집집 후 탁경현씨의 가미가제 전사후 위령비를 통영에 세우려고 하니까 진보집단에서 친일파로 일본군에 충성한 사람의 비를 세울 수 없다하여 결국 세우지 못했습니다. 기념비도 아니고 위령비인데, 위령비면 역사의 내막을 알리고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되툴이하지 말자는 의미로 비를 세우자는 것인데

  • 11.06.02 17:00

    진보 집단에서 무조건 매도하는 바람에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진보라는 집단이 정치적 입지를 구출하기 위해 얼마나 추악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저지르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일입니다.

  • 작성자 11.06.02 19:22

    무르미 님 견해에 동감합니다.
    일제시대의 논란만 해도 그렇습니다만, 박정희 시대의 논란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 11.06.03 04:12

    우수용 할아버지는 징병 1기라고 했지요. 지원은 1937년인가 그랬으니까 징병 1기라면 1944년 6월 경 징병세대군요. 이 징병 1세대는 저희 아버지보다 좀더 나은 조건이었겠군요. 제가 알기로 일제 징병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신병 훈련도 4-6개월 정도 착실하게 이루어 졌고요. 지금 논산훈련소의 신병훈련 기간이 4개월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1930년 생인데, 6.25때 21살이었습니다. 왜넘들은 식민지 백성도 그나마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신병교육이라도 시키고, 최소한의 일본어 명령이라도 알아듣게 교육하고 전선에 내보냈습니다. 그 절박한 1944-1945년 사이에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식훈련 이틀하고 총알 3

  • 11.06.03 04:01

    3방 쏘보고 바로 다부동 전투에 편입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군인, 식민지 백성인 왜넘들이 교육한 식민지의 징병들보다 더 열악한 총알받이로 나간가죠. 신병교육 사흘 마치고 다부동 전투에 투입된겁니다. 그냥 가서 죽으라는 말이지요. 저희 아버지는 지금 영천 호국원에 잠들어 계십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국립묘지에 가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냥 끌려 간 거고, 살아난 것도 부끄러우니까 그냥 선산에 가는게 더 마음이 편하다는 거였지요. 하지만 저희들이 그냥 나라에서 잘 해줄것 같고, 자손들 보기에도 좋지 싶고, 솔직히 벌초하기도 귀찮아서, 호국원에 모셨습니다.

  • 11.06.03 04:40

    그리고 저희 집은 국가유공자 집안이 되었습니다. 저희 누님이 교사라서 국가유공자 자녀는 외지로 안가도 되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정말 어이없죠. 만약 저희 아버님이 북한에 태어나셨다면, 저희는 아마 인민영웅 집안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미국에 있었으면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었을 거죠. 아니면 일본에 있었다면 야스쿠니 신사에 있을지도 모르죠.이게 역사입니다. 안중근의 아들을 아십니까? 첫아들은 일본인이 사탕을 주어서 죽였다고 하지만 둘째아들은 철저한 친일을 걷고 이토오히로부미의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심지어 상해에 있는 김구 그를 장개석에게 죽이라고 부탁까지 했죠.

  • 11.06.03 04:10

    지금 미국에 남아있는 안중근의 아들 친일파 안준생의 자녀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애국자이지만 아들은 철저한 친일파이며 그 자손들이 지금 미국에 있는 겁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혼을 간직한 사람들입니까?
    짝퉁 좌파, 진보들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이 아는 게 뭡니까?

  • 11.06.03 14:37

    어느 시대든 무엇이든지 일정 부분은 덮이기 마련이죠. 안중근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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