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운세 (외 1편)
고선경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잘 봐 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 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 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누군가는 모든 게 나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그랬다 또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테니 기쁨이라고 제일 친한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될 건데 뭐가 문제?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이지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보세요 부의 기운을 담은 부적입니다 영민함을 상징하는 토끼 두 마리가 그려져 있지요 아 그건 한정판 순금 부적이에요 승천하는 청룡과 여의주가 길한 기운을 가져다줍니다 단돈 칠만 원 없어 인마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럭키슈퍼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2025.1 ------------------------ 고선경 / 1997년 안양에서 나고 전주에서 자랐다.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