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 ‘친일사전’ 등재도 나란히 해방 뒤엔 4·3 ‘토벌’ 지휘
6·25땐 패전뒤 군단 해체되고 전작권 환수 반대 나서기도 29일 대전 현충원 안장 예정
‘대한민국 군번 3번.’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장관(1971~73년)을 지낸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이 90살을 일기로 27일 별세했다. 군은 합참장의위원회(위원장 정승조 합참의장)를 꾸리고 합참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군번에서 보듯 그는 한국군 최고 원로 가운데 한명이다. 하지만 후배 군인들이 그를 마음껏 기리기에는 그의 삶의 궤적이 간단치 않다.
근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재흥 장군은 2대에 걸친 ‘부자 친일 장교’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 유승렬은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육군 대좌(대령)로 일제 패망을 맞았다. 유 장군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일본 육사(55기)를 나왔으며 1943년 보병 대위 시절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런 경력 덕분에 이들 부자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해방 뒤 이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군이 됐다. 아버지 유승렬은 1948년 1주일간 특별훈련 뒤 한국군에 편입돼 102여단장과 1사단장을 지냈다. 1950년 3사단장으로 한국전쟁을 맞았고, 이후 경남과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지낸 뒤 전역했다. 아들 유 장군도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위로 임관했고, 28살에 별을 달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4·3항쟁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뒤이어 태백산 지구 전투 사령관을 역임했다. 친일부역 장교에서 빨갱이 때려잡는 국군으로 변신한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 유 장군은 지휘하는 부대마다 패전의 기록을 쌓는다. 전쟁 발발 때는 자신이 지휘하던 7사단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됐고, 2군단장 시절엔 휘하 6·7·8사단을 몰아 북진을 재촉하다 중공군에게 반격을 당해 막대한 타격을 입고 군단이 해체된다.
1951년 3군단장 시절엔 ‘한국전쟁 최대의 치욕’으로 불리는 현리전투의 당사자가 된다. 중공군 1개 중대가 후방 퇴각로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3군단은 패닉 상태에 빠져 붕괴했다. 유 장군은 비행기를 타고 후방으로 빠졌고, 휘하 3·9사단장은 계급장을 떼고 도망쳤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막대한 양의 차량, 야포, 박격포 등이 중공군의 손으로 넘어갔고, 복귀한 병력은 40%가 채 되지 않았고, 군단이 해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 지휘부(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하고 미8군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투른 한국군이었다. 1951~1952년 포로교환·휴전 회담에 미군 통역으로 참여했던 정경모(재일 통일운동가)씨는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회담장) 뒷자리에서 소곤소곤 일본말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일본말로 통역하는 이는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이었고, 일본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한국군 옵서버로 파견된 유재흥 중장이었다.”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일본군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은 그에게 모국어는 일본어였던 것이다.
여러 작전 실패 등으로 인해 4성 장군이 되지는 못했지만 1960년 군복을 벗은 뒤에도 유 장군은 승승장구했다. 10여년간 타이·스웨덴·이탈리아 등 외국 대사를 지냈으며, 1971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뒤이어 대한석유공사 사장과 석유화학공업협회장 등을 지냈다. 1990년대에는 성우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28일 유 장군 조문을 간다는 군인 몇몇에게 ‘그가 어떤 군인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 옛날 분이잖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 장군은 29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장군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상은 한겨례신문 기자가 쓴 기사에서 퍼온 글이다...
전사학에서 현리 전투를 배웠지만 한국군 역사상 가장치욕적인 패배라서 인지 수박 겉할끼로 배웠었다.
5만 명 이상의 병력과, 중공군에 비해 월등한 장비와 화력을 가졌는데도, 중공군 1개 중대의 기습 게릴라 전에 지레 겁먹고
퇴로가 차단됬다고 판단하고 군단장이라는 자가 정찰기를 타고 혼자 빠져 나왔다.
그 휘하의 사단장들도 계급장을 때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의 부하 5만여명 중 40%가 안되는 이만 돌아왔고 많은 장비와
보급품들이 중공군 손에 들어 갔다.
미8군 밴플리트장군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거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전작권 환수를 극구 반대했던 인물이다!
자신 때문에 넘어간 전작권을 근 60년 만에 찾아 오려 하는데, 그 반대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은 91한살 까지 천수를 누리고 권력도 누리고 보수 쪽에서는 훌륭한 장군으로 추앙하고
죽어서는 국립묘지까지 보낸다.
참 한심한 나라고 한심한 정부고 한심한 군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 3년 기간 동안 전세가 뒤집혀 한국군이 몰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마다 유재흥이 있었다. 이 정도 활약상이면 김일성이 공로훈장을 추서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양반은 그후로도 승승장구 무려 국방부 장관에까지 이르게 된다.(1971~1973) 이 당시 북한군 간부들이 남한군을 얼마나 같잖게 생각했을지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광복이후에 미군정에 의해 친일 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었고, 군도 그러했다
백선엽이의 경우는 친일 경력은 있지만, 그나마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로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유재흥이라는 이사람은
지 아버지부터 친일 군바리에, 별 달고 나가서 싸운 전투에서 패하기만 했고, 도망만 쳤는데도
잘 먹고 잘 살았고... 보수의 중심에서 큰소리 다치고 살았다 ㅠㅠㅠ 쓰발 젠장 지랄맞다...
그런데 국립묘지에 가고 합참장으로 치뤄준덴다...
원균은 칠전량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 했지만,(패장이란 이유와 이광수의 오도된 소설탓에 더욱...) 몇 백년 동안 욕을 먹었는데
유재흥이라는 저 일본군 장교는 뭘 했다고 저런 대우를 해 주는지... 성우회 회장을 지내서 그런건지 ㅠㅠㅠ
진짜 짜증이 지데루다 ㅠㅠㅠ
첫댓글 개념없는 국가...부끄러운지를 모르는작자들...
이룬......조까고 ㅜ
진짜 니기미~
클클 딴나라니까요
반대로 5,16과 10,26에 반대한 원로 장성들은 비참한 인생들을 살다간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그 주요 이유는 친일파들이 이나라를 휘젓고다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분도 참....그러니까 조중동,한나라 조잘대는 소리를 뇌에 한번 들여보냈다가 일분쯤 저장했다가 판단,해독하셔야지여...
군의길 하나: 군인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방 깐거 같습니다.
이해해여~ ㅋㅋㅋ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철회하고 막아야 합니다..국가유공자들과 독립유공자들과 육이오전사자들을 모욕하는 짓거리 입니다.
으............열받어!
이국가에 뭘 바라지마시요! 담국가가 이장 시킬테니...
그래서 한국에는 볼것없다고 지성인들이 모두 바리바리 보따리 싸서 이민가는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