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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로마 3,21-30ㄱ
복 음 : 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이색 놀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이 놀이터는 잔디밭과 테니스코트와 볼링장, 어린이공원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다른 놀이터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입구에 ‘젊은이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나이트브리지협회의 매들린 엘스던은 BBC 등과의 인터뷰에서
“공원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나이 든 이들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며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든 티를 내고 싶지 않다면서 이용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하긴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은 참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젊은이가 출입할 수 없는 60세 이상 노인의 놀이터도 생겨났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서로 분리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면서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분리해나갑니다.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이러한 분리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서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나라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어제 복음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판단이 바로 하느님의 판단인 양 사람들을 단죄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자신의 판단으로 박해하였으며,
이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죽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인 듯한 생각으로 행동하면 결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맞고 남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보다는 거짓된 위선과 자기만 아는 이기심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할 수 없는 자리가 되고 맙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고 오랜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채워주려고 애쓰는 것,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 안에서만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앞의 진정한 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율법 학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겐 경외와 믿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버린 듯 보입니다. 사실 그게 더 쉬우니까요.
그들에게 구원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여 얻는 은총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정확히 실행하는 데 대한 보상 정도로 축소된 듯 보입니다.
인간이 깨우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지식은 '하느님을 앎'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제도가 부여한 권한으로 율법에 담긴 사랑의 깊은 샘을 덮어 버리고
그 언저리만 맴돌면서 다른 이들의 접근조차 방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원래 율법은 하느님과 더 깊이 사랑을 나누라고 주어진 선물이지만,
편협하고 게으른 안내자를 통해 자칫 선량하고 단순한 이들이
율법은 물론 하느님마저 거북하고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 소지가 있습니다.
소위 율법과 종교 전문가들이 하느님 사랑의 정수로 이어지는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기득권 유지와 백성의 통제에 더 도움이 되긴 합니다만...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의로움을 획득하여 구원받는 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로마 3,21-22)
기존 유다인들에게 사도 바오로의 이 가르침은 가히 폭탄선언과도 같았을 겁니다.
율법이 구원에 별 의미가 없다니요!
예수님을 적대하고 앙심을 품었던 종교 기득권자들이
사도 바오로에게도 같은 칼날을 겨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율법의 정신을 사는 것과 믿음은 별개의 길이 아니지만,
율법의 문자를 수호하는 것과 믿음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문자를 고수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지요.
문자 적용에는 마음까지 쏟아 부울 필요가 없고
또 존재적 회개와 사랑까지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원자시라는 믿음은
세상 시류에 역행하는 어렵고 모험적인 길이긴 하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존재적 방향 전환과 뜨거운 사랑, 벼랑 끝에서 존재를 던지는 믿음이
곧 구원의 상태니까요.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되는 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민족이나 제도, 신분이나 타이틀에 의거해 의롭다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주님과 깊고 친밀하게 엮인 사랑이 그분과 하나 되는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길에서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더욱 겸손하고 선하고 충실한 믿음의 안내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신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 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의 악함을 씻을 수는 없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례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는다고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을 헐뜯거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비아냥거리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나 않은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국어시간에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왜’와 ‘어떻게’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과학의 분야에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의문 나는 부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도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원인을 알면 판단을 내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은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 늦게 출근한 것은 왜의 문제입니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있을 수 있고, 마라톤 대회가 있어서 길을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면을 끓이는 것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스프를 먼저 넣고 끓이기도 하고, 계란을 넣고 끓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왜’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자주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고, 우리도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하는데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줍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인데 밀 이삭을 따서 먹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단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끝나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안식일에 소나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이 궁색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중에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10명을 보아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왜라는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라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다 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자비를 베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왜’ 나를 배반하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라는 말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라는 말은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살면서 왜라는 질문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그리스도가 되는 것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말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당신도 예언자이기에 그들이 당신도 똑같이 죽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조상으로 삼지 말고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조상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조상이면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면 조상이 한 그대로 살다가 조상이 저지른 모든 죄까지 벌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요?
조상까지 나무라는 예수님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임을 고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면 곧 하느님 백성일까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 한국 사람일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만 가지면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면
그는 더는 진정한 한국 사람이 되는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나의 목표가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인 ‘힘의 길’이란 유튜버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전자 검사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결과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였고 시베리안 피도 섞인 56.06%의 동아시아인,
그리고 동유럽과 핀란드인 피가 섞인 35.6%가 유럽인,
4.84%의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왜 놀랐을까요?
자신은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시베리아인 피’가 섞여 있어서 보드카를 좋아하고 눈이 좋은 것 같다고.
이렇게 우리는 조상을 알면 그 조상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조상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한국말’밖에 못합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처럼 자신도 미국인이라 생각했다면 분명 영어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강하기에 한국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미국인이지만 본인이 한국인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힘의 길’ 씨 앞에 아버지가 계속 계셨다면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생활이라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이미 유튜브에서 밝힌 사연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힘의 길 씨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서 결혼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처럼 한국말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발전은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만 한정된 이야기이지
이분이 인성적으로나 세상의 측면에서 발전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대상보다 내가 너무 못나서 벌레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기에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 앞에는 항상 자신을 아직 많이 부족하게 여기게 만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처럼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대상이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JTBC의 ‘말하는 대로’에 샤이니의 ‘키’(Key)가 나와 팬들과 소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26세였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나답게 사는 법’이었고 제목은 “닭이 닭답게 못 사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키의 이름은 김기범입니다. 그는 왜 자신을 닭이라 여겼을까요?
처음엔 샤이니 모든 멤버들이 ‘백조’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백조로 태어나서 금수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는 몇 번의 오디션에 떨어지고 간신히 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5위였습니다. 멤버가 다섯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는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처음부터 백조였다는 말은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오히려 가수 키는 다른 멤버들은 ‘백조’이고 나의 출신은 ‘닭’이니 닭답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답게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히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을 믿어야만 이렇게 겸손해집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을 통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신 앞에서 자신은 닭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샤이니 멤버 중 점점 인지도가 향상하는 가수는 키라고 합니다.
요즘 개인 앨범도 내고 많은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닭’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분명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하느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닭이니까 백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는 결심입니다.
그는 주근깨도 찢어진 눈썹도 가리지 않고 방송에 출연합니다.
자신은 닭이니까. 그래서 어려운 연예계에서 무탈하며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상을 내 앞에 두십시오.
마치 아기가 부모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대상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이 완성되면 거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면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셔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베드로처럼 물 위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세례 받는 것,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