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를 바꾼 鐙子 趙甲濟
2011년 추석 연휴 때 '최종병기 활'을 대한극장에서 보았다. 미국의 활극 같은 재미와 긴장이 있었다. 韓民族의 역사는 활로 시작되었다. 중국이 우리를 東夷라고 부른 것은 '동쪽에 사는, 큰(大) 활(弓)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고구려 창건자 주몽, 조선 開國의 영웅 이성계가 다 名弓이었다. 한국에선 칼 잘 쓴 사람보다 활 잘 쏜 사람 이야기가 더 많다. 한민족의 활 실력(양궁)이 지금도 세계적인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발명 중에서 가장 하찮게 보이는 것이 있다. 말의 발걸이, 즉 등자(鐙子)이다. 이것과 말과 활이 결합되면서 몽골 草原 지역의 유목민족들이 騎馬軍團을 强化하여 그 뒤 1000년 간(소총이 발명될 때까지) 군사적 헤게모니를 잡고, 유럽과 중국과 중동의 문명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란系 기마민족인 스키타이族이 서기 전 6세기경에 말발걸이를 발명하여 흉노 등 몽골-투르크系 기마민족에 전했고, 이들이 3세기경에 중국 북부와 한반도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漢族과 韓族들 사이에 퍼져갔다는 게 定說이다. 말을 타는 사람이 발걸이를 사용하면 몸을 안정시킬 수 있다. 활을 쏠 수 있고 칼과 창을 더 잘 쓸 수도 있다. 발걸이가 발명됨으로써 騎兵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보병을 향하여 말을 탄 기병이 창을 겨누면서 돌진하면 말의 무게와 속도가 창을 통하여 전달됨으로써 무서운 돌파력을 발휘한다. 북방 유목 민족은 발걸이가 발견되지 않을 때도 말을 잘 탔고 馬上에서 활을 쏘았다. 발걸이가 발명됨으로써 이들의 활쏘기가 더 발전하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보듯이 말을 탄 사람이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기도 하였다. 당시의 로마 기병은 흉내도 낼 수 없는 妙技였다. 말발걸이 유물은 4세기 전후의 신라, 가야 고분에서부터 많이 발굴된다. 여기서 발굴된 발걸이는 쇠로 만든 것과 木心철제가 있다. 모두가 쌍발걸이이다. 발걸이는 처음에는 하나만 안장에 매달았다. 이 발걸이는 말에 오르기 위한 일종의 디딤돌이었다. 전투용 쌍발걸이는 그 뒤에 나온 것이다. 연도가 확인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雙발걸이는 중국 요녕성에서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서기 415년에 죽은 것으로 적혀 있으므로 이 철제발걸이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쌍발걸이의 제작연도에 대해서 崔秉鉉 숭실대 교수는 最古가 4세기 전반기라고 추정했다. 신라에선 4세기부터 積石목곽분이 나타난다.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몽골, 만주, 알타이 산맥 등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경주에 와서 정착할 때 이미 쌍발걸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병 전투력을 가진 戰士집단으로서 先住民들을 정복하고 金氏왕조를 세웠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먼저, 발걸이를 이용한 騎兵 전투력을 보유한 축에 든다. 주로 가야 사람들을 통해서 발걸이는 일본으로 들어갔다. 물론 기병과 함께. 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에 들어간 이들 기마민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일본열도를 점령해가면서 고대국가를 건설한다. 유럽에 말발걸이가 전파된 것은 아바르族이란 몽골계 유목민족에 의해서이다. 6세기 전후이다. 보편화된 것은 8세기 이후. 그 전에 그리스-로마 기병들은 몸을 안정시킬 수 없어 활을 쏘지 못하였다. 말발걸이가 유럽에 전파됨으로써 귀족들이 騎兵을 조직할 수 있게 되어 봉건제도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칭기즈칸 군대가 유럽으로 쳐들어가 連戰連勝하였을 때 主무기도 활이었다. 화살은 200m 이상 날아갔고 다양한 용도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선 활을 비겁한 무기로 규정, 사용을 금지 시킨 적도 있다. 로빈 후드 전설의 영국이 예외적으로 활을 잘 썼다. 100년 전쟁 때인 15세기 영국의 長弓부대가 프랑스의 중무장 기사들을 섬멸한 적도 있다.‘활+발걸이+말=기동력’이 1000년간 계속된 유목 기마 민족의 군사적 優位를 뒷받침하였다. 한국은 조선조부터 말타기, 활쏘기가 쇠퇴하였다. 文弱한 선비들은 육체 노동을 경멸하였다. 조선조 말에 가면 양반들이 혼자서 말을 탈 수가 없어 종이 따라다니면서 엉덩이를 붙들어주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민족적 野性이 주자학적 知性에 눌려 고갈된 탓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