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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운명?>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까?”
세례자 요한의 특별한 탄생을 지켜보며 친척들은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아이의 운명이 하느님 손에 있음을 부모들은 알기에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으려고 하지만,
친척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기 관습대로 지으려 하고, 아이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요한의 특별한 탄생과 운명을 보면서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묵상합니다.
우리의 탄생과 운명도 실은 같은 것이라는 묵상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부모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탄생이 부모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불신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시작이 이러하니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운명이 전부 다는 아니어도 많은 것이 탄생 때 이미 결정된 거라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다른 부모가 아니라 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제 아버지의 결정이나 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의 태어난 날이나 혈액형이나 성향이나 이런 것들도 다 저의 결정이 아니고, 그렇다고 제 부모 뜻대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향적인 자기 성격이 싫어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려 하고,
부모도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자기 입맛에 맞게 키우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도 부모 입맛대로도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내 뜻이나 부모의 뜻과 다르게 나의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지요.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이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도 그 존재가 하느님 뜻과 사랑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렇기에 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하느님 뜻대로 정해졌는데,
그것이 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순종이요 순응이겠습니다.
즈카르야는 처음 하느님의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였고, 그래서 의심을 퍼트리는 말문이 막혔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믿게 되고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짓자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의심의 말문은 막히고 찬미의 말문은 열려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감사하였고,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가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 3,4; 요한 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하며 구세주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전통에 따른 이름을 붙이려고 했지만 '안 됩니다' 하며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을 증거한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에게 몰렸지만 이제 새로운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탈랜트만큼 최선을 다해서 일할 뿐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분수를 아는 사람이요, 주제 파악을 잘하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확실히 지켰습니다.
아마도 그가 자기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그 열매까지 먹으려 했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은 물러설 때를 알고 구원 사업은 하느님께서 내 도움이 없이도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 방법, 내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파견된 사람임을 자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의 힘이 다 소진된 끝에 비로소 하느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대림 시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여러 인물들 가운데, 특별한 두 분이 계십니다.
인생을 살만큼 사셨기에 이제 슬슬 삶을 정리해야 할 순간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지니게 된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두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올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늘그막이 되도록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호호백발이 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놀랍게도 노부부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기에야 겨우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아무리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 늘 오늘 지금 여기서 따뜻한 “봄의 사람”이 되어 삽시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대림 제2부 마지막 7일째 12월23일 “O후렴”도 간절합니다.
만민이 갈망하는 구원이자 만민이 갈망하는 주님께서 오실 날도 가까왔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런 따뜻한 일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기 수도원만 오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사람한테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뜨거움입니다.”
“주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김포에서 인천에 들려 친한 자매를 태우고 오전에 별내성당에 도착하여10시 미사후 주님이 차려주신 동지 팥죽을 먹고 수도원 따뜻한 성전에 와서 오후 내내 머물다 고백성사를 본후 끝기도를 하고 간 자매의 고백입니다.
왕복 4시간 거리에도 불구하고 주님 만날 뜨거운 기쁨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은 것입니다.
“신부님, 어제 고해본 자매입니다. 고해성사의 기쁨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따뜻한 면담고해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갑자기 방문하여 면담고백성사를 본 두 분의 메시지입니다.
“따뜻한” 이란 말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연일 강추위가 계속됩니다.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는 사람입니다.
따뜻한 집, 따뜻한 방, 따뜻한 밥, 따뜻한 사람, 따뜻한 대화, 따뜻한 위로, 따뜻한 공동체, 따뜻한 책등 끝없이 따뜻함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참 따뜻한 고전을 발견했고 모두 들어다 집무실에 놓았습니다.
좋은 책만 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냥 행복해집니다.
모든 욕심은 비워지고 충만한 기쁨에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비매품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전> 15권까지 시리즈로 나왔는데 12-14권까지 지니게 되었고 원장수사와 메시지를 나눴습니다.
“12-15권 까지는 있는데 1-11권까지는 없네요. 구입할 수는 없는지요?”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이 사랑이 담긴 윗트의 말마디가 얼마나 제 마음을 따뜻하게 했는지요!
순간 떠오른 생각에도 감사했습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정말 날로 주님 사랑하고 싶은 청정욕淸淨慾 하나뿐 다른 욕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기도요 공부요 봉사요 회개이지 죽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까운 시간 부수적인 일들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질적인 일에 써야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 생각없이 많이 만나기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쓰레기 같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보기보다는 정말 따뜻한 고전같은 책을 선별해 보는 이치와 똑같은 사람들간의 만남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나 참 좋은 책은 만날 때 마다 늘 좋고 새롭고 따뜻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원전> 책권마다 표지 글도 깊고 좋고 따뜻했습니다.
“오래고도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o amtiqua et nova!)"
-교부문헌이 탄생한 자리는 책상머리가 아니라,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로 누벼진 민중의 애달픈 삶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교부들의 많은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이고, 힘이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특히 사회교리나 교회생활에 관한 탁월한 가르침은 현대교회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성 아구구스티누스(설교56,10,14)의 간명한 이 아름다운 말씀도 얼마나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지요!
이 한마디 안에 모든 답이 다 들어있네요!
아주 오래전 "제비꽃"이란 자작시도 불현 듯 떠오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꽃자리이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사랑이구나
절망은 없다”
계속되는 강추위 겨울인데 벌써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입니다.
그러니 강추위속에서도 따뜻한 봄같은 사람이 되어, 겨울속의 봄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둘 때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되어 살 때, 그때에 맞게 “봄의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다리고 참아내며 일상의 일에 깨어 지극히 충실하며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모든 시간이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라기 예언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을 통해 실현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말라기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참 따뜻한 사람, 즈카르야-엘리사벳 부부를 통해 실현됩니다.
때가 될 때까지 자기 꽃자리에서 일상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충실하며 묵묵히 견뎌내고 버텨낸 두 부부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작명 문제로 의견이 분분한 때, 때가 되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니, 바로 우리가 날마다 아침성무일도때 마다 바치는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바로 요한의 이름뜻은 얼마나 좋습니까.
말그대로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때가 되어 아들, 세례자 요한을 낳았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모두 함께 기뻐했다니 모두의 마음이 참 밝고 따뜻해졌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야 말로 주님의 희망과 기쁨의 표지가 되어 밝음과 따뜻함의 샘이 된 것이지요.
이런 분위기를 접한 사람들은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심을 느꼈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합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은총의 대림시기,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 출생한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를 향한 물음일 수 있습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묵상하며 오늘의 때에 맞게 겨울속의 봄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우리 모두 강추위속에서도 따뜻한 봄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모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도 정성스럽게, 그리고 충실하게 주님을 맞으려 애쓰는 이들을 만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루카 1,60)
출산한 지 열흘도 채 안 된 늙은 산모가 외칩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부친이나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 풍습에 따라 아기를 "즈카르야"라 부르려 하는데 아기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루카 1,13)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이 전언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 풍습이나 관례, 취향이나 선호도로 뒤집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재차 확인을 요구받은 즈카르야마저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이라고 쓰자 이웃과 친척들이 물러나지요.
이름에는 그 사람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름 안에 녹아듭니다.
이 존재의 호칭이 무수히 불리워지고 언급되면서 그 이름의 의미역시 그 존재 안에 더 깊이 각인되고, 그는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과 목적성을 더 깊이 살아가게 되지요.
요한에게 주어진 이름을 지키려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노력은 구원 역사 안에서 이 아기에게 배정된 하느님의 계획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정성과 충직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숙제까지 마치고 나자 비로소 즈카르야의 혀가 풀립니다.
의심으로 묶였던 것이 믿음의 증언으로 제 구실을 되찾은 것이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두려움에 휩싸인 이웃들을 통해 아기의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민중에게 일말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 마음 안에 떠오른 이 질문의 답은 제1독서 안에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말라 3,23)
말라키 예언서 저자는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세상을 준비시킬 "엘리야 예언자"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아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기의 이 역할과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주님의 뜻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했지요.
살다보면 희생도 해야 하고 물러나 주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 말씀의 완성과 관계된다면 더더욱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말라 3,1)
주님께서 당신 성전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이고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한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오심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성전을 가꾸어야겠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송)
주님께서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성탄이 거의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과 우리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니 우리 편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겸손과 가난으로 오시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혼의 문을 활짝 열지 않는다면, 구중궁궐 안에서, 거룩한 수도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온갖 전례와 행사와 이벤트 한가운데 있더라도 성탄의 기쁨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고 숨을 고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뛰어난 성과나 고액의 헌금, 모두를 만족시킬 재주보다는 가난한 그분이 마음껏 편히 머무르실 수 있는 소박하고 정성스런 우리 마음의 구유입니다.
초라해도 좋고 빈한해도 좋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유를 값지게 해 주실 분은 거기에 누우실 아기 예수님이시니까요.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08년 시흥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지역 교육담당 사제’를 맡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 일과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겸임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습니다.
주교님은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보좌신부’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당 일을 나누어서 할 수 있으니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보좌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돌아와서 공지사항 때 보좌신부님이 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교우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1년 동안 혼자 지내던 저도 보좌신부님과 함께 지낼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숙소와 신부님의 숙소에 필요한 가구들을 마련했습니다.
신부님 숙소는 깨끗하게 청소하였고, 가구도 새로이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을 발표하였고, 본당에는 첫 번째 보좌신부님이 왔습니다.
보좌신부님이 처음 오던 날은 성탄이 가까운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크고 온화하신 보좌신부님은 성탄선물처럼 왔습니다.
신자들이 반갑게 맞이하였고, 주일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의 인도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곳을 향해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이 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동방박사들처럼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순명’으로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의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식물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미를 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름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이름입니다.
저는 두 개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름들을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름은 ‘조재형’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룬다는 뜻이고,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중용’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름의 의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제게는 소중한 이름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제게는 가장 적합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세례명이 가지는 뜻을 생각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가 아니라 생각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실재이며, 생각과 같은 가상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며 생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카페 안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의 스트레스가 대단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카페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은 갓 볶아낸 신선한 커피 향을 즐기며 평화롭게 다른 사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제는 카페 안이지만, 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 차이는 바로 생각 안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 안에서 우리는 지금을 전혀 다르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생각을 실제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밉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까요?
그와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한 노력, 이것이 지금을 잘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자기 실제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멀리하라고 강조하셨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지금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꿔야 할 생각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잉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였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적었을 때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에 함께 하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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