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崔沖)-절구(絶句)
滿庭月色無煙燭(만정월색무연촉) 뜰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
入座山光不速賓(입좌산광불속빈) 다가와 앉은 산빛은 청하지 않은 손님이네
更有松絃彈譜外(경유송현탄보외) 솔바람이 악보 없는 가락을 타는데
只堪珍重未傳人(지감진중미전인) 나 혼자 즐길 뿐 전할 수 없네
*위 시는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시 김용택의 한시산책1(김용택 엮음)(화니북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용택님은 “산빛은 가을 산빛이 좋고
달빛은 겨울 달빛이 좋다네
달이 높이 뜬 밤
달 아래 앉아 놀기는 여름 달빛이 좋고
봄 달빛은 흐르는 물에서 더욱 빛난다네
내 마음 달빛에 담아 님께 실어 보내기는
새벽 달빛이 그만이라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최충[ 崔沖, 984 ~ 1068, 자는 호연(浩然)]-교육과 인재양성으로 고려를 재건한 명재상, 최충은 학교 교육의 아버지였다. 그가 세운 9재학당은 사학교육의 원조였고, 고려시대 문신 배출의 산실이었다. 최승로가 유교적 정치개혁에 공헌한 인물이라면, 최충은 유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인물을 배출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세운 9재학당이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입시 교육장이었다는 비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 유교 경전에 바탕을 둔 그의 학문 교육은 유학이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문종 대 고려 유학(儒學)을 꽃피우게 한 최충은 984년 해주 최씨 최온(崔溫)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친인 최온은 향리 출신으로 해주 최씨 시조로도 올라 있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최충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글짓기를 잘했다. 또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과 지조가 굳건했다. 1005년(목종 8년)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최충은 과거시험에서 갑과(甲科) 1등으로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갔다.
최충이 관료로 진출하는 데는 최항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할 때 최항이 지공거였다. 지공거는 과거시험 집행관으로 지공거와 합격자들은 좌주(座主)-문생(門生)이라 하여 유대관계가 돈독하였다. 게다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려는 역모를 일으켰을 때, 최항이 이를 진압하고 현종 즉위에 공을 세우면서 최충의 관료 생활은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최충은 관료생활 동안 현종·덕종·정종(靖宗)·문종에 이르는 네 명의 왕을 섬겼다. 재상이 되자 법률관을 동원하여 기존의 율령을 개정하고 서산(書算)을 고정하는 작업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하였다. 문종 대에 이루어진 수많은 법제도의 정비는 사실상 최충이 재상 시절에 일궈낸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 최충은 1053년(문종 7년) 문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를 결심했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 그러나 40여 년에 걸친 기나긴 벼슬생활을 마감한 노재상의 앞에는 또 다시 후진양성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놓여 있었다.
최충이 활동하던 문종 초기는 거란의 침입과 전화가 아물고서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중앙 정부가 교육까지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중앙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지방의 향학은 갖추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교육에 대한 새 바람이 절실하던 때였다.
서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학은 최충이 세운 9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의 학당은 금세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교육 장소를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인근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넘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9재학당이었다.
이때 세워진 9재는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 9개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은 진학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초학자는 먼저 악성재에 들어가 6예를 익히고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재를 거쳐 마지막에 대빙재에서 수학함으로써 졸업하는 것이다. 9재학당의 교과서는 9경과 삼사였다. 9재에서의 교육은 아직 철학적인 궁리(窮理)의 공부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고, 9경 3사를 중심으로 한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9경 3사가 어떤 과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개 9경은 [주역]∙[서경]∙[시경]∙[의례]∙[주례]∙[예기]∙[춘추좌씨전]∙[공양전], 3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은퇴한 이후로 사학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인 최충도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살아 생전 최충은 평소 두 아들 최유선과 최유길에게 권력보다는 학문의 길에 종사하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 한다.”
최충의 유언대로 최사추 등 자손 수십 명도 이후 모두 학자로서 재상에 올랐으니 최충은 자손들의 교육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최충은 일명 ‘해동공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9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능통한 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최충은 9재를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공자와 견주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최충의 사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최충이 그나마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로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에 의해서였다. 1551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고적(古蹟)을 탐방하던 중 최충의 고향인 해주 수양산 잡초 덤불 속에서 그의 사당을 발견한 것이다. 주세붕은 폐허가 된 사당의 누추한 모습에 한탄하며 그곳에다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우고 최충을 배향하였다.
*速賓(속빈) : (→請客(청객))
첫댓글 한 폭의 산수화를 본 듯 하네요....
달 빛을 벗 삼아 술 한잔 곁들이면 금상첨화 일듯~~
ㅎ, 강 위에서 배타고 술마시며 달까지 본다면 더 좋겠네요.
지기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행복한 금요일과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