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퉁소 소리
주 재순
달빛 한 줄기가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빠꼼히
들여다보더니, 점점 깊숙한 안쪽까지 헤집고 들어왔다. 선녀가
내려올 길을 펼쳐 놓더니, 그 위로 또 비단을 살포시 드리워
주고 있다.
둥근 저 달을 그대로 잡아 둘 수는 없을까. 정안수대접에나
담아 놓고 그리움이나 나눌 수 있다면….
달은 영원한 정서인가 보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설친다
해도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그날까지 영원한 우리들의 서정,
우리들의 연인이 아니던가. 어찌 그냥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지….
어느 때 쯤인지 언뜻 잠에서 깨어나 비집고 스며든 달빛 한
가닥에 놀라 창문까지 열었더니 기다린 듯 쏟아져 대청마루로
밀고 들어오는 달빛! 숨을 멈추게 했던 달빛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많은 이야기가 까마득한 낯선 이야기로
퇴색되어 가는데 내 아버지 퉁소 소리는 그대로 잘 보관된
청자 항아리처럼 비취빛 푸르름으로 이 밤에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애틋한 부정(父情)의 그리움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뭇잎 하나에도 그리움을 더하고 휘영청 밝은 달빛은
차라리 부추기는 그리움으로 울어 버리고 싶다.
오늘 같은 밤이면 당신의 한(恨)을 퉁소 소리에 실어 토해
내던 내 아버지.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신지 강산이 네
번이나 뒤바뀌는 시간이 흘러갔다. 가족 위해 희생하는
모정(母情)보다 태산처럼 큰 무언의 삶을 남겨 준 부정이
소록소록 가슴져며 오는 것은 세월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쌓인 나이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불혹을 넘고 다음 고비에서 쓰러지신 아버지는
회한(悔恨)의 슬픈 눈물이 고일 때면 늘 퉁소 소리로 마음을
달래었다.
아버지는 왜정 말기, 중국 광복군과 내통하는 용의자로
몰려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 8·15
광복으로 풀려 나왔다. 후유증으로 몸이 부자유스러웠고
이마에는 밥알만한 고문의 상처가 큰 애국 훈장으로 남아
있었다.
어디 그 뿐일까.
6.25 사변때는 국군 가족이라는 이유로 후퇴하는
공비들에게 붙들렸다가 총살 직전에 탈출, 구사일생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병마와 싸우다
영원한 곳으로 일찍 가셨다.
달빛이 다정하게 찾아오는 그런 밤, 어김없이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손수 만든 퉁소는 큰
엄지손가락 굵기의 대나무를 50cm 정도로 잘라, 앞쪽 구멍
다섯 개, 뒤쪽에 한 개 모두 여섯 개의 구멍이 있다.
그 퉁소 소리는 어떤 곡조가 있는 소리도 아니었고 그저
당신의 한을 절규하듯 토해 내는 자연스런 가락인데 애절하고
서러운 사연의 운명 교향곡이다. 달빛을 벗삼아 깊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소리는 달빛에 공명되어 허허 공공(虛虛空空)
속으로 파고 들어가 가녀린 여인의 애틋한 사랑 노래가
되기도 하고, 자식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모정이 되기도 하고,
고달픈 영혼을 달래 주는 자장가가 되기도 하였다. 섬세하게
떨리는 한 가닥의 금(金)실 소리는 저 멀리 퍼지며,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쥐어짜 흔들어 놓기도 하여. 창백한 가락에
달빛마저 감흥 되어 파르르 떨릴 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연이 몸부림치며 영혼을 불러들이는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혀의 놀림과 손가락의 떨림과, 오묘한
음색의 대나무! 이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애조의 신비로운
가락은 당신의 파란만장한 한(恨)의 삶이었으리라.
기억의 풀섶을 헤치노라면 잔잔한 미소의 그 얼굴을 만나고
그 때의 퉁소 소리가 아리하게 파고드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굽히려거든 차라리 나는 부러지겠다.” 시던 당신의 큰 모습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달빛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서 있었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놓고 불면의 밤을 몽유하고 있는데, 당신께서는 눈이
부시도록 진초록 빛깔로 단장된 한그루의 큰 소나무가 되어
'만고풍상'을 소화해 낸 고고함을 향기로 피워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문득 어느 날 퉁소 소리가 재생되어 떠도는
바람까지 초대 할 그때. 그때 그 소리와의 재회도
이루어지겠지…..
98. 6.9
첫댓글 만고풍상'을 소화해 낸 고고함을 향기로 피워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문득 어느 날 퉁소 소리가 재생되어 떠도는
바람까지 초대 할 그때. 그때 그 소리와의 재회도
이루어지겠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쥐어짜 흔들어 놓기도 하여. 창백한 가락에 달빛마저 감흥 되어 파르르 떨릴 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연이 몸부림치며 영혼을 불러들이는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혀의 놀림과 손가락의 떨림과, 오묘한 음색의 대나무! 이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애조의 신비로운 가락은 당신의 파란만장한 한(恨)의 삶이었으리라.
한그루의 큰 소나무가 되어
'만고풍상'을 소화해 낸 고고함을 향기로 피워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문득 어느 날 퉁소 소리가 재생되어 떠도는
바람까지 초대 할 그때. 그때 그 소리와의 재회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