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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 2티모 4,10-17ㄴ
복 음 : 루카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중세 때, 어느 기사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의 부모님께서는 위험한 전쟁터이기에
쇠로 만든 아주 튼튼한 갑옷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떤 화살도 또 칼날도 뚫을 수 없는 아주 튼튼한 갑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갑옷을 입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대신 종이로 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이것도 갑옷이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 사람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무겁고 힘들어도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갑옷의 무게를 이겨낼 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갑옷 탓을 하면서 종이로 만든 갑옷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편함이 큰 후회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치 이 무거운 쇠로 만든 갑옷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갑옷을 입어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주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어리석게 보여서
종이로 만든 세상의 갑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면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주의사항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세상의 종이 갑옷이 아닌, 주님의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 다른 사람은 모두 세상 안에서 나에게 도움을 줄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주님께만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불편이 가득할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서는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의 유혹이 침범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많은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은 실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따른다면
세상의 것이 하나도 없어도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 선포의 기본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시어"(루카 10,1)
열두 제자의 이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그들의 부르심부터 활동상까지 복음서에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파견하시는 "일흔두 명의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숫자만 알 뿐 이름이나 활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들은 서운할지 몰라도 저는 이 익명성에서 다른 의미를 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이라면 이 일흔두 명 중 하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가능성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가능성이 되겠지요.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복음 선포의 여정은 아무 근심 걱정 도전 없는 꽃놀이 여행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강도 높은 비유에 의하면 순하디 순한 양들이
굶주린 이리떼 우리 안에 던져지는 극적이고 잔인한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제 발로 안위가 보장되지 않고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으로 걸어들어가라는 것인데,
거기에 더해 돈이나 여행 물품 등의 안전장치마저 지니지 말라고 하시네요.
복음 선포 여행이 일반 출장이나 유람이 아닌 이상,
재물과 무기와 힘과 인맥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 말씀과 그분 섭리에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복음 선포자는 평화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가장 자기다울 때 평화가 유지됩니다.
누구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훼손되고 파괴되면
이 평화가 깨져버리고 말지요.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품으신 기대를
회복시키고 완성하는 하느님 말씀이기에,
누구를 만나든 평화의 축복으로써
상대의 창조적 온점함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갈망 가득한 마음을 말씀의 샘물로 적셔 주고 친구가 되어 주며
병자를 치유하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모두
누군가의 평화를 되돌려 주는 행위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평화의 건설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복음 선포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강생하여 오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성큼 들어왔습니다.
또 그 주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로 인해
아주 가깝게 실질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중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의 두 협력자를 언급합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1티모 4,11)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와 선교 여행을 함께하면서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내용을 기록하여 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실 선교여행 중 바오로를 버려두고 떠난 적이 있어
나중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결별하게 된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사도 15,37-39)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오로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베드로의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지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인격과 가르침, 기적을 생생하게 전달할
열두 제자나 일흔두 제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누군가 그 역사를 집필하고 후대에 전해야 했지요.
복음사가 루카와 마르코는 사도들 곁에 머물며
훌륭히 이 사명을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제자들이 대대로 선포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남겨 준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티모 4,17)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복음사가 루카와 마르코가
바오로 곁에서 어떤 마음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성령께 의지해 각자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복음서 집필로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서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접하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살도록 초대한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넘치지 않는 이 축복의 인사를
자기 자신과 이웃과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와 스치는 그 누구에게라도 평화가 흘러가길 바라면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둘 사이에 주님 현존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해 주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 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루카 복음서를 좋아합니다.
2장의 ‘마리아의 노래와 즈카르야의 노래’는
성무일도에 수록될 정도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4장의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포’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지금 굶주린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19장의 ‘자캐오’이야기는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임을 알려줍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이야기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곳이 구원의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사람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어야 합니다.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묵상한 복음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것은 좋은 복음나누기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고,
이웃의 짐을 함께 들어주는 것도 멋진 복음 선포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복음의 실천입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웃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은
복음이 꽃피는 것입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 드리고, 시간 내서 함께 여행가는 것은
엠마오의 길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가브리엘 복음’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각자는 삶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복음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 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온전히 형성되었을 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의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의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드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 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