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여(郭輿)-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장원정에서 소 타고 가는 노인을 읊음)(소 타고 가는 저 노인)
太平容貌恣騎牛(태평용모자기우) 태평한 모습으로 소를 타고
半濕殘霏過壟頭(반습잔비과롱두) 부연 안개비 속에 언덕길을 넘네
知有水邊家近在(지유수변가근재) 저 냇가 어디쯤 집이 있는가
從他落日傍溪流(종타낙일방계류) 흐르는 냇물 위에 석양이 지네
*위 시는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시 김용택의 한시산책1(김용택 엮음)(화니북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용택님은 “이발소에 앉아 졸다가 문득 거울 위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본 듯합니다.참 아름다운 풍경이지요? 부연 안개비와 함께 소 등에 앉아 느릿느릿 언덕을 넘어 저 냇가 어디쯤 있을 집으로 가는 노인. 그 시골의 평온한 풍경을 시로 읽으니 왠지 이발소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파리똥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그런 그림이 삐딱하게 걸려 있던 이발소 풍경이 이제는 그립습니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곽여[郭與, 1058(문종 12)∼1130(인종 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몽득(夢得)]-고려전기 합문지후, 홍주사, 예부원외랑 등을 역임한 관리.
그는 청렴하고 문장이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곽원의 손자인 곽상(郭尙: 1034∼1106)은 처음에 소리(小吏)였는데 선종의 잠저 때에 빈객이 되었다. 선종 즉위 이후에 감찰어사, 추밀원좌승선, 전중소감 등을 지냈으며, 1103년(숙종 8)에 수사공으로 치사하였다.
곽여는 1058년에 곽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83년(문종 37)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자현(李資玄)과 동방(同榜)이었다. 이자현, 이중약, 김황원, 정지상, 김부철, 홍관, 그리고 승려인 담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김황원, 이중약 등과는 문장과 청담(淸談)으로 벗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신교(神交)’라 칭송하였다.
1083년(문종 37)에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가 홍주사(洪州使)로 나갔다. 이때 고을 바깥의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라 이름 붙이고 공무 중에 여가만 생기면 이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홍주사의 임기를 마치고 예부원외랑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은거하였다.
1113년(예종 8) 3월에 예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왔다. 예종은 궁중의 순복전(純福殿)에 머물게 하고 선생으로 칭호하였다. 오건(烏巾)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항상 예종의 곁에서 조용히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으니 사람들이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즉 궁중 도사(道士)라고 불렀다. 예종은 그가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므로 혹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결국 곽여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청하자 예종은 개성 동쪽의 약두산에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 하였으며, 예종이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하루는 예종이 동산재에 갔다가 곽여가 마침 도성에 가고 없자 벽에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이에 곽여는 예종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화답시를 지었다. 1115년(예종 10) 6월에 곽여는 송으로 사신 가는 왕자지와 문공미를 전송하는 연회를 자신의 별장에서 열고자 예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예종은 주과(酒果)를 내려 주고 내관(內官)에게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연회가 지나치게 성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1116년 4월에 서경으로 순행하였을 때 예종은 곽여를 불러 상안전 뒤 화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친히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시를 짓게 하고 예종도 화답하였다. 또 여러 종친과 곽여를 불러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짓고 곽여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곽여와 예종은 군신 관계 이상의 친밀한 사이로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에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이 나오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 발문에서, “예종은 곽여와 같은 사인(詞人)·일사(逸士)와 함께 시부(詩賦)를 지었는데 세간에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니 실로 태평성대의 일이다. 지금 『예종창화집』이란 것이 세상에 유포된 지 오래인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가 비로소 어떤 사람의 집에서 얻어 읽어보니 당시 군신간의 경사스런 모임을 목격한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탄식하고 한탄하다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흘렀다.”고 감회를 서술하였다.
곽여는 시 뿐만 아니라 경서와 사서, 심지어 도교, 불교, 의약, 음양설에 관한 책까지 섭렵하였으며 한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여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활쏘기, 말 타기, 거문고, 바둑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1130년(인종 8)에 72세로 생을 마감하자 인종은 죽음을 슬퍼하며 근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진정(眞靜)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또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이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應製(응제) : 임금의 명에 의해 시문을 지음.
*野叟(야수) : →野翁(야옹).
*叟(수) : 늙은이 수, 1.늙은이, 2.어른, 3.쌀 씻는 소리
*殘霏(잔비) : 비가 그칠 무렵에 내리는 가랑비.
*殘(잔) : 잔인할 잔/남을 잔, 1.잔인하다, 흉악하다, 2.해치다, 3.멸하다, 없애다
*霏(비) : 눈 펄펄 내릴 비, 1.눈 펄펄 내리다, 2.오다, 3.올라가다, 䬠(고자)
*壟(농) : 밭두둑 롱(농), 1.밭두둑, 밭두렁(밭이랑의 두둑한 부분), 2.밭이랑(밭의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한 곳), 3.언덕
첫댓글 하루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에서
마음이 평안해져 옵니다...
집으로 가는 모습이 우리네 아버님들을 연상케 합니다...
네, 예전이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네요.
예전이 그리워지는 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요?
지기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이번 주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