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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5-6(◎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네. 민족들아, 어서 와 주님을 경배하여라. 오늘 큰 빛이 땅 위에 내린다.
◎ 알렐루야.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겐 어둠이 있다면>
오늘 복음은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빛으로 얘기하면서 빛과 어둠에 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어두운 것은, 빛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와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빛과 어둠의 이치는 사실 간단합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빛의 반대는 없고 빛의 반대말도 없습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 밝음의 반대이고,
어둠이나 밝음은 그저 빛의 상태들일 뿐이며,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라면 밝음은 빛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빛이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빛이 이 세상에 왔는데도 나만 빛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은 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하기에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모두 빛을 비추시고,
빛에서 오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모두를 비추는 참빛이신데,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 빛을 선으로 깨닫고 사랑하고 받아들여 어둠이 없지만,
악한 사람은 그 빛을 악으로 깨닫고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빛이 없습니다.
그러니 빛을 선으로 깨닫는 선한 사람과 같은 빛을 악으로 깨닫는 악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탈렌트의 비유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주지도 않고 거둬들이는 모진 분으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한 탈렌트가 선도 은총도 아니고 한 탈렌트 주신 것이 사랑도 아니었으며, 그러니 한 탈렌트 주신 분은 모진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지 않는 빛은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빛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일지라도 참빛이 아니고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편애하여 빛을 주는 사람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을 빛으로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참빛에 대한 오해가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몇 번 믿었다가 배신당한 사람이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빛으로 희망을 걸었던 인간들에게서 실망을 여러 차례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참빛이 왔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믿지 못할 놈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참빛이 아닙니다.
빛이, 빛이 아니라고 믿는 데는 방법이 없습니다.
선이, 선이 아니라고 믿는 데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믿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확신까지 하면 더더욱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요한처럼 빛과 선과 사랑을 증언해도 그는 어둡습니다.
- 작은형제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탄절>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로 시작해서(창세 3,23),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입니다(묵시 22,3).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창세 3,17), 묵시록 22장을 보면,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묵시 22,3).
이것은 ‘죄’로 시작해서 ‘해방’으로 끝나는 구원 사업의 처음과 끝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증언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요약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한처음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의 영원함을, 즉 창조 이전의 영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첫 등장을 나타내는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인데(창세 1,3),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과 ‘하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한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즉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에게로 오신 날”이고, 종말과 재림의 날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죄’ 라는 것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7)
예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죄가 생기기 전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 7,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 때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메시아 강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련과 수행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라고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을 감사드리는 날이고, ‘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뒤를 더욱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
흡사 오늘 주님 성탄의 기쁨을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 말씀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구원자 탄생을 갈망하는 영적 예루살렘이요 주님의 사제인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입니다.
오늘은 참 기쁜 날,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새벽 눈뜨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온 흰눈 가득 덮인 풍경이었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온 온누리 모든 분들과 피조물들에게 드리는 인사말입니다.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어제에 이어 오늘 성탄대축일 낮미사 화답송 후렴도 참 흥겹습니다.
“땅 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어제처럼 오늘 하루도 이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지내려 합니다.
어제의 화답송 후렴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였습니다.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기에 오래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 임종시에도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아쉬움일거란 어제의 고백을 다시 확인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어제 대림 제4주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 강론 말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대로 주님 성탄 대축일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 마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열라, 모두에게 친절을 보여라!”
어제는 난생 처음 잠들었다가 수도형제가 깨주어 밤미사에 가까스로 참석할 수 있었으니 수도생활 41년째 초유의 체험입니다.
평생 벨소리 없이 일어났는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늘 밤 12시쯤 일어나 눈붙이지 않고 하루를 지내다가 저녁에 잠들면 밤 12시후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된 까닭에 10:30분 밤미사 전에 못 일어난 것 같습니다.
미사중에도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써왔던 산더미처럼 쌓인 강론이 순간 짚더미처럼 참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제 그만 멈출까하는 유혹도 잠시 들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천상 체험 후 자기가 쓴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 같다는 자괴감에 그 이후로는 글쓰기를 중단했다는 일화도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강론 쓰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자 살아 있음의 표현이요, 사랑 나눔의 기회이니까요.
오늘 역시 일기쓰듯 전개되는 강론입니다.
어제 밤미사시 제2독서 성 레오 대 교황의 강론 노래후 응송이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참된 평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은 어디서나 꿀을 흘러내리게 하는도다.
오늘은 세상 구원의 날이 되어
옛적부터 마련된 영원한 행복의 날이 빛나는도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런지요!
어제 저녁식사를 앞둔 수도원 식탁 분위기가 흡사 잔치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치날이 사라진 작금의 시대, 성탄 대축일 잔치날이야 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이런 하느님께 25년전 성탄절에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시를 오늘 헌시(獻詩)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차례 인용했습니다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언뜻 "난 하느님께 가스라이팅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흰눈 덮인 온누리가 ‘화이트 사일런스(white silence), 하얀 침묵중에 주님 탄생을 축하합니다.
어제 가난한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체험한 루카복음 내용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below)”을 뜻한다면, 오늘 요한복음의 주님 탄생에 대한 진리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above)”을 뜻합니다.
오늘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요약하는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히브리서 서간 말씀 역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존엄한 품위의 참나-참사람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아니곤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첫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생명을 찾는, 빛을 찾는 인간들에게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답입니다.
충만한 생명, 환한 빛속의 삶의 길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다음 요한복음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참생명, 참빛이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참빛이요,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의 사랑이 되게 하는 참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참생명이자 참빛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명실공히 우리를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우리의 신원, 하느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입니다.
요한 사도의 기쁨에 넘친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새삼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 선물이 바로 오늘 우리 마음의 구유에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을, 빛을, 길을, 진리를, 은총을 잃어 존엄한 품위를 잃고 방황이요 전락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은총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날로 일치를 굳건히 할 때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진선미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답은 하나,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 뿐입니다.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이런 주님을 닮아감으로 날로 생명과 빛,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존재 이유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문득 떠오르는 부활의 봄과 더불어 생각난 “민들레꽃”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볓처럼 살 수 있겠네”
아기 예수님 탄생으로 하늘은 땅이 되었고, 주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고등학생 때 즐겨듣던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 이 한 곡만 담아서 일주일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명곡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이 노래의 기타 전주가 너무 멋져서 잘 치지 못하는 기타 실력이지만 계속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요?
지금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젊음과 열정을 나이가 찬 지금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그토록 좋아했던 물건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애지중지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기 몸만 보더라도 유한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히 필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인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가진 이 세상에 영원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단 한 번 함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고 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의 사랑이 아닌, 무한한 사랑을 담아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한숨짓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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