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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다 구
충청도 어느 시골에 위치한 초등학교 총동창회 창립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골이라 하면 우리 나라 어느 곳을 가나 대부분 몇 몇 성씨의 문중사람들이 살고있는 씨족사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고장도 그러한 씨족사회중의 하나이다. 이 학교는 개교이래 7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하니, 과연 유서 깊은 고장에 위치한 학교답게 동창회 인맥도 만만치 않은 곳임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유교적인 덕목과 양반사회의 전통이 뿌리깊이 남아있어 같은 학년의 동기동창이라 할지라도 촌수가 높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깎듯이 대접을 받는 그런 곳이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조합장 등등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선거로 선출하는 일에 있어서는 같은 학교 출신의 두 세 문중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무시로 나타나 곧장 문중대결로 이어지곤 한다.
어쩌면 조선 후기 당파싸움 같은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가오는 총선을 의식한 행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창립식도 예외는 아니어서 총동창회 회장 선출이 이 날 최대의 이슈인 게다.
과연 두 문중의 대결로 분위기가 압축되었고 후보 추천에서부터 열띤 공방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한참 열기가 고조되어 가던 도중 60대 초반쯤 된 듯한 어느 회원이 신상발언을 한다.
쪽 빼어 입은 감색 양복에 얼굴엔 개기름이 번지르르 하고, 포마드를 얼마나 많이 발랐는지 올빽으로 넘긴 머리에서 광채가 번뜩인다. 보기만 해도 기세가 등등한 풍채의 소유자다.
“저는 18회 동기회 총무인데유, 단도직입적으로 한말씀 드릴께유. 지금 이 자리에는 기라성같은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이미 늙은이들이 아니겠시유? 요즈음 같이 세상이 복잡할 때에 늙은이들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시유? 만약 늙은이가 회장이 되었다고 칩시다. 여기저기 다니며 동창회 재정확충을 해야하고 이 행사 저 행사 주관을 해야하는 등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을 터인디 그거 다 소화해 낼 수가 있겠시유? 못해유 못해! 그렇기 때문에 혈기 왕성한 젊은 사람을 회장으로 뽑아 다방면으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끔 해야된다는 게 제 생각이구만유. 그래서인디 늙은 선배님들한테는 쬐금 죄송한 말씀이겠지만 말이유, 14회까지의 늙은이들은 선배 차원에서의 자문 역할만 해주시면 되겄구유, 15회 이후의 동문 중에서 학식과 덕망과 경제력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 회장으로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이 되네유. 그러한 선에서 오늘 회의가 매듭지어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램이자 우리 동기들의 바램이구만유.”
좀 귀에 거슬리는 듯 하였지만 상당히 일리도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이 되었는데... 이토록 ‘늙은이’ 운운하며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동안 앞쪽에 앉아있던 기라성같은 늙은 동문들 쪽에선 여기저기서 상당히 불쾌해진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70대 초반의 한 선배 회원이 신상발언을 요청한다. 풍채 또한 앞의 후배 못지 않다.
“저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8회 졸업생이구만유. 시방 후배님의 발언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야서 한 말씀 드리겠시유. 아니 이런 시골에서 세상이 얼마나 복잡해졌다고 늙은이, 늙은이 하면서 대 선배들을 깔아뭉개고 오늘 이 좋은 분위기를 죄다 망치려 드는지 당체 모르겠네유? 우리가 이 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먼저 선생님한테 배운 게 뭔지 여러분들 아시겠시유? 바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것이었시유. 부모님께 ‘효도’ 하라는 말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들으며 살아왔다는 말잉게유. 내가 늙은이라서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예의범절도 모르고 대 선배들을 모셔다 놓고 늙은이, 늙은이 하면서... 이런 잘못된 젊은이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 아니겠시유? 제가 틀린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보셔유. 저는 좀 전의 후배님이 발언한 내용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야 쓰겄네유.”
연륜이 깊은 대 선배의 말씀이 과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두 수긍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머쓱해진 후배는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던가? 조상님들께서 덕목으로 삼아온 유교적 전통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충청도 양반 사회가 아니던가?
사실 그 발언들의 이면에는 이러한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후배는 자기 또래 중에 있는 문중 사람을 회장으로 밀고 있었고, 선배는 본인 자신이 회장을 해 보겠노라고 창립식 이전부터 은근슬쩍 소문을 내고 다니던 터이라 두 문중의 충돌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후배는 회장을 하겠다는 선배를 늙은이로 몰아 부치면서 기득권을 따 내려고 그러한 발언을 하였던 것이고, 그 발언에 위기감을 느낀 선배는 되받아 치는 발언을 통하여 전화위복을 노렸던 것이다.
14회 이전 선배들은 자칫 늙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당할 뻔하였지만, 과연 뿌리깊은 양반 사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고장의 학교 출신들답게 문중싸움보다는 효도사상에 입각한 선택을 하여 8회 출신 늙은이(?) 선배를 초대 총동창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동문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기왕지사 이 늙은이를 회장으로 뽑아 주셨으니께 이 한 몸 아끼지 않고 우리 동창회와 학교 발전을 위하여 분골쇄신 할 것을 약속 드리겄어유. 저는 나이로는 늙은이지만 체력과 머리는 아직도 50대 정도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만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젊은 오빠라고 부르긴 하더구만유. 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하고 여지껏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이 일 저 일 하며 자식들의 농사일도 가끔 도와주고 있시유. 아직도 체력과 머리와 경험이 팔팔하게 살아있는데 이러한 경험을 어디다가 좀 써먹어야 하질 않겠시유? 그저 늙은이들이라고 해서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직장에서 소외당하고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이제는 오늘 이러한 동창회자리에까지 와서도 소외를 당해야 합니까?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구만유...”
당선소감을 하는 동안 맨 뒷줄 의자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29회 동문 두 어 사람이 넋두리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50줄에 접어든 나도 얼마 전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해서 할 일이 없던 차, 총동창회 창립을 한다고 해서 뭐 할 일이 없나 하고 참석은 했는디... 늙은 선배님들 한번 보란 말여, 우리보다 더 쌩쌩 하잖여? 우리가 여기 집행부에 끼어 들려면 앞으로 20년은 더 가야 할 걸로 보이네 그랴? 오늘 한 200명이 왔다는디 우리 젊은이들은 사람 축에도 못드네 그랴. 어디 근처에나 가겄냐?”
“맞는 말씀이네 그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 난 겨!”
하면서 몹시 심드렁한 표정들이다.
대한민국 국회 못지 않게 시끌벅적한 이 총동창회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늙은이들의 세상’ 이다. 60대 초반이 70대 초반을 늙은이로 매도하자 70대 초반은 60대 초반을 예의범절 모르는 젊은이로 몰아세우는 세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 어떻게든 한번 끼어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왔던 50대 초입의 동문들은 감히 그 축에 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aging society)가 되어가고 있는 데에 반하여 노인관련법이나 노인정책들은 그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작 관련법이나 정책들이 절실히 필요한 수요자들은 노인 당사자들이어야 할진대, 현실은 그게 아니다. ‘실버산업’이라는 마켓팅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제3자들이 혜택을 가로채는 실수요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복지사업과 의료사업이라는 명분좋은 법과 제도권 안에서 노인복지사업을 하는 제3의 사람이나 단체들을 말하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양노원, 노인요양원 등 여러 단계의 노인수용시설과 노인종합복지관 같은 노인이용시설 그리고 실버타운이나 실버아파트 같은 주거시설 또한 노인전문병원 한방병원 등의 노인전문의료사업과 여기서 파생되는 너싱홈(간호병동), 호스피스(임종환자 돌보기), 에이징헬퍼(간병인) 등 그리고 노인전문약품 및 보장구 제조업 등등 다양한 종류의 노인관련산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실버산업에 깔려 있는 돈이 43조원 정도 된다하니 과연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산업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듯하다. 이렇게 수요자가 광범위하다보니 정부 담당부처의 몇몇 공무원이 이 많은 분야와 관련한 정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수요에 비해 예산이 턱없이 낮은 탓도 있다. 의료보험이 노인진료비로 지출해야할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포괄적인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세원 발굴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정부 예산을 들이지 않고 노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보이질 않는다. 바로 우리가 안고 있는 노인문제의 현실이다. 정부뿐 만 아니라 노인을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도 적잖은 예산이 들어가는 게 현실 아니던가?
자! 그러면 우리는 이 고령화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일단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뒤집어엎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우리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 말을 다시 새겨보자면, 해가 서쪽에서 뜨면 세상도 뒤집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 또한 존재한다고 하는 명제 아래 우리 인간의 흐름도 한번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해가 가는 방향이 바뀔 뿐 밤과 낮은 바뀌지 않는다. 고로 인간도 이 세상에 죽음으로부터 태어나 어린애로 사라져 가는 역순이 될 것이라는 가정을 한번 해보자.生老病死가 死病老生으로 뒤집어지는 현상을 말이다.
죽음으로부터 잉태하여 묘지를 뚫고 이 세상에 나와 죽음의 큰 숨을 내뱉는 순간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시작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들어 젊은 어른들이 갖은 탕약으로 간병을 하니 기운이 점점 돋고, 이윽고 주름살이 펴지는가 싶더니 흰머리가 까맣게 변해가고, 곧 이어 바람끼가 드나 싶더니 늙은 노인들끼리 살림을 내어 하나의 가정이 만들어지고, 간병하던 젊은 어른들은 점점 왜소해져 어린아이가 되더니 어느 날 배꼽에 탯줄을 붙들어 매고 어느 여인의 자궁 속으로 사라져 가더라는 것이다. 삶이 아닌 죽음을 잉태한 여인은 점점 그 고통이 작아지더니 열 달이 되어 그 흔적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해가 서쪽에서 뜰 때 인간의.死病老生인 것이다
이쯤 되면 노인문제는 존재할 가치도 없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우대를 받고 있는 것만큼 늙은이가 혜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작금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관념에서 부모와 자기 자식간의 계급관계를 설정한다면 자기 자식은 장교급이요 부모는 논산훈련소 훈련병이다.
실제로 먹고 자고 입는 모든 대우에 있어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어떤 가정에서는 부당 대우를 자식에게 항의하다 지친 나머지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리는 경우도 있다.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지금 세상의 기성세대가 자식들에게 쏟아 붓는 정성이 부모님에게 쏟아 붓는 정성과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을... 하지만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이 늙은이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라 하는 것은, 지금 자식에게 쏟고 있는 정성만큼 부모한테도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아무리 천지가 개벽을 하는 세상이 올지라도 지금의 세상에서는 노인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명제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설명하였지만, 사실 광범위한 노인문제의 포괄적인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에는 좀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서 문제를 한번 뒤집어 놓고 살펴 볼 일이다.
첫댓글 어느 강원매거진인가요?
http://www.signpeople.co.kr/html/index.php 강원도 춘천에서 발행되고 서울지하철구내 가판대가시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