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柳夢寅)-숙도조(熟刀鳥)(쏙독새)
熟刀鳥(숙도조) 쏙독새
聲篤篤(성독독) 우는 소리 독독독독
旣無刀更無机(기무도갱무궤) 칼도 없고 도마도 없이
終日篤篤割蘿蔔(종일독독할라복) 종일 독독독독 무우를 자르네
僧房有客來索飯(승방유객래삭반) 절 손님 공양 짓느라 그러는가
刀机相薄聲相續(도궤상박성상속) 도마에 칼 소리 그치질 않네
山中鳥巧能學(산중조교능학) 산속의 새가 어찌 칼질을 배워
是以鳴篤篤(시이명독독) 독독독독 그렇게 울어대는지
*위 시는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시 김용택의 한시산책1(김용택 엮음)(화니북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용택님은 “쏙독새 울음소리는 소쩍새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소쩍새 소리만큼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새소리도 없습니다. 이른 봄 깊은 산 속에서, 피를 토하고 다시 그 피를 삼키며 운다는 이 새소리는 사람들의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들립니다. 가난한 농부들은 솥텅 솥텅 솥텅텅이라고 들었고, 김소월은 죽은 누님이 동생들을 못 잊어 마을 가까이에 와 운다고 했습니다. 시름과 설움 많은 이 땅에서, 소쩍새 울음소리에 잠 못 들고 홀로 일어나 괴로운 삶을 생각하며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꽃이 피는 봄밤 달이라도 뜨면, 달빛 속을 건너오는 먼 산 소쩍새 소리가 정말 사람을 잡습니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유몽인[柳夢寅, 1559년(명종 14) ~ 1623년(인조 1),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조선시대 한성부좌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문학가. 유의(柳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유충관(柳忠寬)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 유탱(柳樘)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의(閔禕)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했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나,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 중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 임란 당시 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왕이 불러 남원부사로 나갔다.
그 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泂)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이 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유몽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蘿蔔(나복) : 무. 십자화과의 채소(菜蔬). 蘿쑥나(라), 蔔무복
첫댓글 태진아씨가 노래한 사모곡에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님이란
구절이 생각나네요....밤에 듣는 새소리는 마음을 녹이는 슬픔이 서려 있나 봅니다.....
네, 사모곡 생각납니다,
아마도 몰아일체, 자연합일의 경지가 되면 시인과 같은
시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기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