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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Lmmwd9R9Nv0?si=nRWmT126Q1ro1aTD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타락 3:1~4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교훈을 받으라는 권고를 무시함 3:5~8
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6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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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하나님 명령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으며 그분을 의뢰하지도 않은 패역한 성읍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불의한 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면 거처만은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이를 듣지 않았기에 온 땅이 소멸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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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타락 3:1~4
지도자의 중요한 책무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스바냐는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언급하면서 지도자들의 불의를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3~4절). 행정과 외교를 담당한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같이 탐욕에 집착했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할 책무를 맡은 재판장들은 ‘저녁 이리’같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해야 할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이 되어 귀를 즐겁게 하는 평안의 메시지만 증언했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위임받은 권력의 오용과 남용은 큰 악입니다. 성도는 지도자들이 공의와 겸손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불의는 어떠했나요?
하나님이 세워 주신 지도자들을 위해 나와 공동체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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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을 받으라는 권고를 무시함 3:5~8
의로우신 하나님은 아침마다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불의한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7절)라는 그분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죄에서 돌이키면, 형벌을 작정하셨더라도 그들의 거처를 없애지는 않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뜻은 멸망이 아닌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새벽같이 일어나 불의를 일삼았고(7절), 이에 하나님은 열방의 군대를 소집해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는 날을 기다리라고 선언하십니다(8절). 열방의 군대는 바벨론 연합군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회개의 거절은 두려운 심판을 재촉하고, 하나님 질투의 불은 모든 것을 소멸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이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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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라시는 회개
일명 ‘노예 성경’이 1808년 영국에서 발간되었습니다. 그 성경에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 은혜로 해방되는 출애굽기 1~18장이 없습니다. 흑인 노예들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내용을 백인 지배층이 삭제하고 편집해 ‘숭숭 구멍 뚫린 성경’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성경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죄와 심판에 관한 내용은 건너뛰고 청중이 좋아하는 축복 메시지만 전하는 목회자,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서 믿는 성도가 얼마나 많은지요. 교회가 본질을 놓치면 결국 경건의 능력을 잃고 부패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가감 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또 말씀에서 어긋난 행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 앞 상점의 사장이 손님에게 말했습니다. “저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의 설교가 아주 좋아요.” “설교를 들어 보셨나요?” “아니요.” “그럼, 목사님의 설교가 좋은지 어떻게 아시나요?”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신 후로 저 교회 성도들이 외상값을 잘 갚고, 교통 신호를 잘 지키더라고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다면, 돌이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일그러진 모습을 고쳐 나가야 합니다. 죄로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고,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며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태도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회개입니다.
한국 교회 7가지 죄 / 한기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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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스바냐 3장 8절
하나님은 온 세상에 심판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블레셋, 모압, 암몬, 앗수르 등은 망하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 간에 행한 일을 판결 받습니다(고후 5:10). 당장 심판받지 않는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벌할 날을 준비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삶을 점검할 때 심판의 날이 기쁨의 날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샬롬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와 허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 마이크 플린
오늘의 기도
하나님, 심판당하는 현장을 보면서도 제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뎌진 마음을 회개합니다. 죄인 됨을 부정하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제 인생을 세우게 하소서. 하나님 말씀을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고 영생을 주는 생명의 교훈으로 받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64 정결하게 하는 샘이)
성경 이해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반역하는”, “더러운”, “억압을 일삼는” 그래서 “망하고야 말” 도성이라 부릅니다(1절).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이렇게 몰락한 원인은 지도자들의 타락에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힘 없는 백성들을 먹어 치우는 ‘사자’와 ‘이리떼’들이고(3절), 이들을 견제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용 종교인’들이었습니다(4절). 그들은 매일 아침 의로운 하나님을 만났지만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5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슬퍼하시고, 끊임없이 그들을 돌이키려고 노력하셨습니다(2, 5~7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악을 행합니다(6, 7절). 결국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과 함께 ‘피고’로 소환되어 심판을 선고 받습니다(8절).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더 순종하고, 주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의 말씀에 더욱 더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늘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내 행동을 살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행동하고, 실천해 나가도록 하자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어 주님께 작은 기쁨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오늘 본문은 크게 네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은,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의 범죄로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잰 결과로 나타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 분의 성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해 주는 말씀으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질투의 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 ‘그 성의 관료들은 사나운 사자들 같고, 재판관들은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저녁 무렵의 이리들 같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방백들’은 정의를 실천해야 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귀족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공의롭게 인도해야 하는데 마치 먹이를 찾아 포효하는 사자처럼 그들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혈안이 된 것입니다.
재판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은 재판장들이 갖고 있던 탐욕과 약탈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즉, 아사 직전의 짐승이 먹이를 남기지 않고 싹쓸이하는 것처럼, 불의한 재물을 얻기 위하여 재판을 서슴지 않고 불공정하게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 ‘예언자들은 분별력이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들로, 그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어겼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경솔하다’는 ‘신중치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악하고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말입니다. 또 ‘간사함’은 신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감 없이 그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당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르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거짓 예언을 일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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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나를 경외하고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징계한다 해도 너희들이 있는 곳을 멸하지는 않을 것이라’라는 말입니다. 곧 심판 중에도 죽이지 않고 살린다는 것으로, 원래는 모두 멸절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결정하시면 변치 않으신 분이 자신의 성품까지 져버리면서 그분의 교훈을 받으면 면죄부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부지런히 그들의 행위를 더럽힙니다. 하나님은 살리려고 그분의 자존심도 버린 채 면죄부를 주셨건만, 유다는 그것을 받기는커녕 새벽같이 일어나 타락을 일삼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어떤 경로든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징계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에서 갖게 되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포나 무서움이 아니고,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대했을 때 갖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또한, 자신의 더러움을 회개하며 그분의 거룩을 쫓습니다.
11월28일 청라호수공원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야지 우리 영광을 세상에서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어떤 사람은 자서전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랑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또한, 우리는 경외 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부를 때도 있지요. 친밀감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분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 이름조차 부르기 두려워 대신 ‘주님’이라는 말만 쓰고 발음했을 뿐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체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높이는 책이 아닙니다. 영적인 능력을 끌어내는 책도 아닙니다. 오르지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 있는 책으로, 그분의 말씀과 교훈이 있는 책입니다.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매일 묵상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생생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을 쫓는다 해도 실수할 수도 있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심판 중에도 자비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방법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이 분노에 찬 이방의 군대들에게 에어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21:20)
이것은 그들이 늘 하던 말대로 이스라엘을 땅 위에서 지워버리려고 승리를 위해 모인 것이지만, 실상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한꺼번에 불로 멸하시려고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습3:8)
그들이 이렇게 소멸되는 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습3:7)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스스로 더럽혔습니다 첫째는 헤롯의 누룩으로 정치를 더럽혔습니다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습3:3)
둘째는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종교를 더럽혔습니다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습3:4)
그래서 종교적으로는 패역 곧 배도하여 더러워졌고, 정치적으로는 포학을 일삼아 망하게 된 것입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습3:1)
그러므로 우리는 헤룻의 누룩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8:15)
그래서 이 더러움과 포학함을 피하도록 항상 깨어 있기 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그래서 우리 주님 일하실 때 부끄럽지 않기를 원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5절)’
몸의 병이 생겼다는 것은 과거 건강했었다는 것과 회복될 치료가 필요하다는 두 가지의 사실을 동시에 정의 내립니다. 영적으로 우울하거나 분노에 빠졌다는 것 역시 평강 가운데 거하길 원하고 그것을 위해 다시 새힘을 공급받아야만 하는 상황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이방 도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도덕과 윤리, 하나님의 통치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겸손과 순종을 체험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성, 곧 교만과 불순종, 불경건의 문제를 돌이키지 않아 결국 스스로 더럽혀지고 회복될 그분의 손길을 구하지 않음으로 결국 스바냐의 입술을 통해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그 교훈을 따르며, 그분께 의뢰하고 그 앞에 나아갔다면(2절) 그들은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금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돌이키지 않음으로 더 악한 이방 족속들의 칼날에 결국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성전조차 훼파되고 사랑했던 성읍이 폐허가 되도록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의 권능 앞에 엎드려 무엇을 구하고 어떠한 결단으로 나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 모든 재앙을 감당하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 행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5절 예루살렘의 불의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의’를 강조합니다. 이튿날 동이 틀 때까지 밤새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지도자들과 달리 매일매일 공의를 행하십니다. 부정하고 불의한 그곳에 계속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예루살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이름으로 심판하지만 끝내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공의로움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절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영적으로 부정하며, 사회적으로 폭력을 일삼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삶으로는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하나님 없는’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노에 찬 저주이자 슬픔 가득한 애곡입니다. ‘화 있을진저!’ 내가 사는 도시와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3,4절 예루살렘에서 특권을 누리는 지도자들의 죄를 기소합니다. 국민을 섬겨야 할 관원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공정한 판단으로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재판장들이 불법을 자행하고, 예언자들도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이익과 영달을 위해 달콤한 말로 아첨합니다. 제사를 주관하고 율법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이 제사를 그르치고 율법을 어기는 데 앞장섭니다. 이 시대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또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지도자들이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자신들이 깨닫고 전하는 메시지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6~8절 유다는 다른 나라는 다 망해도 자신은 망하지 않는다는 헛된 자만심에 빠져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고도, 경고도 하셨는데 그들은 악을 버리지 않습니다.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존재도 무시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던 열방을 소집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러니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지 말고 말씀을 통해 내 죄를 보셨거든 고질적인 죄와 고집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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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3장. 하나님을 아는 것이 소망이다.
1. 예루살렘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 되어버렸습니다(1). 이런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선포됩니다(1~7). 예루살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하나님께 대한 태도일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의 심령 안에서 힘을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2. 선지자 스바냐는 지도자들을 책망하는데, 먼저 정치 지도자들인 방백과 재판관들을 책망합니다(3). 이들은 사자와 이리처럼 포학하고 잔혹하게 백성들을 삼켰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도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진리를 선포해야 할 선지자들은, 경솔하고(거만함을 포함) 거짓이 많아서,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성소를 지켜야 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는데 앞장섰습니다(4).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5). 하나님은 열국을 심판함으로써 유다가 배우기를 바라셨지만, 그 어마어마한 역사 가운데서 유다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6~7).
3. 패역한 유다 땅의 신실한 성도들은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심판의 날까지 ‘나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8).
오늘의 말씀요약
여호와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지 않고 그분을 의뢰하지도 않은 패역한 성읍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불의한 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면 형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듣지 않았기에 온 땅이 소멸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예루살렘의 죄와 부패함(3:1~4)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따라 행하게 되고 그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듭 불순종함으로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할 지도자들이 공의를 저버리고
약자를 착취하며 자기 이익을 도모해 위선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 교훈을 무거운 짐으로 여긴 것입니다.
지도자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공동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즐겁게 듣고,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저버리면 결국 어떻게 되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나요? 잘 순종하지 못하는 말씀에는 무엇이 있나요?
기회를 저버리는 예루살렘(3:5~8)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듯,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는 변함없이 날마다 펼쳐집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마음이 굳고 무감각해서 불의를 행하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멸망 길로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생명 길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방을 반면교사로 삼아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라고 권고하십니다.
비록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깨우쳐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살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악을 행했고, 심판받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긍휼의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십시오.
- 묵상 질문: 하나님이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데도 이스라엘은 어떻게 행했나요?
- 적용 질문: 사랑의 하나님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을 늘 의식하나요?
긍휼이 풍성하신 공의의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할 죄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징계와 심판 뒤에 있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주소서.
지금이라도 돌이키라고 강권하시는 주님께 회개하며 나아감으로,
이 세상을 향한 은총의 통로로 쓰임받길 간절히 원합니다.
스바냐3:1~13 입술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교만에 빠져있는 유다 뿐만이 아니라
주변 동서남북에 있는 모암과 암몬, 블레셋, 구스와 앗수르에
대하여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했다
다시 한번 더 심판의 결론 부분으로 유다의 핵심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라 불리는 예루살렘성의 범죄와 심판 대하여도
그분의 공의에 따라 심판하시겠다는 선포를 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의 모습이
1. 패역하고 더러운 곳(1)
2. 포악한 성읍이 되어버렸다. (1)
뿐만아니라 저들의 영적인 태도는
1.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2),
2.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2)
3.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2),
4. 하나님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2)
하나님이 나를 거룩한 성도로 이미 20여년 전에 불러 주셨는데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 예루살렘 성의 이런 모습이 아니였으면 좋겠다.
날마다 주의 음성을 들으며, 주의 교훈을 받으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예루살렘성이 이렇게 된 것에 책임 있는 자들이 있다.
1, 방백(고위 공직자)들이다. (3)
권력을 이용해 백성을 무자비하게 학대한다.
2. 재판장들이다. (3)
뇌물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자들이다.
3. 선지자(예언자)들이다. (4)
분별력이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4. 제사장들이다.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다.
타락으로 인도한 책임은 성의 관료들, 재판관들, 예언자들, 제사장들로
백성들의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가장의로 가정의 책임을
순장, 사역자, 안수집사로서의 교회적 책임을
회사의 관리자로서 회사의 책임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세상의 책임을
주님이 나에게 물으실 텐데....
그러나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신다.(5)
하나님은 주변 국가와 이스라엘에도 경고 하셨지만
유다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7)하신다.
그리하면 형벌을 내리기로 이미 결정을 하였을찌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건만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다(7)
<예루살렘의 심판>
스바냐 3:1-8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있을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예루살렘의 죄
오늘 본문은 아주 강렬한 책망으로 시작합니다. "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1절) '패역'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는 악이고, '더럽다'는 것은 그들 자신을 더럽히는 자신을 향한 악이며, '포학한' 모습은 이웃을 향하여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3절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악한 모습을 듣고 있다 보면 '아니 도대체 어떤 성읍이 이렇게 악한 것일까'라고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이 성읍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4절) 선지자, 제사장, 성소 등을 보니 이 성읍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생각한다면 교회가 이런 악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총체적 악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 전체가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향하여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무엇인가를 소유하는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3절) 하나님으로부터 방백으로 재판장으로 위임받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힘을 가지고 자신들의 뱃속만 채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들을 사자나 이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먹잇감을 노리는 모습입니다. 오직 다른 이들을 희생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정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들도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소유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4절) 선지자들이 '경솔'하다는 것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을 분출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간사한'은 '믿을 수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마치 오늘날 목회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어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연구하지 않고(훈련되어 있지도 않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을 선지자의 일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평생 말씀을 전하는데 평생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만 전합니다. 그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선지자를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생각으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습니다. 때로는 목회자가 교회를 가장 많이 더럽히는 경우를 봅니다. 그 죄가 어찌 작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 당시의 예루살렘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낫지는 않을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2.기다리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각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7절) 그들은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악한 것의 맛을 알았습니다. 재물의 맛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약에 빠진 사람이 그것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힘든 것처럼 세상의 재물을 탐닉하던 이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오히려 더욱더 악을 행하기에만 급급합니다. 도무지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심지어 교회까지 악을 행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여전히 선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5절) 신앙인은 바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악한 행위에 실망하되 절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가운데 선을 행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살맛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마음을 다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날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8절) 단지 '기다려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사람에게는 절망이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입니다. 그 날이 되야 악한 사람들의 악이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남은 자는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공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우리는 더욱더 여호와를 의뢰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때로 교회가 그렇게 악한 길을 가기도 하고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향한 욕심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더렵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웃을 향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고 가까이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욕심내십시오. 세상을 향하여 절규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갈망으로 절규하십시오. 교회는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연약함과 죄성을 늘 인정하지 못하고
경계하는 것에 넘어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우리의 안에서 그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이
샘솟는 삶을 살아가도록 그 전능자의 그늘 아래
항상 거하는 겸손과 순종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을
땀 흘려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 땅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의 그토록
보기 원하시는 부흥의 역사를 다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