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바람이 찾아온 날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으로 걸어가고 싶다.
가을에 이별하기 좋은 숲.
어쩌면 이별해서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살아가게 할지도 모를 숲.
이별을 추억하게 하는 숲.
그래서 홀로 걸을 때 마침내 아름다운 숲.
비로소 속삭이며 다가오는 숲.
그곳으로 가서 소꼽친구처럼 속삭이던 자작나무를 불러놓고
그동안 잘 살았는지, 안부를 묻듯 등을 쓰다듬고 싶다.
바람에 제 숨어있던 사랑스러움을 흔연히 내놓던 순결한 떨림.
붉게 불타는 단풍을 소박한 산의 일로 만들던 하얀 고립의 우아함.
그 외로움에 대해 등을 쓸어주고 싶은 것이다.
홀로 선택한 외로움이든, 외로움이 깊어 고독이 되었든,
그건 의연한 것이므로...
'속삭이는 자작나무'
그 숲으로 들면 사랑은 이렇게 감싸안는 것이라고
나무들은 서로를 껴안고 있다.
홀로인듯 곁에 있는 사람들처럼...서로를 지키고 있다.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의 몸을 나누어 사잇길을 만들고
길은 모두가 저절로 걸어나온 하얀 직립의 다리로 그렇게 서 있다.
사잇길을 걷는 이들은 연인이거나 자작나무다.
가끔 연인도 자작나무가 되는 그곳.
속삭임은 끝이 없겠다.
강원도 인제군 산 깊은 곳에 자작나무는 온 하늘을 이고 있었지.
하늘을 만질듯이 손길 아득히 바람을 올려 보내던 나무.
산신령이 나타날 듯이 깊고 깊은 묘령의 골짜기.
그곳의 소문은 여름날로부터 왔었다. 온통 푸른 잎사귀가 하늘을 덮고 있던 여러 장의 사진에서.
녹색의 장원이자 비밀의 화원 같던 그 모습.
그후로 하얗게 서 있는 기다림의 성채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용없는 기다림처럼 언제나 눈에 넣어 놓고 눈 언저리에 머물던 나무.
그 이후 내 눈엔 자작나무가 살았다.
세상이 하얀 겨울 옷으로 갈아입을 때, 자작나무 그곳에 눈이 내리면
나무는 또 겨울의 표정으로 말을 하리라.
무리로 읽혀도 홀로 읽혀도 자작나무는 외로움 따위와 혼돈하지 않으리라.
하얀 겨울아이의 몸으로 온 계절을 사는 나무는 자작자작 모닥불 소리를 내었지.
비비적거리며 흩날리던 가을의 은비늘은 꿈의 조각이었을까.
서있는 것이 시가 되는 나무.
떨림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나무.
안개처럼 흩어지던 나무들이 온 산을 휘돌던 그것은 안개기둥.
바람의 모습으로 서있거나 기다림으로 서성이거나
모든 것이 세상에서 벗어나 숨어사는 은자처럼 꿈을 꾸는 몽환의 나무.
자작나무는 꿈처럼 아득한 나무이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깔에 걸음이 멈추어지던 가을 숲.
자작나무는 저를 돋보이지 않으려 뒷줄에서 군무를 추었다.
오직 아름다운 흩날림 뿐이던 그 숲의 질서.
그곳을 걷는다는 건 숲을 낸다는 것처럼 원시적인 일이라
태초의 바람이 불어오듯 하늘 전체가 일렁이면 잎은 제 길어진 몸 끝에서 자작자작 소리를 내었다.
태울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것이라지만, 바람에 자작자작 소리를 맡기는 나무.
갈채 같기도 하고 빛이 바람을 만났을 때 떨어지는 숨결 같기도 해서 그저 몸 전체가 떨림들이다.
이보다 더 순결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자작나무는 바람소리를 익히다 긴 기다림을 알았을까.
그녀의 꽃말,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을이 가는 날 자작나무를 꺼낸다.
눈 속에 박힌 길을 외길삼아 걸어가는 길,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길.
조금씩 걸어서 오랫동안 생각하고픈 길.
돌아보면 세상은 추억 아닌 것이 없다 말하는 길.
걸어서 걸어서 추억으로 가는 길.
다녀온 후 가을은 강처럼 흘러갔다.
이제야 그 늦은 기억을 꺼내니 오래오래 더 가을스러운 날을 보내는 사람처럼
기억에도 멋이 스민다.
그랬다, 그 나무는 은밀하게 멋스러웠다.
내 가을날을 그렇게 보낸다.
첫댓글 키스야!
어쩜 이렇게 사진을 잘 찍노?
바람의 모습으로 서있거나 기다림으로 서성이거나
모든 것이 세상에서 벗어나 숨어사는 은자처럼 꿈을 꾸는
나무를 보면서 내 속에 있는 가슴 깊이 꼭꼭? 묻어두었던 말
가을이 만들어 내는 허허로움일까 아니면
이슬처럼 영롱한 사랑도 구름 속에 내어비치는 달처럼
가을은 누구나 혼자 걷고 싶은 것처럼 이곳에 가고 싶다 .
감사합니다.
사진은 아무나 잘 찍히게 숲이 그렇게 생겼었지요.
@ㅋi 스 자작나무는 아픔 한 칸씩 늘려가는 나무였구나.
여기가 어딘가요? 궁금해서 묻습니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유명한 자작나무 숲입니다.
출사를 다녀오십시오. 제가 입산을 허락해 드릴게요.^^
시는 요정입니다. 자작나무사이로 걸어가는 그대의 시는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