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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전달자 뵈뵈와 초대교회 여성 리더십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위대한 신학적 금광으로 불리는 로마서, 이 거대하고 장엄한 편지를 품에 안고 로마의 거친 길을 달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현대 성경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한 인물의 이름을 제시합니다. 바로 뵈뵈(Phoebe)입니다(Hendriksen, p.284). 바울은 로마서 16장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그녀를 언급하고 추천합니다. 단순히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의 권위를 대리하는 특사로서 그녀를 로마 교회에 소개한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폴라 구더(Paula Gooder)는 뵈뵈가 로마서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편지가 낭독되는 현장에서 그 깊고 오묘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Gooder, p.341).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토록 중요한 임무를 뵈뵈라는 여성에게 맡겼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초대 교회의 역동적인 구조와 당시 여성 지도자들이 수행했던 놀라운 역할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겐그리아의 지리적 맥락과 뵈뵈의 위상
뵈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활동했던 겐그리아라는 도시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겐그리아는 고린도 동쪽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동방의 물산이 유입되고 서방의 문화가 교차하는 국제적인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뵈뵈는 이 역동적인 항구 도시의 교회를 이끌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녀가 로마까지 그 먼 길을 이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상당한 경제적 자립권과 사회적 신분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당시 여성의 이동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뵈뵈는 국제적인 안목을 지닌 사업가였거나 가문의 자산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던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그녀를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보조적인 의미의 집사를 넘어섭니다. 빌립과 스데반 같은 일곱 집사도 이 명칭으로 불렸으며, 바울 자신도 종종 자신을 복음의 디아코노스라고 하였습니다(롬15:16, 고전4:1). 이는 뵈뵈가 단순히 예배 의전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치고 교회를 행정적으로 책임지며 목회자가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이끌던 실질적인 지도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보호자로서의 권위와 후원 제도
더욱 주목할 단어는 보호자라고 번역된 프로스타티스(prostatis)입니다(롬16:2). 이 용어는 고대 로마의 사회적 규범인 후원 제도(Patronage)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Wright, p.171). 로마 사회에서 후원자는 법적,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예로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뵈뵈를 향해 나의 보호자라고 고백한 것은 그녀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필요한 재정을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 속에서 바울의 법적 울타리가 되어주었음을 의미합니다(Cranfield, p.283).
튀빙겐 대학의 로버트 주잇(Robert Jewett)은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가 실상은 뵈뵈의 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롬16:22). 더디오라는 이름이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지던 셋째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뵈뵈는 자신의 가문에 속한 지식인 노예를 바울의 필경사로 제공할 만큼 강력한 후원자였습니다. 바울은 16장에서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지만, 그들 중 제일 첫번째 자리에 뵈뵈를 둠으로써 그녀가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인 위상을 확증해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여성 지도력의 역사적 증거
뵈뵈의 활약은 당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공동체 곳곳에는 뛰어난 통찰력과 헌신을 갖춘 여성 지도자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순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에베소에서 고린도까지 바울의 동행자가 되었습니다(행18:2, 18). 그들은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으며 이방의 여러 교회에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롬16:3).
골로새서에 등장하는 눔바는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방하여 한 공동체를 책임졌던 지도자였고, 루디아와 유니게, 로이스 같은 이들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복음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특히 로마서 16장 7절에 언급된 유니아는 사도들에게 존경받는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오랫동안 가부장적 해석에 의해 남성형 이름인 유니아스로 번역되기도 했으나, 현대 신약학은 그녀가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도적 직무를 수행한 여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약은 초대 교회가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를 복음의 평등 정신으로 돌파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의 발흥과 여성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저서에서 초기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여성의 역할을 꼽습니다. 4세기 초 북아프리카 시르타르 마을의 구제 물품 목록을 보면 여성용 망토와 신발의 수량이 남성용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의 구성원 중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음을 통계적으로 보여줍니다(Stark, p.153).
당시 로마 사회는 여아 유기가 일상화된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힐라리온이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아들을 낳으면 키우고 딸을 낳으면 버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했습니다(Stark, p.152).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자아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여겨 버리지 않았고, 남성과 동등하게 양육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가정의 여성 비율이 높아졌으며, 로마 상류층 남성들이 정숙하고 교육받은 기독교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심장부인 상류층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갔습니다. 헨리 채드윅의 지적처럼 기독교가 로마의 견고한 성벽을 뚫고 들어간 통로는 바로 여성이었습니다.
첫 번째 해석자로서의 뵈뵈
뵈뵈가 로마서를 들고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역할은 단순히 편지를 건네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은 수신자들 앞에서 그 편지를 직접 소리 내어 읽어주어야 했습니다. 문맹률이 90퍼센트가 넘었던 당시 상황에서 낭독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뵈뵈는 바울의 어조를 흉내 내고,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부분에 강세를 두며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의 정수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울 서신 중 가장 난해하고 논리적인 글입니다. 낭독 도중 교인들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울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뵈뵈뿐이었습니다. 바울이 뵈뵈를 로마에 보내며 자신과 동등하게 영접하라고 권고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학적 대변인임을 공식화한 것입니다. 뵈뵈는 경제적인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서를 최초로 해석하고 설명한 탁월한 신학적 교사였습니다.
신실함이 만들어낸 복음의 길
폴라 구더는 뵈뵈가 바울의 서바나(스페인) 선교를 위한 선발대 역할까지 수행했을 것으로 봅니다(Gooder, pp.390-1). 스페인 선교를 위해서는 현지 방언을 통역할 사람을 찾고 보급로를 확보하는 등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뵈뵈는 바울이 가장 고뇌하며 쓴 로마서라는 보물을 운반한 사람이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던 바울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간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이 뵈뵈에게 이토록 막중한 책임을 맡긴 이유는 단지 그녀의 재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흐르는 진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복음을 향한 뜨거운 영성 때문이었습니다. 뵈뵈는 바울의 권위를 대리하는 특사로서 로마의 가정 교회들을 순회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로마서는 뵈뵈라는 한 여성의 헌신적인 발걸음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뵈뵈를 통해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감당해온 역할의 엄중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녀는 이름도 없이 사라진 보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의 기둥이었고, 바울의 방패였으며, 로마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험난한 선교의 여정 속에서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지붕이 되어주고, 때로는 거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바울의 사역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던 한 여성의 강인하고도 따뜻한 손길은 지금도 로마서의 행간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Cranfield C.E.B.,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국제비평주석, 로마서III), 문전섭 옮김, 도서출판 로고스, 1994
Gooder Paula, Phoebe A Story(이야기 뵈뵈), 진영정, 최현만 옮김, 에클레시아북스, 2021
Hendrikson William, New Testament Commentary : Romans(헨드릭슨 주석 로마서 하), 황영철 옮김, 아가페출판사, 1991
Longenecker N. Richard, The Epistle to the Romans(NIGTC 로마서 하권), 오광만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0
Stark Rodney, The Rise of Christianity(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좋은 씨앗, 2016
Wright Thomas, Paul for Everyone:Romans(part2)(모든 사람을 위한 로마서 2부 9-16장), 신현기 옮김, IVP, 2010
한미라, 여자가 성서를 읽을 때, 대한기독교서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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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모르는 성경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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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변천과 초대교회 신앙
3월 23일
우리는 언제부터 십자가를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만 여기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기독교를 상징하는 가장 흔한 표식인 십자가는,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닌 가장 처참한 사형 틀이자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이 무엇인지 추적해 봅니다.
1. 십자가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었다?
카타콤의 벽화나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오늘날의 교수대나 전기의자와 같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익투스(ΙΧΘΥΣ)라는 물고기 문양 속에 자신들의 신앙을 숨겨 고백했습니다.
2. 조롱의 낙서: 알렉사메노스 그래피티
1857년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십자가 이미지는 놀랍게도 기독교를 비웃기 위한 낙서였습니다. 당나귀 머리를 한 형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그 앞에 한 청년이 서 있는 그림. 그 밑에는 알렉사메노스는 그의 신을 숭배한다라는 비아냥 섞인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저 미련한 바보에 불과했습니다.
3. 콘스탄티누스와 변질된 십자가
312년 밀비안 다리 전투 이후, 십자가는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군기(軍旗)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고난과 희생, 용서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권력과 정복의 상징으로 뒤바뀌는 역사적 변곡점을 짚어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세상은 여전히 영악하고 실리를 챙기는 이들을 지혜롭다 말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꺼이 거룩한 바보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현대 기독교가 잃어버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신앙'과 '순전한 신실함'의 회복을 꿈꾸며, 알렉사메노스의 곁방에 적혀 있던 고백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알렉사메노스는 신실한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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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칼과 가나안의 전쟁: 하나님의 본심을 읽다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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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요즘 교회에서 리딩지저스를 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신앙생활을 하지만, 진지하게 요즘 성경을 다시금 읽게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 구약의 역대상까지 읽어 오는데,,, 분명 십게명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구약에는 온통 죽이고 전쟁하고 씨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까지 ,, 도무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율법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사실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해설을 부탁드립니다.
[생각 나눔]
성경을 읽다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벽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 손에는 살인하지 말라 하시는 십계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가나안을 진멸하라 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가시와 같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왜 구약에서 그토록 잔혹한 전쟁의 주관자로 묘사될까요?
초대교회의 마르시온은 이 당혹감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잔인한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잘라버리고 사랑의 하나님만 남겨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잔인한 신과 사랑의 신을 나누어버린 그의 시도는 명쾌해 보였으나, 결국 성경의 뿌리를 잘라내는 이단적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마르시온처럼 억지로 푸는 대신, 그 거친 문자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와 공의의 심판
먼저 우리는 언어의 결을 살펴야 합니다. 십계명이 금지한 살인은 히브리어로 라차(Ratzach)입니다. 이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탐욕으로 저지르는 불법적인 살해를 뜻합니다. 반면 성경에 기록된 전쟁과 형벌은 공적인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하지만 이런 법적 구분만으로 우리 마음의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냉혹한 법 집행관에 불과하신 걸까요?
가인의 표, 법 위에 흐르는 긍휼의 강물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 첫 살인자 가인의 사례를 소환해 봅니다. 법의 잣대로만 본다면, 동생을 죽인 가인은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분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를 죽이는 대신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심지어 그를 해치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표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법의 집행보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존재의 삭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생명과 공동체를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뜨리는지 가르치는 사랑의 울타리였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법 집행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신중했습니다. 두 명 이상의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고,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한 도피성을 곳곳에 두셨습니다. 법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으나, 그 법을 운용하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언제나 자비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헤렘 , 인종 청소가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
가나안 진멸을 뜻하는 헤렘 명령 또한 이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합니다. 현대인은 이를 인종 청소로 오해하지만, 고대 히브리어의 맥락에서 헤렘은 생물학적 말살이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폐기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물건 자체를 증오해서인가요, 아니면 그 물건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구약의 맥락에서 헤렘(진멸)은 누군가를 미워해서 죽이는 감정적 보복이 아닙니다. 헤렘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의 종교적, 사회적 체계가 더 이상 이 땅에서 작동하지 못하게 그 기능을 정지시키는 행위입니다. 만약 헤렘이 인종 청소였다면, 기생 라합이나 기브온 족속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인이라는 이전의 정체성을 버리고 여호와의 질서 안으로 들어왔을 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즉 헤렘의 칼날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고집하던 악한 체계와 정체성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우주적 질서의 회복과 거룩한 방역
현대인은 개인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보지만, 고대인은 우주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인신 제사와 같은 극단적으로 잘못된 질서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질서 체계가 온 인류에 전염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헤렘을 명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샘플인 하나님의 백성이 오염되면, 전인류를 구원할 통로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표에서 보듯, 하나님은 언제나 법 너머의 생명을 보고 계십니다. 헤렘은 죽이기 위한 칼이라기 보다, 더 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이전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단호히 끊어내시는 하나님의 아픈 결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만나는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
결국 구약의 엄격함은 신약의 십자가로 가기 위한 이정표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엄중한 법의 원칙을 보여주시되, 그 법의 칼날을 우리에게 휘두르는 대신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부으심으로써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완성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 앞에서 땅에 글을 쓰시며 법의 문자 뒤에 숨은 인간의 위선을 꼬집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의 엄격한 율법 속에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눈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법은 사랑의 울타리입니다. 아이에게 차가 다니는 길로 나가지 말라고 엄히 꾸짖는 부모의 마음은, 아이를 혼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그 수많은 전쟁과 심판의 기록들은 인간의 완악함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인류사의 아픈 기록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고군분투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며 마주하는 그 불편한 지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문자를 넘어 그 문자를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같은 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역대상의 긴 족보를 지나며, 그 이름 하나하나를 끝까지 기억하고 보존하신 하나님의 집요하심과 신실하심을 발견하는 귀한 여정이 되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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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 회의론자의 서재에서 만난 하나님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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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성적 회의주의와 뜨거운 신앙이 한 가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최첨단 인공지능과 우주 탐사가 논해지는 21세기,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현대 지성인이 80년 전 옥스퍼드 교수의 글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는 차가운 이성으로 신을 부정하려다 논리의 막다른 골목에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람, 바로 C.S. 루이스입니다.
본 시리즈는 무신론자에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거듭난 루이스의 날카로운 지성과 뜨거운 상상력을 따라가는 10단계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그의 서재에 꽂힌 낡은 책들 사이에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참된 기쁨'과 '존재의 이유'를 다시 발견하려 합니다.
📚 시리즈 커리큘럼
1강. 왜 21세기에도 루이스인가? : 세속화된 시대, 지성과 영성이 만나는 지점을 탐색합니다.
2강. 순전한 기독교 : 교파와 논쟁을 넘어선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를 다룹니다.
3강. 도덕률 : 우리 마음속 '옳고 그름'의 감각을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합니다.
4강. 고통의 문제 : 선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정직하게 묻습니다.
5강.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일상의 사소한 틈을 노리는 악마의 심리전과 영적 실상.
6강. 순례자의 귀향 : 인간의 가슴속에 숨겨진 근원적인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서.
7강. 나니아 연대기 : 상상력과 문학이 어떻게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지 살펴봅니다.
8강. 네 가지 사랑 : 우정과 에로스를 넘어 완성되는 아가페 사랑의 신비.
9강. 헤아려 본 슬픔 : 상실의 처절한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을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10강. 영광의 무게 : 우리는 모두 영원한 존재로 지어졌다는 장엄한 결론.
🖋️ 이 시리즈를 통해 당신은...
기독교가 단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이성의 산물인 동시에 영혼의 갈망을 채우는 기적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고민하는 회의론자에게는 명쾌한 다리를,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인에게는 가슴 뛰는 상상력을 선사합니다.
자, 이제 루이스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더 넓은 진리의 지평을 바라볼 준비가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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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의 역설: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월 22일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는 21세기의 안경을 쓰고 1세기의 텍스트를 재단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달란트 비유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된 본문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비유를 성과주의, 자기 계발, 혹은 재산 증식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처음 독자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유대인들과 마태 공동체의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 비유는 전혀 다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과연 예수님은 오늘날의 경영학 강의를 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1세기의 법적 상식: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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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 재평가: 악의 화신인가, 시대의 저항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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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침례교의 모튼 목사는 ‘이세벨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은 이세벨이야말로 당시 가부장적 규범과 종교적 전통에 과감히 도전한 여성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저는 그녀를 단순한 악녀나 저항적 영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대신 당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영향력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며 평가하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