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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그리하여 참으로 다른.
이현
1.
이제 열두 살이 된 딸아이가 요즘 반에서 ‘은따’를 당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평수가 작은 아파트에 산다고 하는데, 그것이 은따의 빌미가 되는 모양이었다. 못 사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듣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 딸아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파트 평수는 한 인간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논지를 내 딴에는 쉽게 풀어서 들려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딸아이의 반응이 참으로 시큰둥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잘 났어. 정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요즘 아이들1)은 이러저러하다고.
나도 일산 신도시처럼 구획화된 대단지 아파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친구네 아파트 평수를 의식했던 기억은 없다. 나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저 누구누구네 집일 뿐, 그것이 몇 평인지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10평짜리 임대 아파트가 모여 있는 단지도 있었는데, 그 동네는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집들이라 낮에는 어른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은 우리에게 놀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랬을 뿐, 그곳을 가난한 동네라고 딱지 붙여서 친구를 놀릴 빌미로 삼았던 기억은 없다. 간혹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이름을 빌미로 놀리는 일이나 같은 느낌의 악동 기질을 발휘한 장난일 뿐이었다. 10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가난을 진심으로 멸시했던 적은 결단코 없었다. 옛날 아이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그랬다.
그러니 단순 비교를 하자면, 요즘 아이들은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맞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시야를 넓혀 요즘 어른들과 옛날 어른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똑같은 모양새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지만, 옛날 어른들인 나의 부모님들과 주변 어른들이 아파트 시세를 화제로 삼았던 기억이 없다. 물론 그런 대화가 아예 없지는 않았겠으나, 지금처럼 밥상머리에서도 자연스럽게 화제로 등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만 해도 집은 경제 가치로 단순 평가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 가족이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린다는 의미였다.
그런 풍토에서 집을 사고팔아 돈벌이를 하는 일은 천박한 것으로 간주되어 멸시 당했다. 복부인2)이라는 말은 그런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복부인이라고 지탄받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준호 엄마라고, 눈썹이 짙고 턱 끝이 뾰족하던 그 얼굴이 지금도 제법 또렷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준호 엄마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준호의 행실에서 작은 흠이라도 볼라치면 여지없이 엄마와 연결지어 숙덕거리곤 했다. 사돈의 팔촌이 땅을 샀다는데도 배가 아프다는 심리도 있었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부동산 재테크 자체를 천시하는 풍토가 분명히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 때의 준호 엄마가 지금 일산이나 분당 신도시로 시공간을 이동하여 나타난다면, 모르기는 해도 동네를 주름잡는 명사가 될 것이다. 부동산 투자에 대한 남다른 감각으로 월급쟁이 남편과 사는 전업주부가 재산을 일구다니, 21세기 판 현모양처라고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요즘 어른들에게 집은 재산 그 자체다. 부동산 재테크는 가히 의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집을 살 때면 환금성과 투자가치를 우선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 끼 밥을 먹듯 동네 아파트 시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심지어 전세 임대료나 매매가를 낮게 책정해서 내놓았다가 이웃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는다고도 한다. 집을 팔아 한 몫 잡을 기회를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하며, 집을 팔아 목돈을 잡으면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러워한다. 경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집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보 소리나 면하면 다행인 세상이다. 이런 풍토에서, 작은 평수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이나 남의집살이를 하는 사람은 곧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요즘 아이들이 요즘 어른들을 통해 바라보는 ‘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집은 그의 경제력을 나타내며, 경제력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며, 능력은 그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이것을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아파트 평수가 곧 그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아파트 평수로 친구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사실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의 문제이다.
비단 부동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옛날에는 눈에 띌 만큼 화려하게 차려입고 학교에 오는 엄마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새 허름한 차림으로 학교에 갔다가는 자식 얼굴에 먹칠한 엄마 취급을 받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역시나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휴대전화 기종으로 친구 사이의 서열이 정해지는 아이들이나, 자동차 배기량으로 사회적 지위를 은근히 가늠하는 어른들이나 속내는 매한가지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다만 아이들은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이렇게 요즘 아이들이라고 통칭하여 개탄해마지 않는 가치관의 책임을 어른들에게 돌리고 나니, 요즘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억울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어른의 그러한 가치 기준 역시,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 비롯된 것일 터이니 말이다.
원죄는 대체 누구에게, 아니 무엇에게 있는 것일까.
2.
이제는 촌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믿는다. 예전에 주워들었던 이론이 아니라 경험치로 돌이켜보아도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적어도 앞서 언급한 ‘요즘 사람들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어떠한 사회적 존재냐 하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요즘 세상이 요즘 사람들의 의식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서 폭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자본과 권력의 보다 노골적인 지배 형태는 자본주의가 가졌던 최소한의 안전판마저도 가차 없이 내던지고 있다. 복지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것으로, 고용 안정은 기업에 군살을 붙게 하고 노동 의욕을 감퇴 시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거대 자본은 세계화라는 그럴싸한 기치를 내걸고 약소국에게 아예 담장을 없애라고 요구하고 있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이 조건 없이 맞붙는 게 이른바 형평성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눈치로 먹고 사는 처지에다, 분단 상황에 군부 독재가 지배하며 복지의 ‘복’자도 배워보지 못 한 대한민국이다. 그런 판국에 신자유주의라는 보다 노골적인 지침이 내려졌으니 ‘복’ 자는커녕 ‘ㅂ’을 사전에서 통째로 삭제해야할 상황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정권은 몇몇 정치적 이슈에 관한 입장 차이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을 대한민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3) IMF 사태라는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세계 자본에게 대한민국을 통째로 갖다 바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은 김대중 정권이다. 한미 FTA도, 비정규직 법안도, 노무현 정권에게 원죄를 따져 물을 만한 일이다. 이명박 정권은 좀 더 무식하게 들이대고 있을 뿐이다. 국회 민생 특위에서 “양극화는 시대의 트랜드”라고 말한 강만수 장관의 죄는 보다 솔직하다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제 착실하게 벌고 모으던 삶의 방식은, 원시 시대의 수렵 채취 생활만큼이나 ‘한물 간’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많은 가치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폐기처분 되고 있다. 시대의 트랜드인 양극화에 편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가치는 ‘돈’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용 불안 상황에서 그 돈을 버는 방법마저도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펀드든, 주식이든, 부동산 투기든, 한 방이 아니고서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집의 가치를 돈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다. 사람의 가치를 돈을 떠나 생각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민주주의 등 근대의 역사가 추구하고 가꾸어왔던 많은 가치들이 신자유주의의 파도에 남김없이 쓸려 나가고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요즘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렇게 둘이다. 자본과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돈의 흐름을 좇아 나쁜 사람이 되거나,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판마저 없는 이 땅에서 굶어 죽을 각오로 신자유주의의 트랜드를 거스르거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토록 끔찍한 세상이 번쩍거리며 잘도 돌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숨통을 죄는 시스템이 날로 기승을 떨치며 강고해져 가고 있다.4) 모 편집자 말마따나 경기가 경기를 일으키도록 나쁘다는 데도, 현란한 광고가 신상품을 소개하기 바쁘고 백화점과 할인마트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희곡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에서 현대 뉴욕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영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고백하건대.... 이 병든 체제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마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노라고.
숨 가쁘게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과 그것의 구매를 부추기는 광고와 드라마와 영화와 온갖 매체들은 그야말로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드높은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배금주의적인 의식을 강요받은 아이들에게 현란한 물질의 유혹이라는 마약까지 무한정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기꺼이 자본이 던진 미끼를 물고 돈을 유일한 가치로 받들며 자신과 타인의 모든 가치를 돈을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사람의 가치는 능력이고, 그 능력은 곧 경제력이라고. 가난한 친구는 멸시 받아 마땅하다고, 내 삶의 목적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무능력한 인생은 곧 무가치한 것이라고. 나의 장래희망은 부자가 되거나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가치 기준으로 따져 보아 지금의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아이들은 그릇된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 아니, 그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선택이다. 이른바 ‘신상’을 위해 원조 교제를 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폭력적으로 돈을 빼앗는다. 성적 때문에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고, 잘 팔리는 몸매를 갖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린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에게 집단적 린치를 가하며 쾌감을 얻는다. 현실화 되는 경우만 본다면, 이것들은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일이다.
요즘의 세상이,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증식이 존재의 이유인 자본주의가, 요즘 사람들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단 한 가지의 가치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 이것이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서 신자유주의의 포화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현주소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바로 이런 요즘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이른바 작가라는 것이다.
3.
“만만치 않은 시국을 맞아 작가로서 어떠한 행동과 발언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주제다. 한 마디로, 시국보다 더 만만치 않은 주제다.
만만치 않은 시국에 대해서도 울화통이 터질 뿐, 이렇다할 결론도 대안도 없는 처지다. 시국이니 뭐니 하는 것을 떠나서도 작가로서 어떠한 행동과 발언을 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는 처지다. 작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 한다.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어쩌다 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 발제를 하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신기한 일을 보면 덥석 붙잡고 마는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정황 탓이기도 하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해도 이런 주제에 대한 해답이 있을 리 없다는 나의 믿음 탓이기도 하다.
그렇다. 풋내기 작가인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해도, 만만치 않은 시국에 작가로서 어떠한 행동과 발언을 해야 하는지를 알 턱이 없다. 나아가 알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만만치 않은 시국이든, 만만한 시국이든, 작가이든, 노동자이든, 어떠한 행동과 발언을 할 것인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선택일 뿐 획일화된 답이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한 방식의 오류와 한계는 지난 80년대의 역사가 충분히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 이렇게 행동하자, 저렇게 말하자고 목청 높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문학이 옳다, 저런 어린이 문학이 옳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할 생각도 없다. 작가로서의 행동과 발언과 문학, 그 모두는 각자의 개성과 처지와 생각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작가들이 정치 현실에 맞서 거리로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닐 터이며, 모든 작품들이 사회의 모순과 참담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담아내야 하는 것도 아닐 터이다. 반대로 모두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인터넷 앞에서 당면한 정치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당면한 이슈와는 동떨어진, 근본적인 그 어떤 주제에 천착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모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궁리해도 좋을 일이다. 어떤 작품은 지금의 모순의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그 모순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에 주목하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작품은 아이들의 지적인 호기심에 불을 붙일 것이고, 또 어떤 작품은 아이들의 웃음보를 시원하게 터트려줄 것이다. 그 모든 작품들은 똑같이 소중하다. 그 모든 다양한 모습들이 입체적인 퍼즐의 한 조각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 이전에 굳게 지켜져야 할 원칙은 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문학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문학이라면 더욱이 그러할 것이다.
바로 이 진실의 뿌리는 현실과 잇닿아 있다. 당대의 현실과 유리된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이 개개인의 욕망과 가치관을 속속들이 통제하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의 욕망과 갈등과 기쁨과 고통의 모든 순간 역시, 지금 세상의 현실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그 모든 일상과 행동과 언어는 세상의 수레바퀴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아이들만의 동떨어진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 모르고서 아이들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들을 말하려면 세상에 대해 알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대해 눈감고 어설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가는 거짓말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서 거짓말의 의미는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것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소극적인, 부지불식간의 거짓말까지도 포괄하는 의미이다. 모르고 한 거짓말을 용서받기에는 작가라는 이름은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작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의무가 무겁다.
그렇다고 사회과학 공부에 매진하고 지금의 정세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대한 정보통이 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적어도,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자라면 지금의 세상에 대해 눈과 귀를 열어야 할 것이다. 그늘지고 후미진 구석까지 살뜰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난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모르는 채 가난한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거짓말이다. 지금 세상에서 선과 악이 무엇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 모르는 체 선과 악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감히 단언컨대 거짓말이다. 지금 돈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심하게 말해 사기라고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지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명제조차, 그 착한 마음과 착한 사람을 둘러싼 세상을 모르고 책상 앞에서 끄적대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살풍경한 현실에 대해 모르고서 어떻게 지금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지금의 입시 지옥이 어떤 매카니즘으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관심 없이 사교육에 몰린 아이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제일이라고 무턱대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처지에 내몰려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에 주목하지 않은 채로 그들을 등장인물로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다. 기초수급대상자 아이들의 현실에 제대로 된 관심도 갖지 않은 채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는 없다.
우리 어린이문학을 살펴보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천착하는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빈곤 문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과연 얼마만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 사교육에 내몰린 아이들을 등장시키는 작품은 그토록 많은데, 제도 교육의 횡포에 맞서려는 아이들의 싸움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평화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렇다면 현실 전쟁에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만큼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알고 말하지 않는 것과 모르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알고 말을 아끼는 것과 몰라서 말을 못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세상의 모순이나 고통과 직접 잇닿아 있지 않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우리 모두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처지다. 당장의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작품조차, 당장의 현실을 알고서야 튼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모르고서 지금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설사 그럴 듯하게 아는 척을 해서 글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진실이 담겨 있지 않고 얄팍한 눈대중으로 가늠한 정보에서 좋은 작품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작가인 G .K. Chesterton은 이렇게 말했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용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용이 있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용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용의 처지가 어떠한지도 모르는 채 용에 대해 말하는 어리석은 오만을 범할 수는 없다. 용의 처지를 알고서야, 용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알고서야 비로소, 용의 탄생과 죽음과 비상과 추락과 사랑과 꿈과 그 모두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 수많은 단서들을 살피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작가라는 이름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족쇄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것, 이것은 작가라는 이름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권리이다. 가히 신성불가침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하여 서로 다른 상상력으로 다양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다양한 퍼즐이 만들어내는 입체적 세상이지 않을까.
더구나 지금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 만만치 않은 시국이다. 과거 정권에서한계가 존재하는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진보를 이루었던 많은 것들이 무위로 돌아가고 있다. 그나마 눈치를 보아가며 스멀스멀 추진되던 정책들이 앞뒤를 재지 않고 세상을 난도질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사상의 자유의 문제, 환경문제, 조세 문제, 농촌문제, 민주적 절차의 문제, 교육문제... 심지어 자존심의 문제까지 걱정해야할 판이다. 촛불 당시에 실감했던 말대로, 지금의 정권은 초딩들에게도 욕을 먹는 기이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일일이 분개하기에도 숨 기쁜 실정이다. 모르는 척 할래야 할 수 없을 만큼 시끌벅적하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정권이다. 그 와중에 먹고 사는 일까지 발목을 붙들고 있으니 건강을 위해 되도록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말 그대로 만만치 않은 시국이다. 사는 일도, 쓰는 일도 딱 그 만큼 만만치 않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글줄이나 쓰고 앉아 있는 일을 만만치 않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다. 뜨뜻한 방에서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타고난 재주에 기대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엄동설한에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참으로 유연해진 노동시장에서 살아남느라 숨통이 막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공정택이 서울시교육감을 하는 판국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니 만만치 않은 와중에도 조금 품을 열어보았으면 좋겠다. 격랑처럼 밀어닥치는 지금의 문제들을 위해 마음자리 한구석을 비워보았으면 좋겠다.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느라 쫓기는 시간의 일부를 기꺼이 덜어내어 지금 세상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십시일반으로 마음들을 보태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탠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빚어질지는 모를 일이나, 이 끔찍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그렇게 이어진 마음들일 것이다. 근거 없는 낙관이거나 뻔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끝으로 만만치 않은 창작에 무거운 머리로 만만치 않은 세상사의 고민까지 더불어 이고 지고 있는 많은 분들과 시 한 편 나누고자 한다.
시를 쓰며 1
김사인
아저씨
쥐새끼5)처럼 치사하게 살고 싶어요.
시 같은 것이야 뉘집 개아들이 물어가도 상관 안 하고
살고 싶네요. 불온하지 않게
양처럼 쥐처럼 온순하고 고상하게
고급향수 같은 블란서 영화 같은
곱고도 아련한 시 쓰고 싶어요. 천진무구하고 싶어요. 환장하겠어요.
낙골 판자촌 날라리 공동변소에 똥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고 싶어요.
싹 없애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살다가
쥐새끼처럼 밟혀죽고 싶어요.
5) 여기서의 쥐는 200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억울하게 폄하되는 그 쥐의 상징과는 무관한 의미이다.
첫댓글 금요일에 있을 <어린이와 문학> 겨울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현의 발제글입니다.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시 내용 다른 데 퍼가도 괜찮겠죠?
공개된 글이니 물론이지요. 다음 까페 <어린이와 문학> 에 가시면 원래 글을 보실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