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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32-43 - 편가름 - 이근호 목사
((눅 23:32, 개역)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눅 23:33, 개역)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5, 개역)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개역)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8, 개역)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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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그 때 그 장소의 정황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구원의 능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 세계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예수님에 대해서
조롱하는 눈치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덮쳐서
우리가 이 사건 안에 놓이게 되면
바로 우리 자신들도
인간들이 하던 짓 속에
포함이 되게 됩니다.
대다수의 인간들의 의견은 이러합니다.
“예수는 처형당해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특히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죄때문이 아니라
일단은 그 자리에 서게 되었던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어느 강도는
옆에 같이 달려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당신이 구원자라면
당장 그 위력을 지금 보여달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노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생각하는 구원이란
바로 ‘십자가 달리지 않는 저쪽’과
‘십자가 달려 있는 이 쪽’ 간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서
그 차이를 제거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즉 “나는 저들처럼
십자가 달려 못 박혀 죽는 수치스러운 입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의 염원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강도가 알고 있는 차이란
기껏 십자가 없이 살던
과거 삶을 바탕으로 한 차이입니다.
단지 아는 것은 이정도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구원받은 강도는,
다른 차이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함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리고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는
그런 세상과의 차이에서
그 차이를 제거하는 구원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구원받은 강도에게
이런 안목을 준 것이
이 세상 누구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는 없습니다.
아무도 이 강도에게
그런 것을 전수시킬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자연스러운 결론,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주장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종합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보는 것도 실수입니다.
듣는 것도 실수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실수이기에
모든 생각이 다 실수이고,
그 생각에서 비롯된 반응도
실수일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자기네의 두 눈으로
예수님을 똑바로 보고 있어도
전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도도 일종의 전문직입니다.
강도에게 강도짓이란
자신의 개성과 가치를 유지시켜주는
행동의 집합개념입니다.
만약에 강도가 강도짓을 버리면
자신의 자신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도박하는 자가 도박에 중독에 빠진 것은
단순히 돈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투자와 애씀을
자신의 투자와 애씀으로
일거에 싹쓸이하는 그 재미가 즐겁고
바로 그 즐거움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데 가면
자신의 값없이 있음이 나타나지가 않는 겁니다.
그것은 곧 지옥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옥이란
자신의 개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평소에 인간은 자신으로 살고
자기에게 기대 거는 재미로 사는데
만약에 자기가 부인되게 되면,
어디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릴지 난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매사에 실수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이해한 것을 우상화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긍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내기 위해
‘자기 부정’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긍정’의 바탕 위에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인간의 이러한 시도가
일말의 옳은 점이 있다면
놀랍게도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야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신 메시아를 보내신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실수를 실수라고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긍정적으로 옳다고 우기는
속성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1-4에 보면,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완벽하게 믿는 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이런 주장 아래에서
한통속으로 몰려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
“당신은 맞아 죽어도 싸!”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장에서 벗어나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여튼 인간들의 그 어떤 몸부림에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되
‘사람 손에 죽는 메시아’로 보내신 이유는,
인간들이 구원도 모르면서
구원을 종교적인 양식으로
끊임없이 시도하고들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들 손에 죽고자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 자를
역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제공합니다.
“저들 대신 제를 죽여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안목에서는
인간들의 그 어떤 전문직이나
안목같은 것도 소용없습니다.
다 부질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평생을 바치고
청춘을 바친 것을
결코 버리거나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자신의, 추억과 자신의 영광이
고스라니 남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개성이 죽지 않고
고스라니 남아 있는 그런 내세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화살을
쏴 보내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으며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가 가는 세계는
단순히 내세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과 가치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
세계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면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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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강-눅23장 32-43(편가름)120812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32절에서 4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32-4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십자가사건을 가지고 유일하게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가름하는 유일한 사건으로 봤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만 구원과 구원 안됨이 결정된다는 말이에요. 예배당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우리 집안에서나 사업장에서나 그 어떤 것들이 우리의 구원 된다 안 된다,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거지요. 해수욕장 가 있든 아니면 등산가 있든지 간에 구원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 십자가사건의 일어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그것이 제공됩니다.
이 구원방식이 확정된 거예요. 사도에게 그것을 분명히 알려 줬습니다. 십자가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예수님께서 죽은 그 사건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동일한 예수님을 보면서도 한 사람은 지옥가고 한 사람은 천국 갔다는 그 사건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예수님 옆에 있는 어떤 강도는 말하기를 ‘당신이 진짜로 메시아라면, 구원자가 맞다면 당신부터 시작해서 당신과 우리 자신을 구원해준다면 내가 당신을 믿어줄게.’라는 식으로 나온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강도가 생각하는 구원은 뭐냐, 자기는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그리고 밑에 보니까 자기처럼 매달려 있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을 보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 십자가에 안 죽고 있고 자기는 지금 잡혀 와서 십자가에 죽고 있는 그 차이, 그 차이에서 강도는 뭘 요구하느냐하면, 구원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저 자리에 있고 싶은데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야 됩니까? 메시아여,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나를 건져서 저 자리에 가게 하옵소서.’라고 나온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뭐냐, 저 자리도 아니고 이 자리도 아니고 주님의 자리에 합류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사람이 어떤 차이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 속에서 기껏 차이를 끄집어내요. 기껏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이 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이 본다는 그 자체가 인간은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실수 안하기 위해서 안보고 살 수는 없는 입장 아닙니까? 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 생각인데 보고 느낀 것이 실수라면 생각도 실수고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은 결국 본인이 원치 않는 나쁜 나라, 좋은 나라가 아닌 나쁜 세계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문제가 더 큰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여기서 본 것이 실수고 듣고 느낀 것도 다 실수인데 그 실수를 실수라고 여기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그게 치명적입니다. 병은 걸렸는데 대상포진은 걸렸는데 약이 없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병은 걸렸는데 약이 없고 치료법이 없습니다, 이러면 병 걸린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잖아요.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고통스럽잖아요. 아프더라도 낫는다는 희망이 있으면 버틸 수가 있는데 ‘걸렸습니까? 약도 없습니다. 그냥 죽어야 됩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서 인간들은 더 큰 실수를 범합니다. 치료제가 없고 자기 실수를 고칠 수도 없으니까 그 다음에 추구해서 나오는 큰 실수가 뭐냐, 내가 생각한 식으로 천국에 들어가 보겠다고 노력을 한다는 점이 또 엄청난 실수입니다.
안 된다는 말을 듣기에는 너무나 자기 자신이 귀해요. 안된다고 절망하기에는 뭔가 아직도 아까운 것이 많아요. 그래서 절망하기 전에 뭔가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실수일 줄이야! 그게 실수일 줄이야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지옥으로 가는 입구라면 천국은 누가 가는데, 라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왜 가야 되는데? 실수 한 것은 그냥 실수한 것으로 인정하고 이 실수를 회복할 수 있는 여력도 우리한테는 없고, 이것은 교회 다니고 기독교를 믿고 천주교를 믿는 이 자체가 다 부질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구약을 본 사람들은 아시겠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저는 요새 성경 안 봅니다. 왜, 봐도 모르겠는데요, 뭐.’ 구약을 보게 되면 그거 하나 나와요. 뭐냐 하면, 우상 섬겨서 벌 받는다는 이 이야기로 전부 다 응축이 됩니다. 우상 섬겨서 저주받는다, 가짜 신 믿어서 진짜 신한테 당한다는 이야기가 구약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짜 신을 안 믿고 진짜 신을 믿으면 되지.’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기가 믿는다는 모든 것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면 가짜 신으로 돌변해요. 여호와를 믿잖아요. 믿으면 믿는 순간 내 안에서는 가짜 여호와로 돌변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 안에서 예수가 가짜 예수로 돌변한다니까요.
이 접수처가 문제에요. 이 접수처가 실수와 오류가 발생되는 접수처가 되어서 정작 하나님의 하나님 됨 하고 정작 내 안에서 접수해서 내가 해석하고 내가 용납해서 편집해서 ‘이 정도 하면 아마 예수일걸. 이 정도가 아마 구원자일걸.’라고 접수해서 내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우상으로 변하는 겁니다. 인간 안이 문제 있거든요. 인간 자체가 문제 있어요. 노아가 방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했다,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노아, 네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되었다면 나도 같은 인간인데 네가 방주 만들면 나도 방주 만들지.’ 그거 실수거든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 소리를 딱 듣는 순간 ‘돌 던져서 누구 죽이는 짓은 못해도 돌에 맞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남에 돌에 맞아서 순교하겠다고 한다면 그것 실수거든요. 변화 산 올라가서 주님 보고 모세 봤다고 해서 지금 변화 산에 올라가 보세요. 숨만 헉헉거리고 자갈만 보일뿐 별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네가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가 우상이에요.
더 큰 문제는 그 기독교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안이 없으니까 기독교를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으로 안하는 방향으로, 천주교와 불교 보다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천국에 가깝다는 자기변명조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우상이다, 할 때 교회가 우상인 것을 인정하더라도 달리 구원받는 방법이 없어서 난처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교회 다녀야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한 것은 뭐냐, 어느 누구도 예수님 보고 ‘진짜 당신은 메시아이면 당신도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나도 체포되기 전 상태로 돌려주옵소서.’라는 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그 생각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강도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그것을 보여준 겁니다. 그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이야기를 성령께서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같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보면서 거기서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쉽게 해서 평소에 새벽기도 안 나가다가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한다 이 말이지요. 평소에 새벽기도 안 나갈 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교회는 아예 새벽기도 자체가 없으니까, 새벽기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새벽기도에 대한 어떤 보상 같은 것, 새벽기도를 함으로써 덤으로 뭔가 받는 것, 대가를 챙기는 것을 기대하게 되거든요.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집에 그냥 앉아 있자니 답답해서 못 있겠고 하소연 할 데가 없으니 기도는 해야 되겠고, 집에서 하는 기도보다 새벽에 예배당가서 하는 것이 마음 적으로 더 안정감이 생기고 희망을 제공한다 싶어서 거기 출석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까지는 탓할 것이 없는데 출석하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경쟁파트너를 만납니다. 5시에 시작해서 6시까지 한 시간정도 하는데 무슨 똥고집인지 7시까지 버티는 사람이 있어요. 내일은 그 사람을 이겨야 된다는 경쟁심리가 슬그머니 올라오지요.
저 사람보다 일찍 자리를 뜨면 왠지 패배자가 된 것도 같고 계속 자리에 앉아 있는 저 사람에게 더 보너스가 간 것도 같고, 나에게는 덜 온다는 불길한 느낌도 들고, 또 하다가 중지하면 아니 가는 것만 못하다는 비슷한 성경구절도 생각나고, 괜히 맹세했다가 안 지켰다고 벌 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그 지점 내가 생각한 그 목표점에 하나님과 예수님 당신이 거기에 일치시킬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을 나에게 보여 봐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여주면 믿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보는 것이 모여서 생각이 되고 그 생각이 나와서 행동이 되는데 그 보는 것 자체가 실수인데 생각도 실수고 행동도 실수’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은 인간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몸부림 쳐도 안 되는, 그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안 되는 지점을 내 자리라 여기고 그 지점에 앉아 있어야 돼요, 설치지 말고.
자, 공무원시험을 쳤다 합시다. 컷 라인 점수가 96점이 되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시험 쳐놓고 점수 보니까 92점이에요. 4점이 더 있어야 합격인데 92점이라는 말이지요. 이상하다, 내가 96점이 될 건데, 하고 찾아가보니까 채점에서 실수를 해서 92점이 아니고 94점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행정소송 겁니까? 92점대나 94점대나 합격 아닌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도 고집은 있어가지고 94점인데 92점으로 했다고 씩씩거려보지만 어쨌든 합격되지는 않는 거지요. 아무리 해도 구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래도 최선의 노력은 다 했잖아요.’라는 점수를 우리가 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그 인간을 십자가사건 속에서 함께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내 안에서 터진 적이 없기 때문에, 내 쪽에서 십자가 사건을 찾아가서 그것을 수용하고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실수, 신앙적인 실수를 그런 식으로 내 보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본문의 사건의 현장을 민주주의의 다수결 제도로서 여기에 적용시켜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놓고 ‘자, 이중에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했을 때 오늘 본문에서 몇 명이냐 하면 달랑 한 명입니다.
사실 한명도 아니지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니까 손도 못 들고 그저 낑낑거렸을 거예요. ‘자,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면 전부 다 들지요. 한 명 빼놓고는 다 든다 이 말이지요. 여러분, 다 같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고 인생경험 할 만큼 한 사람이고 연륜과 경륜을 갖춘, 이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이에요. 그런 인간들이 아니고 그런 분들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한 어르신네들이에요. 그래서 평소 자기 행동에 실수가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인데 유독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깟 것 이 세상에 있으나 마나, 너 하나 없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그것이 바로 이 십자가사건에 안에 대다수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날 교인들을 통해서 또 드라마나 올림픽을 보면서 다 봅니다. 올림픽 축구 동메달 따면 그 까짓 거 예수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새벽에 맥주 한 컵 마실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은 있다는 거예요. 예수 없어도 된다는 겁니다. 분위기가 다 그래요. 예수 없어도 된다는 사람보고 예수 이야기하면 참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실례가 되는 차원입니다.
그것은 지금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길거리를 가는데 어떤 사람이 대뜸 다가와서 하는 말이 ‘도를 아십니까?’ 이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예수 귀신 좀 떼 내고 살수 없습니까? 예수 귀신 그거! 예수 귀신 떼 내고 붙인 것이 뭐냐, 하나님 귀신이에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 그것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알고 있는 사람한테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는 사람과 예수 아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한쪽은 처형 시켜야 되는 관계고 한쪽은 처형당해야 될 운명을 갖고 있는 관계입니다.
처형당해야 되는 예수님을 전해버리면 그 교회 교회가 안돼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주는 하나님 전하면 다 와요. 그리고 예수님은 부록이고. 아버지가 중요하지 아들은 안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아버지가 너무 좋은 아버지라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아버지께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전혀 우리에게, 우리가 뭔가 실수하고 있다든지 우리에게 뭔가 오류가 있다는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낼 겁니다.’할 때 하나님 자체를 좋게 봐요.
좋게 본 하나님에 의해서 메시아인 아들이 왔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아들마저도 우리가 충분히 납득이 될 정도로 좋은 분이 왔다, 이렇게 합쳐서 한꺼번에 우리가 지금 반기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지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벌써 상당히 과격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오신 그 메시아를 믿을 수 있겠느냐, 라고 운을 떼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여기까지는 괜찮아요. 에이, 볼 것 없다, 이렇게 김삿갓처럼 허름하게 거지꼴로 올 수도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 혹시 삿갓 쓰고 허름하게 온다면 메시아인줄 알아야지, 이 정도쯤은 우리가 배려할 수 있는 양심정도는 있다고요. 그런데 그 다음,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적극적인 의미로 멸시를 당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께 벌 받는 양상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벌 받으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하면 일단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해야 되고요, 하나님을 알고 있는 우리가 우리 앞에 보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너도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 ‘저건 벌 받아도 싸다. 벌 받아도 마땅해. 저런 인간에게 벌을 내려야지 누구한테 벌을 내리나. 저건 저주받아 마땅해.’라는 자리에 메시아가 온다는 거예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사야 53장의 예언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믿었으니 구원받는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 교회 가면 굉장히 많아요. 목사부터 장로에서 신도들까지 다 그래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기에 ‘그래, 저건 이단이야. 귀신들렸어. 저건 벌 받아야 돼. 저주받아도 싸.’라고 표를 던지는 그 자리에 메시아가 온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할 때까지 우리는 메시아를 몰라요. 저 사람은 결단코 메시아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외칠 때까지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누군지를 몰라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믿고 있는 것 때문에 발생된 그 생각, 그 생각 자체가 실수라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대상자로 메시아가 온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 때 그 냥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헌금 거두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 때문에 땅 끝까지 선교할 것이고, 선교단체도 만들 것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 때문에 이웃을 구제하고 사랑하고 교회 봉사하고 청소하고 예배당 짓고 주차장 넓히고 교육관도 짓고 다 하는 것이지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고 성만찬하면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 믿음을 하나님 앞에 마음껏 자랑 질하고 표현하는 그런 무리들에 의해서 ‘저건 죽어 마땅한, 벌 받아 마땅한 이단이야.’라는 식으로 지목되는 자리에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래도 교인들 별로 놀라지도 않아요. 한 두 번 한 소리라야 놀라지.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주님께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이야.’라고 우리도 동조하면서 가표를 던지고 ‘그래, 찬성합니다.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제가 말하면서도 이해 못할까 싶어 겁이 납니다. ‘저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같이 동조해서 ‘저 사람은 처형 되어야 마땅해.’라는 사람을 위해서 메시아가 대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 못 박혀 피를 흘렸다, 제 말은 그 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우리가 예수님한테 얻은 것이 많고 예수님한테 도움 받은 것이 많다, 라고 여길 때는 아직도 제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보시면 돼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분통 터질 일이 생기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절망상태로 빠질 때에 순간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통과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 이렇게 조져 놓았지? 나 보고 어쩌란 말이냐.’라고 분통을 터뜨릴 때 바로 그 순간이 십자가 사건한테 제대로 얻어맞는 자리입니다. 본문 같은 경우에 메시아를 욕하고 비난 했던 강도, ‘당신이 메시아면 본인부터 시범을 보이라’는 말이지요.
짠, 하니까 십자가 다 떨어져 나가면서 묶인 것도 풀려나고, 짜짠, 하고 시금치 먹은 뽀빠이처럼 구원자로 등장하면 우리가 믿겠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누구냐면 강도입니다. 강도가 남들 보기에는 나쁜 놈이지만 강도 본인은 그것이 자기 전문직이에요. 자기 개성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냐, 자기 개성 인정해주고 자기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나라를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간주합니다. 아무리 환경 좋아도 자기개성이 무시당하고 짓밟히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옥으로 봅니다. 어떤 연예인이 우리나라 재벌 집에 시집을 갔다, 재벌 집에서 요구하는 것은 군소리 말고 조신하게 처신하면서 가문의 가풍을 살리면서, 예를 들면 안동 김 씨 같은 양반집처럼 살면서 애나 잘 키우세요, 라고 주저앉혀도 그 연예인은 자기의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 되면 자기개성을 못 찾잖아요. 연예활동 할 때의 내 잘난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잖아요. 날 표현해 주지 않는 세계에서 아무리 좋은 침대에서 자고 맛난 밥 세끼 먹는다 한 들 그게 숨 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질식될 상황이지요. 그게 만약 천국이라면 사람들은 자진해서 천국 안갑니다. 지옥가고 개성 있는 사람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우사인볼트라는 사람이 백 미터 금메달 따고서 하는 퍼포먼스(활을 쏘는 듯한 포즈)하잖아요. 왜 그런 짓 합니까? ‘나는 나다.’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강도가 돈이 없이 강도질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스배관 타고 오르내릴 때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수십 년 싸인 노하우가 있는 것 아닙니까? 훔쳐낸 사과가 더 맛있다고 그것이 얼마나 자기개성을 살려주는 것이겠습니까? 도박하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도박하는 것이 아니에요. 남의 것을 확 쓸어오는 이 놀라운 예측력, 화투의 기술을 발휘하는 그 현장만이 나의 나됨을 표출할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것을 놓치기가 싫은 거예요. 직장에서 그만두라고 해보세요. 왜 노동자들이 데모합니까? 돈 때문에 데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새벽부터 도시락 싸들고 일하는 자동차 조립 현장, 온도 높지요, 먼지 나지요, 타자나 치던 사람들은 돈 줘도 거기 못 있어요, 그 험악한 환경이라도 거기에 자기 눈물과 땀과 기도가 배인 장소입니다.
‘당신 다니는 교회가 이단이거든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집사에서 장로 될 때 목돈 내 놓았지요, 새벽기도 다니면서 흘린 눈물이 있지요, 좋은 목사 오게 해달라고 함께 철야하면서 기도했지요, 커피 마셔가면서,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잊어요? 내 청춘을 돌려달라고 땅을 치면서 노래하고 싶은데. 왜 사람은 자기 자식, 자기 남편과 아내, 자기 가정을 못 버립니까? 자기 청춘과 정력을 거기에 다 쏟아 부었는데요. 그 개성 없는 나라에 아무리 천국이라지만 거길 미쳤다고 갑니까? 왜 갑니까? 거기 가면 나를 잊어버리는데, 안 갑니다.
아니, 내가 가기 싫어, 내가! 내가 가기 싫어! 제가 하는 말은 어느 누구도 천국 보여줘도 안 간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은 이미 지옥에 맛을 들여놓았어요. 경쟁하고 지더라도 또 희망을 품고 ‘언젠가는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양말 벗고 골프 치는 그것이 우리 몸에 익혀져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천국 보여줘도 안가요. 갈 수 없을뿐더러 가지도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빙자해서 내 자신을 손대지 말라, 하는 그 세계를 천국이라 여기면서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겁니다. 신자 아닙니다. 우리는 전부 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에요.
구약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상을 섬기기에 저주받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했지요. 그 이야기 들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섬길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마귀가 심어준 고집들을, 한 고집들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당할만한 말들을 수시로 내뱉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누구든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마 10:37) 제가 심방을 꽤나 다닌 편에 속합니다. 그것도 기네스북에 있는지 모르지만 부교역자로 있을 때 대심방 할 때 제가 세어보니 하루에 열여섯 집을 갔어요. 별로 안 놀라시네요.
한 집에 오래 있지 않고 빨리 일어나는 이유가 하루 정해진 스케줄이 있거든요. 하루에 한 구역을 다 돌아야 되니까, 당회장 목사가 그렇게 시키니까 그렇게 돌았어요. 만약에 그 사람이 집에 없으면 미장원에 쳐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기독교 믿는 가정과 가게에 가도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누구든지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액자를 걸어놓은 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있으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번호 054에 986에 0172. 기독교 가정이나 가게에 그런 구절을 걸어놓은 집을 봤습니까? 기독교 성물 파는 집에서 그런 것 봤습니까?
그 구절이 없다는 말은, 다른 구절이 있다는 말은 지금 오해하고 실수하는 차원에서 그것을 집에다가 걸어놓은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 지금 실수……, 이러면 또, 그게 대전 누구 집에 걸려 있더이다. 다 걸려요, 다. 안 걸릴 것이 없어요. 선교사 이야기하면 선교사 걸려버리고 이건 뭐, 말을 못하겠어요. 어느 가정치고 자신의 자기됨을,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자기부인, 인간은 자기 부인이 될 수가 없어요.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오냐오냐 해서 영생을 줄 수 있는 나라, 그 나라를 천국으로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반대의 말을 하니까 그런 반대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처형하고……, 요새는 헌법이 있으니까 처형까지는 아니어도 외면하고 시기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것은 우리 본색이 원래 예수님을 반길만한 본색들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위치에서 비로소 성경이 풀리게 되어 있어요. 예레미야 1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릴게요.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 예레미야한테 하는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구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예레미야야, 너는 집단적으로 심판 받아야 될 세계 속에 네가 놓여 있다. 하지만 너는 단독적으로 거기서 구출할 수가 없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나는 그 세계에서 너를 구원해 줄게.’ 이것이 구원방식입니다.
이것이 구원방식이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이 말을 전하면서 비로소 예레미야가 속해 있는 유다나라 전체가 왜 저주받아야만 되느냐, 의 그 이유의 전개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이것은 예레미야뿐만 아니고 뒤에 나오는 에스겔도 마찬가지에요. ‘에스겔아, 성경말씀을 찢어서 입에 넣고 먹어라. 네가 입에 넣으면 입에서는 달콤하겠지만 속에 들어가면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 말씀을 담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 뱉어라. 그러면 죽을 영혼은 죽게 되고 살 영혼은 살게 될 것이다.’(겔 3장)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사건에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 십자가에 왜 죽었습니까?
주님께서는 마무리 짓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마무리가 뭐냐, 분류작업이에요. 십자가지신 이유는 뭐냐, 분류작업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분류하는 거예요. 분류하는데 거기에 우리가 손댄다고 우리의 의견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누가 분류하는가,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분류를 시킵니다. 그것을 가지고 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했지요. 성도를 가지고 ‘굴러다니는 끝’이라고 했지요. 서울의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보배라는 선수가 양궁 가지고 화살을 쏘게 되면 과녁의 정 중앙에 꽂히잖아요.
예수님이 만든 마지막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든 마지막이 뭐냐, 그게 분류입니다. 분류기준, 십자가지요. 분류기준인 십자가를 화살에 담아서 우리를 향하여 쏘게 되면 우리는 나름대로 내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서 천국 갈까.’ 하고 까불고 있는데 화살이 팍 꽂히고 관통을 해버려요. 옛날 사극에 보면 화살 끝에 종이 묶어서 비밀 편지 묶어서 쏘게 되면 기둥에 텅, 하고 꽂히게 되면 오잉, 하고 화살을 뽑아서 편지를 펼치면 ‘어서 피하시오.’ 이런 것 있잖아요.
그처럼 예수님 십자가 분류기준을 편지에 담아서, 편지인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다른 용어로 이야기 하지요, 영생, 영생을 담아서 그 화살을 우리를 향해 쏩니다. 엑스 텐, 완전 정 중앙에 꽂혀 버리면 우리는 그때부터 화살이 꽂힌 채가 됩니다. 화살이 꽂힌 사람이 돼요. 이것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라고 하지요. 십자가가 꽂혀 있어서 그 때부터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서 사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십자가안, 그것이 마무리고 그것이 끝이에요. 끝은 뭐냐,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끝이에요. 침대에서 구르면 굴러다니는 끝이고 밥 먹고 있으면 밥 먹고 있으면서 끝이고, 우리 자신이 끝에나 나올 작품인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어렵게 해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교회지요.
기 보배한테 화살 맞은 사람들, 왜 기 보배인가, 제일 잘 쏘거든요. 실수가 없어요. 기 보배한테는 화살 맞고 어떤 가수한테는 총 맞은 것처럼, 화살을 맞기 전에는 이 덩치, 이 덩어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십자가 화살을 맞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내가 나를 주인이라고 우길 수가 없어요. 날라 가는 화살을 내가 손으로 쥐고 내가 스스로 나한테 수술을 해서 집어넣으면 여전히 내가 주인인데 이것은 허락도 없이 날라 들어온 화살에 꽂혀 보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뭐가 되냐,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저주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부류 속에 한 개인 것을 우리 자신이 발견합니다.
나의 소원대로 안 해주고 나의 뜻대로 안 해주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야, 라고 평소에 그렇게 마음가짐 가지고 살아가던 우리 자신, 거기에 화살이 꽂힐 줄이야! 화살 딱 떼어 보니까 거기에 피가 묻어 있는데 그 피가 뭐냐, 네 죄를 위해서 대신 내가 담당했다는 그 피, 네 허물을 인하여 내가 대신 죽었다는, 내가 채찍에 맞은 그 피,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함께 그 화살로 인해서 나음을 입어서 영생을 얻고 그것만이 이 땅에 하나님이 허락한 유일한 구원방식입니다. 다른 구원방식은 제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구원받은 강도가 한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41절부터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엄연히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것은 소설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애써 부인한다 해도 현실은 있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포함 안 된 그 인간만 조져 놓았어요. 여기에 포함 안 된 인간, 백날 국회의원 되고 백날 대통령 되어도 소용없어요. 인생 끝이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합류되느냐가 관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이 강도가 자기가 강도질 한 자기만의 개성, 남들은 강도가 아니니까, 여기서는 자기만 강도니까, 그 강도의 개성은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신 개성이라는 거예요. 내가 교사다, 내가 사업한다, 내가 농사짓는다, 이 모든 나만의 개성은, 개성 없는 천국에 가는데 그 나라가 싫다는 의식을 낳게 만들 수밖에 없는, 엉뚱한 천국을 내가 만들어내는 유발요인으로서 이런 직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직업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 거예요. 이 직업이 귀하기 때문에. 왜, 그 직업에 나의 개성이 있고 나의 평생의 청춘을 가져다 부은 나의 노력과 성과가 그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화살이 날라 옵니다. 외부에서 날라 오지요. 복음은 내부에서 조작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쏘아대는 화살 같은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 구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외부에서 날라 오게 되면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그것을 뭐라 하느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택배)’라고 합니다. 믿음은 선물, 선물이 꽂혀 버리면 내가 지금 강도인지 창기인지 세리인지 의사인지 판사인지, 그것은 오히려 하늘나라에 저해되고 방해가 되는 요소로서 그동안 버텨 온 거지요.
세리나 강도가 너보다 먼저 천국 간다, 고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 과장된 농담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진짜입니다. 교회적으로 말하면 ‘네가 선교사냐, 목사냐, 장로냐, 집사냐, 그것은 아무 소용없고 오직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 이야기 하는 것도 역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비유 이야기하시면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잘난 체 하는 종교지도자들, ‘그거 천국에 아무 소용없거든.’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모든 개성을 부숴버립니다. 부숴버릴 때, 날아오는 화살에 꽂힐 때, 주님께서는 나의 세계를 죽어서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세계에 나를 집어넣는다는 사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화살 박힌 채 살아가야 될 운명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찾아온 것은 예레미야 하나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방식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줘서 예레미야에게 있는 그 구원방식과 장차오실 예수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어 해요. 남하고 엮이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엮이는 것이 그렇게도 괴로워요. 구원 받아도 나 혼자 잘해서 나 혼자 구원받고 싶어요. 그런데 정작 받아주는 천국에서는요, 예수님한테 네가 뭐에 꽂혔느냐, 예수님과 어떻게 엮여져 있느냐,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예수님과 어떻게 엮여져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그때 이렇게 답변하세요. ‘나는 나의 개성으로 말미암아 죄인입니다. 내 개성으로 말미암아 내 개성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싫어한바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싫어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렸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살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내 놓으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쏟아내야 돼요. 어떤 집안에 며느리가 있는데 ……, 요새는 다 혼자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누구하고 엮이는 것을 다 싫어해요, 십년 전에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집 산다고 돈 삼천만원 빌렸답니다. 지금은 돈이 있으니까 갚아 주려고 했지요. ‘어머니 돈 갚아 드릴게요.’ 그 전에 이자를 16만원씩 꼬박꼬박 줬답니다. 요새 은행이자 돈 삼천이면 한 달에 7만원이 8만원밖에 안되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안 받겠다는 거예요. ‘야야, 안 받는다. 이자는 다오.’ 그렇게 했거든요. 갚는다는데 갚지 말라는 거예요. 며느리는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고 엮이기가 싫은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서 시아버지가 전화를 해서 ‘야, 아가야! 나한테도 삼천만원을 빌려서 써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자를 꼬박꼬박 달라는 겁니다. 헐! 졸지에 악덕사채업자에 말려든 기분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친정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야야, 내가 오천만원이 있는데 가져다 써라.’ 친정어머니한테서 또 연락이 옵니다. 하여튼 성실하게 이자 내는 것도 문제라. 졸지에 사 금융 횡포에 말려든 거예요. 이 경우에 신고를 어떻게 해야 되지요?
부모입장에서 노골적으로 용돈 달라고 하기 뭣하니까 그런 식으로 한 거지요. 가만 보니 세상이라는 것이 부모가족, 이것은 그냥 구실이고 핑계에 불과하고 역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 자기가 자기한테 장난감이 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장난감은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내가 놀던 장난감, 천국에서는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개성, 모든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그 사건이 우리 안에 터져서 이제는 나로부터 구원을 출발시키는 이 모든 나의 실수와 오류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건짐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는 내 개성을 찾을 하등의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만들어요.
내 개성, 똑똑함, 잘남, 더 이상 이런 것을 안 찾아도 되는 사람으로 변해서 오직 주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저주받아 마땅한데 주께서 그런 자를 구원해서 오직 자신의 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의 십자가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분류작업에 의해서만 분류된 채 구원받는 것, 이 방법 외에 우리가 구원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