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본받을만한 CEO로세종이 선정된 까닭은 무엇인가?
세종이 죽은 뒤 사관은 ‘미상소해(未嘗少懈)’,
즉 “잠시도 게으르지 않은” 임금이었다고 평했다.
세종의 진면목을 만나본다
1. 세종시기는 '소빙하기'의 시작
- '밥은 백성의 하늘' 개간사업을 시작하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임금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세종대왕을 최고의 성군으로 꼽아도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종 당대에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세종이 나라를 물려받은 것은 1418년,
조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한 지 33년 밖에 안되었을 때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건국초기,
특히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했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하고 조선 최고의 시대를 일구었을까?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들.
경남 남해는 조선시대 서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중 하나였다.
남해섬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평산들판.
이곳은 농업을 일구고자 했던 세종의 고심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오목행성을 이루는 이곳이 세종초에 당시 개간되었던 들이라고 전해지는데
이곳 건너편에는 앵강만이라는 만이 있는데
그곳에 그 당시로 추정되는 승각으로 되어있고
승각은 군사적 요충지보다는 백성을 보호하는 시설로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정의연 관장(남해향도역사관)
고려말 이후 왜구의 노략질로 버려졌던 이곳을
세종은 다시 개간하도록 했다.
그 넓이는 약 950여 평방미터,
약1,500마지기에 이르는 농경지이다.
"거제, 남해, 창선의 3개 섬에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여 결"
- 세종실록 2년(1420년) 윤1월 27일
"그 당시 200여 호가 남해에 거주했다고 본다면
분산되었을 경우에 이 평산에 그렇게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용했던 농기구로는 가래라든지, 지게, 괭이, 소쿠리 정도였을 것인데
그 정도의 농기구로 이 많은 땅을 개간하는데는 굉장히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정의연 관장(남해향도역사관)
<가래>
세종 당시의 개간사업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초기 개간사업에 주로 사용되었던 농기구는 따비, 가래 등으로
이 농기구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농업박물관>에는
우리 농경에 사용되었던 모든 농기구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 가래로는 세 사람이 한조가 되어 밭을 갈거나 흙을 퍼옮길 때 씁니다.
세사람이 하루에 600평 되는 밭을 갈 수 있는 것으로 조사보고 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루에 한 사람이 200평 정도 밭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김재균 관장(농업박물관)
강화, 거제, 남해...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하는 개간사업은
버려졌던 섬과 해안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작지 확대를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이 이렇게 개간사업을 펼친 이유는 무엇일까?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세종시대.
그러나 자연조건과 기후는 농사짓기 열악한 시기였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수많은 가뭄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 즉위 10년간 가뭄이 들지 않은 해가 없었다.
그리고 이 가뭄은 흉작으로 이어져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고 농업은 황폐화되었다.
이는 바로 나라 전체의 위기였다.
가뭄과 흉작은 그대로 백성들의 고통이 되었다.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굶주린 백성들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다."
- 세종실록 5년(1423년) 3월 13일
세종6년.
강원도의 경우 전체 가구의 1/3이 없어지고 농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다.
"강원도 영서의 가구가 9,509호인데
굶주림으로 인하여 없어진 호수가 2,567호이고
61,790결 농지중에서 황폐된 것이 34,430결이다"
- 세종실록 6년 3월 28일
천문기기를 이용하여 조선초기 기온을 알 수 있을까?
<한국천문연구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양의 흑점활동을 통해 당시의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
"조선초기, 특히 세종시기에 해당하는 1,400년 초반기에는
태양흑점활동이 굉장히 약했던 시기였습니다.
태양흑점활동이 약했다는 것은
지구에서 받는 일조량이 약했다는 것이고
당시 농사짓기에 매우 안좋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종시기에 해당하는 1418년~1450년까지
태양흑점 활동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 150년 동안 태양흑점 활동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종시기가 소빙하기(LIA)가 시작하는 시점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
- 양홍진 박사<한국천문연구소>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이끈 임금이 있다.
조선 제4대왕 세종대왕이다.
그는 어떻게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킨 민생군주가 되었을까?
농업이 국가 경제에 기반이던 시기.
연이은 흉년은 그대로 국가적 위기였다.
개간으로 경작지를 확대하려 했지만
불안정한 기후로 농업의 황폐화는 젊은 임금 세종에게 큰 고통이었다.
"이곳은 경회루입니다.
바로 옆에 근정전이 있고,
근정전 뒤로 임금이 국사를 논하는 사정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임금의 처소인 강년전이 있습니다.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세종은 강년전을 버리고
경회루 한쪽 옆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세종의 고민은 깊어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무려 열하루 동안이나 앉은 채 밤을 지새기도 했다.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18일부터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
- 세종실록 7년, 7월 28일.
대신들에게는 가장 먼저 날씨와 농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매일 일을 아뢸 적에는 흉년에 관한 정사를 제일로 삼으라."
- 세종실록 4년, 12월 4일
2.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 알기 위해 '과학영농'으로
- 자격루, 혼천의, 간의, 측우기...
농업을 일으키고 민생을 구제하는 것,
그것이 조선 4대왕 세종 앞에 놓인 최대 절명의 과업이었다
새나라 조선은 분명 고려와 다른 나라였다.
국가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었고,
국가경제의 뿌리인 토지를
대부분 귀족들이 차지한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국가가 소유하게 된다(공전).
이런 조선에서 농업은 국가경제의 모든 것이었다.
농업이 살지 않으면 정치. 경제. 문화 그 어느 분야에 발전도 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세종이 농업에 전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농지를 늘이고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것.
가장 시급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과학영농이었다
즉 주먹구구식의 농사가 아니라
과학기술 연구를 통해 조선의 농업을 한단계 끌어올리게 된다.
덕수궁에는 의미있는 조선의 유물이 하나 남아있다.
국보 229호 자격루, 바로 물시계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중종때 만든 것이지만,
세종때의 것은 장영실이 만들었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은 세종시대 자격루를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자격루는 물의 흐름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입니다.
네 개의 파수호는 일월성신을 각각 의미하면서
물의 수압을 일정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3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 서준 학예연구사(국립고궁박물관)
파수호를 통해 일정한 양의 물을 흘러보내면
맨 아래 물통에 부력이 생긴다.
이 통 안에 잣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부력으로 위로 올라간 잣대가 작은 구슬을 떨어트린다.
이 작은 구슬은 다시 큰구슬을 움직이고,
이것이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고 인형을 세운다.
이 자격루로
조선은 표준시계를 갖게 되었고
시간 개념이 보편화되었다.
24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짓는 일.
즉, 우리에게 맞는 농시(農時)를 정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농시를 우리 농시에 적용,
그 편차가 적지 않았다.
세종은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위해서는 천문관측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해 간의, 혼천의 등이 제작되었다.
1년 동안의 절기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혼상도 세종때 처음 만들어졌다.
모두가 우리 농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강남농법에서는 이미 농시가 굉장히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적기에 땅을 파주고, 파종을 하고, 김을 매주고,
그걸 얼마나 잘하나에 따라 소출이 달라지는 단계에 들어갑니다.
세종이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정책을 쓰면서 농시를 잘 지키라고 강조를 하는데,
자신을 돌아보니 시간을 살피는 달력이 중국천자에게서 받아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할, 왕이 해야할 도리를 빠트리고 있는 거 아닌가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을 알기 위해
세종은 많은 과학기구를 만든 것이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강우량 측정이 필수적이었다.
세종 24년.
전국에 측우기 설치.
측우기는 세종이 세자시절 구리로 만들었다.
이로써 지역별 정확한 강수량 통계를 알 수 있었고 농사에 적용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는 과학영농을 위한 세종의 열망을 담은 것이다.
측우기가 발명되기전에는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수량을 추정했다.
"비가 오거든 물이 땅에 스며들어간 깊이를 상세히 기록하여 급히 보고하라."
- 세종실록 7년 4월 13일.
또한 과학농법에 대한 관심은 벼 수확의 증대로 이어졌다.
직파 재배를 하던 벼농사를
물에 옮겨심은 모내기(이앙법)로 본격적으로 적용키 시작한 것이다.
이앙법은 김매기 횟수가 줄어들어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그러나 세종 당시 관개시설의 미비로 적극적인 시행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이앙법은 조선중기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세종때 정리된 이앙법은 <농사직설(農事直說)>에 실려있는데
모판의 관리, 이식하는 방법, 잘 육종하는 방법 정리 등
그 이후 이앙법의 발전이 나타나고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세종대에 다 이루어집니다."
- 염정섭 책임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후대 토지 1결당 생산력은 1,200두까지 높아진다.
이처럼 세종은 과학영농으로 농업생산성을 증대하고
그것으로 민생안정과 국가의 경제력을 높이려 했다.
백성을 살리는 좋은 정치는 과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종은 깨닫고 있었다.
3. 최초 우리 농서 <농사직설>
- '농부들의 경험을 직접 들어' 작성케 하다!
이제 세종은
경작지를 늘이고
과학농법을 도입해서 조선의 농법을 한단계 발전시킨다.
그러나 남은 과제가 있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긴땅이어서
각 지역에 따라 농법도 다르고 소출량도 달랐다.
이에 세종은 전 국토의 생산량을 골고루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케 된다.
즉,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농법이 필요했다.
이로써 세종의 또 하나의 역작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규장각에 남아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우리 자체의 농사법으로 조사해서 만들어낸 최초의 우리 농서입니다. "
- 양진석 책임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로
이후로 지어지는 농서의 근간이 된다.
그것은 모두 10개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땅을 가는 법, 모판 만드는 법, 종자선택과 보관법, 비료 만드는 법 등
거의 모든 농법을 총망라하고 있다.
<농사직설>과 관련 세종의 태도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농사직설>이 보급된 지 8년째,
경기도에서 보리 한 줄기에서 네 이삭이 나는 새로운 품종이 나타났다.
이에 경기감사는 세종의 은덕이라 했다.
"경기 관찰사가 보리 한 줄기에 네 이삭이 난 일에 대해 표를 올리다."
그러자 세종은 이를 과장하지도 말고 잔치를 여는 행위도 못하게 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농사에만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처럼 아름다움을 과장하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각 도에 알려 상서로운 보리에 대하여 하례하지 말게 하라'"
- 세종실록 19년 5월 8일
그렇다면 <농사직설> 내용은 얼마나 과학적일까?
"눈 녹은 물을 모아두었다가 종자를 뿌릴 때가 되면 그 속에 담갔다가 꺼내어 말린다."
- <농사직설>
<농사직설>에 나오는 보리종자 관리법.
눈 녹은 물에 종자를 담갔다가 파종하게 했다.
종자를 차가운 물에 담그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직파 같은 경우에 특히 종자의 충실도라든지, 종자처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선종을 하고 나서 눈 녹은 물에 여러번 담갔다가 꺼냈다가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종자가 가진 여러가지 활성물질을 파종전에 활성화 시켜가지고
발아 이후 그 종자가 훌륭한 모로 자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 양세준 박사(농촌진흥청)
가축의 배설물에 겨와 쭉정이를 섞으면 훌륭한 배설물이 된다고 되어 있다.
"웅덩이를 파 오줌을 모았다가 겨. 쭉정이 따위를 태워 만든 재를 웅덩이의 오줌과 반죽한다."
농가의 어느 밭.
지금도 재와 가축배설물 두엄은 땅힘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
<농사직설>에 나오는 시비법(施肥法) 그대로이다.
"이건 아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해온 전통방법대로 하는데 언제부터 했는지 잘 모르지요."
- 김봉규(경남 창원시 북면)
<농촌진흥청>에서
실제 <농사직설>에서 설명하는 방법대로 비료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구덩이를 파고 가축배설물에 재를 섞었다.
이렇게 하면 식물에 유익한 성분이 많이 함유된 비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가축분뇨에는 질소성분이 많이 들어있는데
재는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혼합하게 되면 질소성분이 조금 희석됩니다.
그러면 질소성분이 낮아지고
여기에 인산이나 알칼리성분은 계속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양질의 비료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곽정훈 박사(농촌진흥청)
지금도 유용하고 과학적 농사방법을 담고 있는 <농사직설>.
세종은 <농사직설>을 편찬할 때
각 지역의 경험 많은 농부들에게 직접 묻도록 했다.
축적된 지식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고을의 나이 많은 농부들에게 묻게 하다."
- 세종실록 11년 5월 16일 <농사직설> 서문
훗날 세종은 그 자신 직접 궁궐에 경작지를 만들고 농사를 짓기도 했다.
"내(세종)가 기장과 조 씨앗 2홉을 후원에 심었더니, 그 소출이 한 섬이 더 되었다."
- 세종실록 19년 9월 8일
이렇게 만들어진 <농사직설>은
간행된 다음에 전국에 보급되었다.
"<농사직설>은 각 도의 감사와 관청 그리고 서울 안의 2품 이상의 모든 관원에게 반포"
- 세종실록 12년, 2월 14일.
"국가에서 농업을 권장하는데는 농업기술을 정리한 농서라는 책이 필요합니다.
세종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간행한 농서를 이용하거나 그걸 발췌해서 초록을 하거나 이용했습니다.
세종대에 이르면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 농서를 발간했고
그것은 조선의 고유의 농법을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농사직설>이 만들어졌습니다."
-염정섭 책임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4. 더 많은 경작지 확보 위해,
압록에서 두만강까지 '4군 6진' 개척!~~
세종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토지 결수를 갖게 된 것이다.
172만결.
토지 결수가 높다는 건 생산량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영농과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의 보급,
그것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는 세종 농업정책의 핵심이었다.
대규모 개간사업과 검증된 농법으로 국가경제를 일으키려 했던 세종.
그러나 이런 정도 경제정책으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함경도 같은 국경지방은 삼남지방에 비해 경제기반과 환경이 열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종이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4군 6진을 설치해
조선의 영토를 넓혀 국경선을 확정지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데 세종의 이러한 국방정책에는 국경선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더 많은 경작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곳에 세종이 직면했던 문제와 그것의 해결 과정이 잘 남아있다.
<국토정토록(國土柾討錄)>
조선의 대외정벌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종무의 대마도정벌을 비롯해, 북방 여진족의 정벌, 삼포왜란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다.
그중의 하나 파저강(婆猪江) 정벌 기록이 보인다.
"실제로 세종대 전반 기록만해도 청천강 이북은 우리땅이라 볼 수 없었습니다.
여진족하고 우리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거주지역이었습니다.
태종대부터 계속 백성 이주도 시키고 군사행정기지도 만들었지만
백성들이 거주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족이 넘어와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태종 전반기 북방지역 국방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몽골족이 발원하면서
여진족이 남쪽으로 계속 밀려내려오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 박현모(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파저강 토벌은
세종 당시 여진족 남하로 불안했던 국방의정세와 연관이 있다.
지금은 혼강(渾江)이라 불리는 파저강.
파저강은 압록강의 지류로 지금은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이 파저강 근처에 살던 여진족들이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와 함경도 땅을 침입했다.
"평안도 여연군에 침입한 여진족을 지군사 박자검이 잘 막아내다"
- 세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심지어 조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한다.
"홀라온과 울적합 여진족이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여연. 강계 지방에 들어와서
난을 일으켜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가다."
- 세종실록 14년 12월 21일
사정이 이러한데도 조정의 많은 신료들은 이 지역을 포기하자고 한다.
"허조는 홀로 말하기를
'아직 그대로 두고 경계를 굳게 지키면서 (여진족이) 침범하면 방어하는 것이 편합니다.'"
- 세종실록 15년 1월 11일
"당시 대다수 신료들은, 심지어 황희까지도,
자꾸 영토를 넓혀 오랑캐들과 충돌하느니
원산만 근처까지 깊숙하게 후퇴해서 여진족 와서 살게 내버려두고
또 백성들 돌아가며 계속 근무하는 군역의 민폐를 줄여주자고 주장합니다.
세종이 황희에게 그럼 현지를 한번 가보라고 했는데
갔다 온 다음에도 황희가 이 부분은 민폐기 때문에 후퇴하자고 합니다."
- 박현모(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최윤덕에게 파저강 유역에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명한다.
"세종 15년에 자주 쳐들어와서 이를 격퇴해야겠다 싶어서 총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래서 최윤덕은 평안도 절제사로서 상군보통사를 맡아가지고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만주 야인을 정벌하러 갑니다."
- 박동백 원장(창원문화원)
그러나 정벌을 위해 출정한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토벌대 규모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압록강 곳곳에 흩어진 여진족을 일거에 토벌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경력 최치운을 보내 파저강 토벌에 관해 아뢰다"
- 세종실록 15년 3월 7일
"군사가 만여 명은 되어야 가능할텐데
지금 3천명으로 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신은 심히 염려되옵니다."
- 최윤덕의 글 중에서
"내 마음으로 적다고 생각하였더니 지금 이 글을 보니 과연 그러하다." - 세종
파저강 유역에는 수많은 여진족이 있었다.
만약 조선군이 토벌에 나서면 이들이 연락을 취하여 함께 대항할 것임으로
최소한 1만여 명이 필요할 것이란 게 최윤덕의 주장이었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양에서 보병 1만명.
평양에서 기병 5천명.
드디어 1만 5천명으로 한양 -> 평양 -> 강계 -> 압록강을 건너 혼강(파저강)으로 향했다.
세종 15년의 일이었다.
"조선은 매우 오랫동안 준비했습니다.
4월부터 정보를 모으고 정탐활동을 벌였으며
계속 정찰대를 파견하여 여진족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동시에 병사의 수를 계속 늘렸는데 처음 3천에서 1만,
결국 1만 5천까지 늘려 세 지역으로 나누어 강을 건너 전쟁을 시작합니다.
하나는 이만주의 자이즈,
또 하나는 올라산성이었는데 그곳은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장 유웅지앙 교수 (중국인민대학 청사연구소)
조선군은 여러 경로를 통해 파저강 유역을 공략했다.
한 길은 벽동에서 올라산성으로 향하고
또 한 길은 감동에서 마천으로 향한다.
조선군의 주요 공격 목푱였던 올라산성은 지금의 오녀산성.
바로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다.
세종은 직접 작전을 지시했다.
"강계, 여연의 백성들의 왕래를 비밀히 끊게 하여 소문이 새지 않도록 할 것"
"강이 깊어 건널 만한 곳이 없으면 은밀히 두세 곳에 부교를 만들 것"
"마을과 산천을 엿본 뒤에 토벌할 기한을 정할 것"
"행군시와 출동시 진법을 연습하지 말 것"
- 세종실록 15년 (1433년) 2월 21일
치밀한 작전이었다.
작전은 전광석화 같이 진행되었다.
"야인 참살 170여 명, 생포 236명, 병기 1,200여 점, 말과 소 170여 마리 노획"
- 세종실록 15년 5월 7일
세종15년 4월 10일부터 19일까지 단 열흘간의 작전이었다.
이 공격으로 조선군은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완전히 진압했다.
그런데 이 파저강 토벌에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압록강 이북은 명나라의 세력권, 명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에 세종은 여진족의 약탈을 알리고 명나라의 허락을 기다렸다.
약 4개월후 명 황제는 세종의 계획을 지지한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세종이 알아서 여진족을 치라는 것이었다.
"칙서에 이르기를
"서로 침범하지 말되, 이를 어기면 왕(세종)이 기회를 보아 처치하시오.""
- 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그렇다면 세종은 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또 명의 허락을 얻어가면서 여진족 토벌에 힘을 썼을까?
"두만강 건너편에는 평지가 많습니다.
파저강 그 일대 조금만 넘어가면
강을 건너서 약초라든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함경도 일대에 약탈에 대한 보고를 자꾸 받으며
그 너머 지역 좋은 땅에 대한 확보와,
안정된 농사를 지을 여지를 만들기 위한 동기였다고 보여집니다"
- 박현모
성공적인 파저강 토벌로 안정을 얻은 다음
세종은 함경도 등 북방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관리를 함길도에 보내어 새땅을 찾아보게 하라"
- 세종실록 15년 4월 29일
농사 뿐만 아니라 국방과 행정체계까지 구축하게 된다.
"세종은 그 지역을 가장 살기좋은 땅으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그 지역에 새로 개발된 해시계라든가,
농사기술 같은 신기술요법, 의학기술 등 가정 먼저 전파합니다.
일정한 수가 되면 의사를 파견해서 치료하게 하고
수령도 한 지역에 두 명을 파견케 합니다."
- 박현모
이후 세종은 압록강지역에 4군 6진을 설치,
이 지역을 우리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4군 - 우예, 여연, 무참, 지성.
6진 - 종성, 경원, 회령, 경흥, 부령.
철저한 준비와 작전으로 수행한 파저강 토벌이었다.
그것은 안정된 경작지 확보를 위한 세종의 결단에서 비롯되었고
마침내 우리 영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업생산량 확보를 통해 국부를 창출했던 세종.
이러한 그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게 되었다.
5. 세제개혁을 위해 여론조사 실시한 세종!
<실록>에 보면 세종20년 이후 백성이 굶주렸다는 기록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과제가 있다.
높아진 생산성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 하는데
그 핵심에는 세금제도가 있다.
아무리 생산성이 높아져도 세금제도가 합리적이지 못하면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세종은 세제개혁을 단행한다.
이 행정력을 통해서 합리적인 과세와 징수를 하겠다는 것이 세종의 의도였다.
선진화된 행정시스템을 구축하고 백성들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아니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에 의한 세제개혁 추구한다.
이에 세종은 무려 17년에 이르는 의사결정과정을 거친다.
세종25년 어전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1443년 7월. 15일. 새로운 조세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황희 - "신에게 말하는 자는 모두 공법이 불편하다 하옵니다."
신개 - "신과 말하는 자는 모두 공법이 편하다 하옵니다."
세종- " 두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 다르니 나 역시 결단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조서강 - "공법이 다시 조세를 감액하고 다시 수년간 시행함이 옳을 듯 하옵니다."
세종 - "다시 의논하라."
논란의 핵심은 세금제도였다.
그때까지 세제개혁은 일률적으로 수확량의 1/10를 거두는 과전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전법은 적지않은 문제를 드러냈다.
"고려말에 시행된 과전법은 토지비옥도에 따라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상등전은 면적이 좀 작고, 하등전은 면적이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상, 중, 하에서 똑같이 조미로 30말 거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등전의 경우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불균등한 입장입니다.
침탈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전법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답험손실법'이라고 해서
농사의 풍흉을 현장을 답사해서 정하게 했는데
이때 수령이나 향리들이 농간을 피웠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이러한 배경이 세종이 공법을 제정하게 된 배경입니다."
- 염정섭 책임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합리적인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과정에서 관리들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세금제도.
동시에 백성의 부담을 덜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세제개혁을 세종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고민은 이미 즉위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세종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책문에 공법을 문제로 출제하기도 했다.
"인정전에 나아가서 과거 책문시험의 문제를 내리다
'공법을 사용하면서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세종실록9년, 3월 16일
즉, 새 제도 공법의 좋지 못한 점을 고칠 방안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종에게 새로운 세제개혁은 절실했던 것이다.
경작지 확보와 과학영농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다.
이러한 고심속에서 세종이 구상한 것이 바로 공법이었다.
"공법은 세 가지로 요약을 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주척이라고 하는 정확한 토지측량자를 이용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토지비옥도에 따라 예전에 세 등급으로 나눈 것을 여섯등급으로 나눈 것입니다(전분6등법).
세번째는 해마다 농사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눠서 세액을 거두는 것입니다(연분9등법)."
- 염정섭
세제 공법을 위한 세종의 구상은 치밀했다.
세종11년, 11월 16일.
마침내 세종은 호조에 명령을 내렸다.
"공법의 시행을 논의하고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
만약 이 공법을 세운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 후하게 될 것이고 나랏일도 간략하게 될 것이다.
신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여라."
세종이 가장 유의한 것은 여론이었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 각 도의 감사, 수령으로부터
민가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 세종실록 12년 3월 5일.
나아가 관리들이 직접 백성을 방문하여 여론조사를 하게 했다.
여론의 왜곡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첫 여론조사를 한 지 8개월여 지나 호조에서 중간보고를 올렸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좋다는 자가 많고
함길, 평안, 황해, 강원 등에서는 모두 불가하다고 하다."
- 세종실록 12년 7월 5일.
세종은 여론을 받아들였다.
다시 공법을 의논하게 됐다.
"백성이 좋아하지 않으면 시행할 수 없다.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의 폐해를 구제하는 일들을
백관으로 하여금 수기토록 하여라."
세종이 다시 지시를 내린 지 한달후
호조는 최종 여론조사를 보고했다.
* 호조의 보고서 결론(전국적인 여론조사 결과)
찬성 9만 8,657명
반대 7만 4,149명
- 세종실록 12년 8월 10일
찬성이 우세했지만 여전히 팽팽했다.
논란은 계속 되었다.
지역별 소출 차액을 감안하여 세제를 매기는 것이
마지막 과제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공법을 보완하는데 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마침내 1436년 공법절목을 마련, 부분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세종의 현지답사도 있었으며
백성들의 반대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1443년 전국적으로 공법을 실시한다는 공고를 했다.
무려 17년만이었다.
첫 구상부터 실시까지 이 시간동안 세종은
여론을 묻고 공법을 보안했던 것이다.
1436. 5 황희 등 공법절목 제정
1436. 6 공법상정소 설치
1436. 10 토지등급화에 기반한 공법 제정
1437. 8 삼남지방에만 공법으로 수세 지시
1437. 8 경상도 흉년으로 공법 유보
1438. 10 국왕 현지답사
1440. 9 경상도민 반대 시위
1441. 7 충정도 공법 확정 실시
1443. 11 공법 실시 공고
"15세기초 관련된 각 계층에 여론을 물었다는 것은
이건 아마 세계 역사상 없는 걸로 압니다.
그리고 세종은 새로운 제도를 할 때 급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백성에게 도움이 될지
계속 확인하는 왕정을 펼치는 왕이라는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경복궁 안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것도 가장 표본적이라 할 수 있는데
유교사상속에서도 세종과 같은 리더쉽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자랑거리로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공법 시행으로
토지 1결당 30두의 세금은 최하4두로 낮출 수 있었고
백성들의 조세 부담도 현저히 가벼워졌다.
국고도 쌓여갔다.
국가 비축 곡식도 최고 500만석에 이르렀다.
이는 후대 중종때 200만석, 선조때 50만석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과학영농으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합리적으로 조세개혁을 단행한 세종.
이로써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는 철학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조선 500년은 세종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세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도 나라 경제와 민생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은 민생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탁월한 리더쉽을 보인다.
문제해결을 위한 적절한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신하와 백성들의 의견을 끝까지 수렴했다.
이러한 리더쉽이 있었기에
세종은 갖은 어려움속에서도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는 철학도 실현될 수 있었다.
- 한국사 전(傳)을 읽고
(늘 건강하시고 편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