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연방은 1815년에 성립되었는 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주를 포함함으로써 적어도 민족적인 면에서 완벽한 독일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전반까지는 연방의 일에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였으나, 구성원을 통치하는 데는 거의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장 작은 독일의 주들조차도 독립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고, 프로이센 ( 독일 지배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강력한 라이벌 )이나 오스트리아에 의한 연방의 지배를 막기 위해 서로 연합하였다.
19세기 중반쯤에 이러한 독일의 세력 균형은 정치의식 소유자 들 중에서 민족 감정이 발흥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하나의 정부에 의해 완전하게 통일되기를 바라였다. 이탈리아처럼, 독일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의 방법과 바람직한 정부 형태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좀 더 강력한 연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스트리아 혹은 프로이센 지도하에 연합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으며, 또한 범게르만 연합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고 국민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1848년의 혁명 동안, 독일연방은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둘러싼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독일의 민족주의를 효과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신되어졌다. 같은 시기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의한 독일 통일의 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50년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통일능력이 있어 보이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경쟁관계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오랫동안의 우월권을 점유해 온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기존의 연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보다 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원이 더 풍부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약점은 제국의 다민족적 성격에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최근 혁명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그것의 피지배자 다수는 거의 독일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록 오스트리아의 카톨릭교 신봉은 남부독일의 카톨릭교도들에게 호감을 샀을지 모르지만, 북부의 프로테스탄트들과는 유리되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이점이 있었고 ,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수용할 만큼 그것의 독재적인 전통을 개혁하였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은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을 끌어들일 자산이었다. 프로이센의 가장 큰 힘은 관세동맹(Zollverein)을 통한 독일 경제의 지배에 있었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 발전, 특히 라인란트 지방의 경제 발전은 그것의 가장 큰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