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李麟榮 (1867 ~ 1909)】
"대한제국기 관동창의대장, 원수부13도총대장 등을 역임한 의병장."
일명 준영(竣榮).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생으로 일찍이 대성전재임(大成殿齋任)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시해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천전투에도 참여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가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주,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했으나, 때마침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을 재기, 일부 해산당한 군인과 손을 잡았다. 뒤이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이인영을 찾아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망설였으나, 사사로써 공사를 미룰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원주로 출진,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수가 수천 명에 이르자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는 게 큰 문제였는데, 반역배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9월에는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적극 도와줄 것을 바란다는 관동창의대장 이름의 격문을 전달하였다.
원주는 교통이 불편해 큰일을 도모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판단, 횡성·지평·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으는 데 노력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에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로 모일 것을 촉구했는데, 11월에 격문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장들이 속속 양주로 모여들었다.
경기도의 허위(許蔿), 황해도의 권중희(權重熙, 일명 義熙),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閔肯鎬),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 전라도의 문태수(文泰洙, 일명 泰鉉),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등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방인관이 평안도에서 80여 명, 정봉준이 함경도에서 70여 명을 거느리고 자진하여 참여하였다.
이 때 양주에 모인 의병 수는 약 1만여 명(또는 8,000명)으로, 그 중에 근대식 무기를 가진 진위대 출신 병사와 기타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13도 의병장들의 연합전략회의 결과 원수부 13도총대장에 추대되어, 전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문경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쳤다.
서울진공작전과 동대문전투
1908년 1월 28일, 음력으로는 1907년 12월 25일이었다. 이미 포고문을 통해 서울 진격을 예고한 13도창의군은 양근에서 서울로 진격했다. ‘서울진공작전’이라 불리는 이 작전 목표는 무력을 통한 수도 회복과 각국 공사관에 대한 국권 회복 호소였다.
1만 대군이 행군하는 모습은, 긴 뱀이 기어가는 장사진(長蛇陣) 그대로였다.(1909년 7월 30일 ’대한매일신보') 위풍당당했지만, 전술적으로는 적에게 모든 것을 노출한 패착이었다. 진영 간 소통이 되지 않아, 합류하기로 했던 다른 부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피곤이 누적되고 탄약도 떨어진 상태에서, 창의군은 동대문 30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창의군 병력은 1만 명이 넘었고, 진영이 갖춰지면 참으로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대한제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최후의, 최대의 무장투쟁은, 하지만 패배로 끝났다. 그때까지 도합 38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했던 노련한 부대였지만, 중과부적이었고 예상된 패배였다. 퇴각한 연합군이 한숨을 돌리는데,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대장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중책을 허위에게 맡기고, 나는 귀향하노라.”
총사령관 이인영의 귀향
1908년 1월 28일 고향 문경에서 아버지 부고(訃告)가 연합군 진영으로 날아온 것이다. 이에 이인영은 ‘남쪽을 향해 곡을 하고 장졸들에게 귀향하여 상을 마치겠다고 공포한 뒤 군 전체의 승인을 받지 않고 뒷날을 군사장 허위에게 부탁하고 떠났다.’(1909년 7월 31일 ‘대한매일신보’)
그 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숨어 살다가 다시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으로 옮겼는데,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당시 이인영의 심문을 맡은 한국주차헌병대 대위 무라이 인켄(村井因憲)이 이인영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버지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거듭된 질문에 이인영이 답했다.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다.”(‘통감부문서’8, 1909년 6월 30일 일본군 헌병대본부 이인영 1, 2차 조서) 이인영 또한 선비 기개를 보이며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