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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채홍조 시인의 시세계
미학적 표현성과 미래 시의 감수성
-언어의 설득보다 귀를 통해 듣는 감상의 시
전형철 시인, 문학평론가
채홍조 시인의 처녀시집 『시인의 오두막』원고 뭉치에 온통 눈길이 쏠려 있다. 모두 100 그루의 튼실한 시나무들이 빼곡하게 심겨져 있다. 공들여 가꾸었음직한 그 나무들 사이로 뵈는 풍경이나 사물들이 눈에 익은 평범한 것들임에도 마치 낯선 길로 잘못 들어선 느낌이다.
여기에서 ‘낯설다.’ 함은 단순히 우리의 생활에서 느끼는 생경함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들을 모두 동원한다 해도 어찌된 영문인지 상상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주친 신비한 풍경과 사물 앞에서 오랜 시간 되풀이 해서 읽었지만 아직도 진도는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쉽게 해석될 수 없을 속뜻까지 애써 밝혀내려고 작심하고 그 시편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행위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글자를 압축하거나 혹은 늘리거나 새로운 해석을 붙여서 전혀 새로운 시어(詩語)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그 새로운 시어들은 기존의 시어들과 차별성이 있어야 하며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시어들이어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하여 채홍조 시인은 시에 어떠한 형태소를 부여하여 그만의 독특한 시적(詩的) 향기를 풍기고 있는지 연구해보고자 한다.
채홍조 시인의 시창작의 모티브는 그 출발점이 자연이다. 자연의 질서와 그것에 준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은 그의 시작법의 원동력이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풍경을 벗삼아 보릿고개를 온몸으로 체험한 그는 우리가 망각하고 소홀히 하기 쉬운 작은 것들에서부터 미세한 음성을 들으며 몰아일체의 경지에서 자연과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한다. 자연은 원초적 가치 창출의 광활한 근원지이며 시상(詩想)의 무한한 저장소다. 자연을 대하는 작가들의 성향에 따라서 거기에서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꿈틀거리며 시적 표현의 욕망들이 손짓을 한다.
시인은 들녘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자연물들의 생동하는 환상의 하모니에 취해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작가의 동향은 자연이 인간 존재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거기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며 자신도 그 일부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며 서정적 자아는 자연과의 ‘동일성(identity)’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시 쓰기의 첫째 희생자는 언제나 실재하는 개념이나 관념이다. 시인은 시에서 쓰고자 하는 고정된 실재 개념을 인식할 수 없기에 시를 쓴다. 시는 사라지기에 창작된다. 개념이란 이미 철학이나 의미로 정리된 산뜻한 의미의 표상이다. 실재란 신이나 최고 존재로 통칭하는 절대 관념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은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나 관념, 대상을 위해 끊임없이 시를 쓴다. 개념이 없는 시에는 의미의 지도 또한 없다. 당연히 시인의 의식이 걸어갈 지형이 문자나 기호로 정착되지 않는다.
시인의 언어 전쟁은 지도 없이 시작되고, 지도를 태워버림으로써 창작이라는 전쟁을 마감한다. 다만, 시인은 시 의식의 사진기로 자기 눈앞에 보이는 물상과 인생이라는 전쟁의 혼동과 고요한 파멸의 제반 형식을 자신의 이미지로 찍어낸다. 자기 언어의 색채화를 사진 찍듯이 기록해 놓는다. 두 눈이 하나로 초점 되며 대물렌즈와 대안렌즈의 역구도적인 빛의 굴절, 사유의 각도, 시각의 편광에 의해 시적 상(像, image)을 재창조한다. 이때 시인의 사진기, 영상의 의식에 잡히는 시적 대상은 모두 시각적 이미지로 태어난다.
채홍조 시인의 시각에 포착되는 은유와 환유의 지형도 위에 다시 중첩되는 영상이 음악으로 흐른다. 그의 시에는 기타 현(鉉)의 울림소리가 고요히 그러나 강렬하게 울린다. 또한, 그의 시상(詩想)의 이미지가 퇴적시키는 최저 심층에는 자연과의 소통에 있다. 아직 미발굴된 상태이지만, 아라베스크 직물처럼 얽혀있는 미학적 이미지가 고요히 고래 같은 숨을 쉬며 언젠가 수면 위에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그의 시 의식의 단층에는 채색된 유리상자에 한 켜 한 켜씩 물든 의미의 모래층이 쌓여 있다. 물기에 젖은 수족관의 단면도가 아니며 사막의 메마른 모래층의 흩날림도 아닌 지적 언어의 사유의 깊이와 고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만물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진리이다. 채워짐이 있으면 비워짐이 있고,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늙음이 있는 법, 채시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관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현장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마다에 있고, 그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바쁜 일상에 쫓겨 지나쳐버리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생각조차 꺼릴 일들을 놓치지 않고 곱씹어 보는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이 부럽기도 하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세계에 대한 관심의 넓은 폭 만큼이나 그가 만들어내는 시의 형태 또한 다양하여 이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서정시를 폭넓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생명 없는 것이 무엇이더냐
흐르는 강물도 부는 바람도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마저도
그저 생겨난 것은 없을 것이니
이 얼마나 오묘한 우주의 섭리인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요
움직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진실을 모르겠는가.
웃고 있다고 늘 행복한 것이 아니듯이
슬퍼서만 눈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옷깃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
나에게 길을 물어오는 저 사람도
어느 생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무슨 일이나 때가 있고 인연이 있다.
어떤 연을 맺는가는 자신의 선택일 뿐.
결과 또한 큰 차이가 있고 나의 몫이다
매 순간순간마다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 삶
지나고 나면 항상 미진한 그 무엇
채울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아린 그리움이다
[이 세상에] 전문
이 시집에는 채홍조 시인의 미학적 표현성과 미래 시의 감수성을 나무에 새순 돋듯 마음껏 올려 놓고 있다. 이러한 시의식과 표현성을 상고해볼 때, 그의 시집은 전체적으로 사실주의보다는 낭만주의에 더 근접하고, 저항적 참여의식보다는 몽환적 딜레땅뜨(dilletente)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입을 통한 언어 설득보다는 귀를 통해 듣는 감상을 전제한다. 혀가 아니라 눈으로, 시어의 화려한 얼굴이 아니라 수수한 마음으로 독자를 설복, 감화시키는 접근을 알고 있다. 따라서 독자도 그의 혀와 마음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들어야 한다. 그의 탐미적 언어 구사력과 전복적 상상력은 눈감고 내음 맡으며 고요히 명상할 때 산처럼 다가오는 문장과 수사력에 아름다운 감동을 느낄 것이다.
그의 슬픔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에서 슬픔은 모든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끄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태우는 불길로부터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킬 수'는 있는 힘이다. 잘 갈고 벼려서 예리한 무기를 만드는 슬픔이 아니라 살벌한 세상에서 최소한의 사랑을 지키내는 착한 슬픔, 어둠을 몰아내는 강력한 무기로서의 힘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사랑을 지키는 방어적인 힘인 것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성찰이 그의 시를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얼어붙은 겨울에도 파란 잎 떨구지 않고 시적 성취를 일구겠다는 시인의 마음으로 부활한다.
사십 년 만에 만나게 된 소꿉친구
인생의 고운 계급장 위에
어렸을 적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온다.
열세 살 소녀였던 내가
장대 같은 아들을 인사시킨다.
카랑카랑한 낮선 목소리
햇볕에 반짝이던 파마머리 사이로
스치는 희끗희끗한 바람과
지천명(知天命) 넘긴 나이테가
퇴적암처럼 쌓여있는
세월의 더께 위를 어지럽게 맴돈다.
뻐꾹새 진종일 우는 산길 따라
십여 리 길 함께 뛰어다녔던 학교
아지랑이 노랗게 걸려있던 하늘가
종달새 노랫소리만 바람에 나부끼고
호미 잡고 김매던 갈퀴 같은 손마디에
옹이처럼 맺혀있는 치열한 삶의 흔적
살며시 들추는 빛바랜 가슴
시계는 거꾸로만 쉼 없이 돌아간다
[친구. 2] 전문
시인은 결코 우리에게 절망과 음울함만을 주지 않는다. 하여 시인과 독자의 소통은 원활해진다. 반드시 희망의 메시지로만 소통이 원활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소통의 여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은 전체적으로 희망을 조망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의 슬픔을 자아로 끌어들여 정제하고 가다듬은 다음 호소력 있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어서 공중의 번개와 같고, 굽지 않은 질그릇, 빌린 물건, 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 모래로 된 기슭과 같다."라고 했다. 번뇌를 지우고 삶의 향수만을 남겨 영혼의 빈 그릇에 깨달음의 진리를 담겠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이미지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즈넉한 시세계의 메아리에 이끌려 오는 풍광이 되고 있다.
예시의 특징을 한 마디로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 진정성과 묘사의 시학이라 부르면 어떨까. 작품의 내용으로 보면 진정성의 시학이요 표현으로 보면 묘사의 시학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의 작품에는 '~체'하는 꾸밈이나 엄살이 없다. 우리 시단에 엄살과 과장의 수사적 발림으로 가득찬 시가 얼마나 무성한가 시적 화자가 세상사 시름을 잊고 가슴에 들이치는 삶의 아픈 편린들을 외면 하려는 것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풍경들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이 얹어놓고 있다. 입심이 대단하다고 할까, 점층적 반복의 전개방식과 문장의 뜻을 점점 강하고, 크고, 높게 하여 마침내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수사법이 이 시의 긴장미를 더 하고 있다.
내가 당신의 십자가였나요
당신은 나의 굴레였다오.
우리 서로 사랑이란
멍에를 씌우고
집착이란 족쇄로 채워
거미줄 같은 믿음으로
행복이란 착각을 짊어지고
힘겹게 부대끼며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삭풍 불어오는 언덕에서
잃어버린 자아가
목마르게 그리운 날
허기진 모퉁이 길에 주저앉아
마침내 나의 영혼은
연기처럼 하얗게 사위어
허공으로 흔적 없이 흩어지고
시리디 시린 가슴은
피눈물로 녹아
강처럼 흐르겠지요.
그리하여 우리의 끊을 수 없는
동아줄 같은 매듭도
드디어 삭아 내리겠지요.
내가 당신의 십자가였듯이
당신은 나의 올무였다오.
[내가 당신의 십자가였나요] 전문
예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막연한 사랑이 아닌, ‘아픈 마음’과 ‘슬픔’으로 인하여 베푼, 말하자면 최고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하면 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근원이 된 원동력이 한 마디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도 말의 수준을 넘어서서 말 중에 으뜸인 말인 "말씀’, 곧 ‘성경’의 실천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디 우리말의 ‘말씀’은 ‘말ㅁ→말ㅁ’을 거쳐 온 어휘였으니, 그 중 ‘ㅁ’은 현대어의 ‘길삼’ 같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일정한 재료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나 물건의 뜻이니 여러 단어를 어법에 맞도록 늘어놓아 화자의 사상 감정을 효과적으로 뭉뚱그릴 수 있도록 한 비교적 긴 언술(言述)의 뜻이었다. 그러나 [어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와 같이, 이미 세종 당대에 말의 높임말로 굳어졌으니 이 뜻에다가 ‘지상에서 최고로 이치에 맞는’이라는 어감(뉘앙스)이 가미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시인의 시문학의 최종 목적지는 신앙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를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等價物)”이라 했다가, 기도(祈禱) 쪽으로 바짝 다가서서 [재(灰)의 수요일]을 쓴 T.S.엘리엇".과 겹쳐지는 가닥도 보인다.
너와 거리는
직선으로 뻗어 있지만
좁힐 수 없는
딱 고 만큼의 간격
마주 보지 않아도
우린 닮은꼴
반대편만 바라보며
한 치 양보 없이
힘겨운 줄다리기
늘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불안한 동거
[나침반] 전문
자연과 조화, 합일의시상은 하나의 생명에 물줄기로서 그의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인생 경륜에서 터득한 성찰과 깨달음에서 독자들에게 이성의 눈을 뜨게 하며 진실한 인생 좌표까지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욕과 탈속의 정신은 지난한 삶의 역경에서 터득한 초월자의 모습이다. 시의 일의적 대상은 표현이지만 그 표면을 돌아서 후면에서 진입할 때는 의미가 ‘살아나고-죽는’ 편차로 인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저쪽에 있는 사물 사건은 대상이 아니다. 저것이 지닌 의미는 넘침─사물은 스스로 말하고 활동한다─을 시인이 감지하는 순간 그는 암담한 낱말의 숲을 빠져나와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총명은 이와 같은 사물과의 접촉을 통한 제이의적인 언어에 의해 강화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사물들을 보다 밝은 햇빛 속으로 들어올려 빛나게 만드는 것이다. 총명은 정신이므로 그의 문맥을 살리기는 상상력 호기심 따위의 자극이 아닌 뼈아픈 상처와 더불어 끊임없이 고뇌한 흔적이다.
작고 단단한
한 알의 순정한 씨앗 속에
창대(昌大)한 푸른 꿈 품고
오직 대지의 품속에서
태양과 비와 바람으로
큰 포부를 이룰 수 있는 것
견고한 우주 안에서
무한수열(無限數列)의 염원 보듬어
신비의 생명 점지하는
위대한 신의 지미(至美)함이여
인간이 창조할 수 없는
오묘한 생명의 섭리(燮理)
온통 푸름으로 빛나게 펼쳐놓고
다음 세대를 여는
만고(萬古)의 역사를 쓰고 있다
[씨앗] 전문
예시에서 보이듯 이러한 시적 개성이 그의 서정적 주체성을 독특하게 드러낸다. 그의 시를 통해 서정적 세계관의 핵심을 보려는 독자는 이 시집을 천천히 그러나 맛깔스레 탐독하여야 한다. 특히 시인 밖의 세계를 자아화 시키려는 동화기술과 자아를 세계화하려는 투사기술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독자는 이 시집에서 현대시의 서정적 주체성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그의 주체적 서정성은 시의 사유와 시어가 동시 복합적 의미의 위상과 층계를 오르내린다. 타 시인들이 물들이는 언어성과는 완연히 다른 사유의 깊이와 축적도를 제시한다. 자아반성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찰로 사라지는 생의 한순간을 적확, 명쾌, 기질적 언어로 포착해내는 능력이 시인다운 품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심상의 구도는 “기차 여행.”에서도 발견된다.
설익은 꿈 가슴에 품고
낯선 풍경 속으로 떠나온 고향,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중략...........
햇살 눈부신 강어귀 돌아
어두운 터널 힘겹게
벗어날 때마다
............중략...............
노을 비켜 앉은 평행선 위로
졸린 눈감기 듯,
어스름 젖어들고
헤어짐과 만남의 경계 그 어디쯤
.............중략.................
[기차 여행]
위기의 시대, 그 상실과 번민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며 탐구해 가는 시정신의 발로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불합리성과 부도덕, 불신과 파괴 등으로 상처받은 인성을 회복하고 실종된 자아를 정립하여 부재의 상황을 탈출하려는 극복 의지이며 시인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설익은 꿈 가슴에 품고/낯선 풍경 속으로 떠나온 고향,/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 // 1연 중에서
"햇살 눈부신 강어귀 돌아/어두운 터널 힘겹게/벗어날 때마다// 2연 중에서
"노을 비켜 앉은 평행선 위로/졸린 눈감기 듯,/어스름 젖어들고/헤어짐과 만남의 경계 그 어디쯤//. 3연 중에서
시인의 시 냄새는 옷에 배지 않는 오드비(eau-de-vie). 타지 않는 촛불 심지 불꽃 내음. 향수인 듯 맡아지고 은은하게 사라지는 뒷맛이 좋다. 그의 시풍을 몽환, 환상, 현실로 묘사할 수 있으나, 너무 일차적 정의인 듯하다. 그의 이차 관문 즉 내성은 바람(風, fashion)으로 들여다 볼 산상 요새가 아니다. 그의 함축적인 표현의 묘와 역동적 심상과 시적 형식이 둘러쳐진 시의 궁성은 상징적 언어 수풀이 그윽한 반곡(盤谷)에 숨어있다. 주체가 자신과 세계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성찰과 자신이 속한 세계의 외부로 나아가는 바깥의 사유를 위한 수단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인에게 세상은 빛의 속도'로 통과해야 할 생의 속도를 실제의 감각으로 체험하는 일이며 존재의 리듬을 몸과 정신의 화음으로 향유하고 살아내는 일이다. 채시인에게서 시는 생명체인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의 상징인 것이다.
산 능선과 하늘의 선계
금빛 사다리 걸쳐있는
황금 꽃밭 거니는 이 뉘신가.
눈부신 황홀감
총총 천상의 계단 올라
새로운 세상 보이시는가.
무수한 사고의 편린 반짝이는
태양의 마지막 피날레
있는 힘 다하여 빛을 발하는
그대의 위대한
외길 생이었는가.
[석양] 전문
시인의 작품세계에 드러난 또 하나의 커다란 시맥은 ‘긍정적 삶의 자세’이다. 흔히들 흥미로운 미적 결과물을 추출해 내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출발하라고 한다. 사물에 대한 비판적 능력이 새로움의 창작 결과물을 창출해 낸다고 보는 관점이다. 채시인의 경우도 척박한 현실에서 비판적인 안목을 지니고 글밭을 일구어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글밭을 일구어 가는 그의 작시법은 현실에 대한 증오나 비판보다는 역발상의 원리로 긍정과 감사의 향기를 풍긴다. 시인은 예지력의 소유자이다. 자연에서 인간과 관련된 의미를 찾아내고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생명력이 갖는 관련성을 거침없이 작품 속에 옮겨놓는다.
우윳빛 안개 피어오르는 날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구름 속에 서있는 듯
순백의 세상 속으로 빨려 든다
서리꽃 눈부신 면사포 쓰고
선잠 깨어나는 소나무 아래
연미복 차려입은 까치들
해맑은 노래
푸새 위에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갈참나무 잎
바삭거리는 산길 따라
대 숲을 흔드는
한 무리 박새, 재재거리며
은도금한 하얀 숲 속으로 녹아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고개 숙인 억새 헝클어진 머리
삭아 주저앉은 관절마다
바래 서걱대며 부러진 날개 위에
서럽도록 아름다운 별빛으로 내린다
[상고대] 전문
시인의 가슴에는 늘 시심의 불이 켜 있다. 주옥같은 시편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미루어 남몰래 시에 대한 습작수련을 은밀히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작시의 달인, 언어의 조련사 다운 품성을 지니고 있다. 채시인의 심중에 들어오면 나무도 숲도 흙더미도 보잘것없는 무지렁이도 모두 생명이 붙어 숨을 쉬게 된다. 채시인의 시작노트에서는 이러한 다스림의 미학과 달관의 심성이 시적 자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청아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상 전개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여 허상에서 희망을 창출해 내는 긍정적 인생관에서 우러난 결과이다. 흔히들 문학가가 되려면 시골출신이 유리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향토적 서정과 순수한 시상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아무래도 대자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채홍조 시인이 버려진 것들에서 새생명을 발견해 내는 것과 같이 시인은 ‘나무그늘의 뼈’까지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돌에서 피를 뽑아낸다’는 김수영의 말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도 생명의 원형질을 추출해 낼 때 작품의 가치는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다만 시어의 절제와 긴장미의 창출, 상징적 비유와 풍자적 수법의 도입, 변증법적 부정미학의 추구 등은 앞으로 시인 자신의 시적 역량으로 확대해 나아가야 할 과제이다.
제부도 바닷길 가르는 모세의 기적
들고 나는 바람에 실려 가는 눈길
초록 우산 펼쳐 들고
종일 비릿한 해풍에 통통 살 오른 섬들
희뿌연 해무에 젖어 졸고 있는 오후
황량한 가슴에 흐르는 작은 물길
바람인가 근심인가
저건 바다가 아니야
몸져누운 겨울의 병색 짙은 신음
벌거벗은 회색빛 외로움이야
[섬] 전문
그의 시에 센티멘탈한 마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감각적 이미지의 특성을 많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추구하는 표현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아주 극대화되면서 감상적 정서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시에서 아직 현실과 상상의 동일화, 주.객관, 또는 이성과 감성의 구분조차 일어나지 않는 명징한 서정세계, 상상적 동일화로 자아와 세계가 조화로운 일체감을 보여주는 서정 세계관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면이 있으나---이는 어느 시인이나 더욱 추구해야 할 요건이다--- 언어의 기교성과 풍요한 시적 사유와 구조를 만개(滿開)시키고 있다. 단순히 감각적 표현과 자연 동경적 심리 표현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점이 그의 가치를 예측케해준다.
수양버들 석양에
긴 머리 빗어 내려
산과 어우러진 구름 서너 장
찰랑대는 물속에 누이고
물주름 사이 어스름 젖어들어
졸고 있던 나트륨 등
요염한 얼굴 붉히며 불기둥 일렁일 때
한가로운 오리
달빛 가득 싣고
교교한 물 위 서성이다
깊이 가늠할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든다
명징한 가슴 가르는 물새 한 쌍
바람의 숨결도 향기 머금고
뽀오얀 안갯속
연둣빛 꿈 잉태하여
살포시 봄을 산란하고 있다
[호수] 전문
예시 [호수]에서는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당연한 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하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직관력을 필요로 한다. 위의 시는 회화적이다. 1연과 2연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 무렵의 풍경. 어떤 길을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 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을 남기는 길의 세계를 지향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예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4연으로 넘어가면서 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곧 “교교한 물 위 서성이다 -3연3행 /살포시 봄을 산란하고 있다-4연5행 ,” 라고 말함으로서 길 위에 얹혀지는 객관적인 풍경이 지극한 교감으로 바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투사로서의 상상력은 한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진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퇴색한 단청 어우르는
겨울 햇살
앙상한 잔가지에
산사의 맑은 바람소리 일구다.
침묵의 시간 쪼아대던
까만 굴뚝새 한 마리
푸른 지붕 위로 날아오른다.
검버섯 덕지덕지 피운
풍만한 청동의 항아리
무거운 울림을
여운으로 길게 끌며
천상(天上)의 소리인 듯
우레처럼 쏟아낸다.
목어(木魚)의 빈 가슴을 훑는
파문의 메아리
돌탑을 휘돌아
대나무 숲 흔들며
창공으로,
학처럼 날아오른다.
[산사에서] 전문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꾸미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이미지를 다시 만드는, 이를테면 이미지 왜곡 같은 재생성의 능력이라고 바수라르도 주장하였다. 이점으로 봐선 채홍조 시인의 창작은 언어생성과정 전반에 걸친 이화작업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어떤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작업, 그리고 애써 승화시킨 이미지를 모조리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작업의 모든 것이 개개의 시인이 머리를 앓고 있는 화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검버섯 덕지덕지 피운/풍만한 청동의 항아리/무거운 울림을/여운으로 길게 끌며/천상(天上)의 소리인 듯/우레처럼 쏟아낸다./목어(木魚)의 빈 가슴을 훑는/파문의 메아리.”로 은유하는 시인의 눈빛이 경이롭다. 이는 채시인의 심상에 내재된 날고 싶은 욕망의 근원을 암시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퇴색한 단청 어우르는/겨울 햇살/앙상한 잔가지에/산사의 맑은 바람소리 일구”다. 로 승화하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지나왔다는 암시를 정황적 증거로 포착 할수 있다. 100편의 적지 않은 시편 가운데 으뜸의 절창이요 가편이라 주저 없는 찬사를 보내며 "산사에서".와 연계선상에 놓인 또 다른 시 한 편을 만나본다.
어느 능선에서 놓쳐버렸던
네 차가운 손
잊혔던 그 아픔 떠올라
생인손 욱신거리듯 가슴이 저려온다
하얀 백발 빗어 내린
메 山 자 선명한 봉우리들
주름진 갈피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아린 기억
무거운 바윗돌에
짓눌리는 어깨
버거운 삶
우직한 그대 품에 내려놓고
눈발처럼 흩날리는 일상
한계령의 날 선
칼바람에 날려버리고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수묵화
네가 되고 싶었다
[한계령] 전문
문학은 한 시대에만 읽히지 않는다. 시대를 뛰어 넘는 성격을 가진다. 그것이 작가의 초월성이라고 불리며 작품의 완결성에 의해 대대로 전해진다. 문학은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반영한다. 작품이 독자들에게 정서적 반응을 요구하며 결국은 독자를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는 사실은 문학 작품과 독자와의 상관관계를 더욱 자세히 분석게 한다. 어떤 작품들은 아무런 준비나 훈련 없이도 독자들을 충분히 즐겁게 할 수 있다. 가령 민요나 민요에 버금가는 시들이 그렇다고 할 때 채홍조 시인의 시편들이 그에 근접해 있다. 운율를 갖고 있으며 인구에 회자 되어 오는 전통 가락의 율격에 접해 있음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하얀 백발 빗어 내린/메 山 자 선명한 봉우리들/주름진 갈피마다/촘촘히 박혀있는 아린 기억--- 2연
"칼바람에 날려버리고/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수묵화/네가 되고 싶었다// --- 4연
서경의 중심에서 서정의 언어미학으로 그리고 다시 민족 정서의 근원에 뿌리인 정한에 가닿은 채 시인의 시편을 대해 왔다. 채홍조 시인 시의 특징은 곧은 관찰과 시름없는 표현이다. 온화한 마음가짐으로 사회를 볼 수 있고 화자가 보아온 사회와 사물을 바탕으로 하여 아무런 구속 없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4연의 리듬은 흡사 민요 한 구절을 대하듯 다정다감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 속에 내포된 은유는 회한으로 얼룩진 눈물의 비가이며 서슬이 져 있다.
하늘의 경계 너머
골 깊은 이랑으로
서러움 짙게 고일 때,
초라한 내 모습 감싸주던
결 고운 목소리 있었다
정제된 강물소리는
결대로 쪼개져
낮은 음계로 흐르고
은하수 헤집는 작은 새 한 마리,
모로 누운 미소가 서글퍼
묻힌 기억의 표피 할퀴던
바람소리만 밤새워 들이키고
불면의 창가에 나앉아
핏빛 울음 토했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었던
황폐한 마음밭에
황사 머물던 밤
엄마처럼 품어주며
휘영청 내 가슴엔 달이 떠올랐다
[가슴에 뜨는 달] 전문
노을 지고 땅거미 내리는 거리
빨강 파랑 네온꽃이 하나 둘 피어난다
질곡의 어둠 속으로 붉은 나트륨 등
일렁이는 설렘을 세상에 드리우고
덩달아 빌딩 숲으로 돋아나는 불빛, 그 입술들
강물 위로 흐르는 또 다른 강 하나
두 눈에 불 켜 달고 다리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끝없는 귀가 행렬은
아우성으로 흐르는 또 다른 강물이다
지친 철마가 덜컹거리며 곤한 군상들 빼곡히 싣고
눈 부릅뜬 채 비명을 토한다
긴 평행선 위에 널려져
어둠 가르는 하루의 곤한 여정
고스란히 걸머진 그 어깨가 무겁다
하루의 사슬 어둠 속에 풀어놓고
둥지로 돌아가는
행복한 날갯짓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일상을 접는다
[하루를 접으며] 전문
"가슴에 뜨는 달".과 "하루를 접으며". 예시와 같이 정갈하고 속이 꽉 찬 작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요란하고 어지러운 언어의 수풀을 오래 헤매야 한다. 그의 시는 언뜻 전통 서정시의 문법에 충실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전통시의 주요 방법인 동일화의 원리와는 궤를 달리 한다. 그는 예민한 자연 관찰과 꼭 알맞은 연상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는 사는 데 그런 것처럼 시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의 시는 욕심을 넘어서 있다. 그의 시편들에서는 난해함과 암호화된 시적 경향에서 벗어나 담백한 시의 맛을 선사한다. 정갈함이 묻어나는 채홍조 시인의 언어는 자연사와 인간사의 유추적인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을 따로 구분짓지 않으며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연을 관찰하여 이를 시적 언어로 승화시켰다. 일상 밖의 꿈을 단념하지 못하고 유선형으로 흐르고 있는 관념 속에서 진정한 내 시간의 흐름은 숨겨온 “자의식의 부활.”을 진술하고 있다. 흐르는 계곡물처럼 요란한 반복되는 여정을 벗어나고 싶은 화자의 심중에 담긴 묵언이 도사리고 있다.
문학은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정서적 반응을 요구한다. 그 정서적 반응은 즐거움, 안도, 분노, 놀라움, 혐오 등의 여러 가지를 포괄한다. 대체로 작품에서 화자가 인생에 대해서나 현실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공감을 형성했을 때, 독자들은 안도와 기쁨을 느낀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창작,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슬픔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시인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의 열망 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게 한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그 바람을 언제라도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런 유성의 낙하 앞에서 간절하게 그 바람을 간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바 이루어지길". 언제라도 기원할 수 있는 그 갈망, 그 열망이야말로 희망을 현실로 바꾸는 원동력이다. 그 갈망이 있을 때에야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다.
시라는 것이 우리 전체의 존재를 위해 반드시 호명되어야 할 어떤 위대한 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언제나 시라는 것은 문학과 관련된 더 거대한 근원의 일부분이라 믿어 왔다. 문학은 인간과 문화, 그리고 그런 거대한 활동의 일부분으로서 단순히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문자적 구축물이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예술적 표현을 가능케 한 모든 근원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자연을 조각내고 부품화한 근대의 인공성과 이성 뒤에 배경처럼 놓여 있는 영혼과 신비를 문학이 가져오길 바란다. 또한 우리의 시가 수식하는 언어가 아니라 수식 받아야 할 ‘그것’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이론과 관념의 유혹을 이겨내고 다시 자연의 심장에서 솟아나온 말들로 채홍조 시인의 詩田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말미에 표재시 "시인의 오두막".을 감상하며 평설을 마치고자 한다. 다시 한번 처녀시집 "시인의 오두막". 상재를 축하드린다.
시인의 오두막
채홍조
하늘 모퉁이 돌아서면
바람의 숨결마저 향기롭다
반기며 뛰어오르는
메뚜기 여치 개구리
매미들의 합창소리
고추잠자리 군무가 우아하다
황토 흙으로
조그마한 오두막 지어서
사철나무 빙 둘러 울타리 치고
큰 은행나무 하나 보초 세워
아치형 대문에는 포도덩굴을 올려줘야지
그 옆에 작은 연못, 수영하는 비단잉어
연꽃 피어 향기로우면
구름 몇 장 띄워두고
소나무 벤치에 쉬어 가는 바람
하우스 속에 허브와 분재들의
다정하고 고운 이야기소리 들려오겠지
나를 아는 여러 문우님들
가슴 시려 고향으로 바람 부는 날
언제든지 찾아와 깃들다 가시구려.
무공해 야채 뜯고 과일 몇 개 따
솔잎 주 한잔 기울이면서
자연과 시와 인생을 이야기하며
한밤을 밝혀도 넉넉하고 푸근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