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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이 옛길 산행기
괴산 ‘산막이 옛길’ 주변 산행에 참가하기 위해 교대역으로 갔다. 오늘 그곳에서 전국건축사등산동호회 행사가 열리기로 되어 있다. 카페 게시판에 이번에 가는 장소를 소개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이라고 소개를 해서 마음이 동했는데, 다른 때와 달리 유명한 산이 아닌 ‘길’ 이라고 해서 관광유람을 가는 것 같은 의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곳이라면 분명 특별함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7시 예정대로 교대역을 출발했다. 구름이 끼어 있고 오후에 그 지역에 비소식이 있어 제대로 그 진면목을 대할 수 없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근래 진행 중인 일이 어렵게 꼬여있어 이번 산행에 참가할 마음에 여가가 없어 망설였는데, 이럴 때일수록 맑은 자연의 기운을 쏘이며 피로를 씻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8시 45분 산막이 옛길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휴게소를 들리지 않아서 그런지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전국 각지의 건축사 등산동호회 회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예정에다 평소에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다고 하는데 일찍 도착해 출발하다보니 마음이 한가로워졌다.
들어서는 입구에 불로문 같은 형태로 바람을 채워 만든 게이트가 서 있었다. 거기에 “산막이 옛길 방문을 환영 합니다.” “청정괴산! 전국최고의 자연 생태길” 같은 문구가 눈에 띠었다.
전에는 이런 깊은 산중 마을 사람들이 번화한 도시와 비교해면서, 스스로 오지에 사는 촌사람들이라 여기며 가난하고 고단한 시름을 한탄하듯한 표정이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자연 생태길’ 같은 의미를 내세우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반갑게 여겨졌다. 그리고 이런 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에서 자연에 대한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세태를 읽을 수 있다.
괴산은 큰 산세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북쪽에는 성불산(532) 동측에는 속리산을 지나 북쪽으로 지나는 백두대간 줄기 상에 청화산984), 대야산(931), 장성봉(915), 칠보산(778), 바분봉(776) 등이 놓여 있는데, 인근에서 가장 큰 산은 대야산으로 내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20여회나 로프를 잡고 오르내렸던 험산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사랑산(647)이 있다. 우측 백두대간 너머에는 문경이 있는데 괴산과 문경을 백두대간이 가르고 있다. 괴산(槐山)의 괴(槐)는 느티나무 괴자로 이 고장 명칭은 느티나무가 우거진 산중을 의미하며 계곡을 따라 좁은 평야가 드문드문 발달해서 삶의 의지처를 이루고 있다.
오늘 걷고 있는 ‘산막이 옛길’은 칠보산 서측으로 흐르는 달천 언지리 지점에 위치하는데,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로 주민들이 달천변(達川邊)을 따라 다니던 십리 옛 오솔길이다. 산막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산이 막아섰다는 뜻이다. 괴산댐이 생기기 전만 해도 달천은 수위가 낮아서 돌다리나 섶다리를 놓고 마을 간 왕래를 할 수 있었지만 괴산댐이 생기면서 거대한 호수가 생기게 되었다. 이 달천의 물은 조선시대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 등과 함께 "조선 3대 좋은 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남한강 지류인 달천강(達川江) 좌안 직하류부에 1952년 11월부터 1957년 2월 사이에 국내 최초로 우리 기술로, 6·25의 폐허에서 경제부흥의 원동력인 전력증산을 위해 2,600㎾의 수력발전 댐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그 댐이 건설 되면서 원래의 ‘산막이 옛길’ 과 노수신이 거처하던 수월정(水月亭) 등 원래 자연화경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의 자취와 유적 등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 인근 강 건너 갈은 마을에는 연하구곡(煙霞九曲)이 있는데 원래 모습은 괴산댐에 의해 물에 잠기었고 노수신의 10대 후손 노성도가 지은 연하구곡가가 남아 있어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산막이로 통하던 길의 기억도 함께 수몰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잊혀졌던 ‘산막이 옛길’이 2007년 같은 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으로 복원되었다.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됐던 옛길의 흔적을 찾아 산책로로 조성한 것인데 제주 올레길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둘레길로 자리 잡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역사문화생태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관광명소화하는 사업인 사진 찍기 좋은 명소 25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이 길과 연계한 충청도 양반길이 개장되었다.
산행을 시작했다. 언덕을 넘는 곳에 탐방안내소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일행이 모여 안내도를 보고 있자니 건물 안에 있던 직원이 나와 코스를 설명해 주었다. 조회장이 대한건축사등산동호회 집행부 임원들과 만나 인사를 하고 출발하지고 해서 정자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벤치에 앉아 앞에 보이는 풍광을 스케치 했다. 거기서 보니 괴산호와 오늘 돌아볼 전체 산세 윤곽이 나타나 보였다.
스케치를 마치고 서둘러 출발했다.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었다. 연리지나무 근처에서 한 여성분이 작은 돌탑에 돌을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진지해 보였다. 옆을 지나쳐가다가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물어보니 안전을 기원했다고 한다. 내가 다시 아들 낳게 해 달라고 한 것 아니냐고 하니 옆에 섰던 남편분이 아들을 다시 넣어 달라고 했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면서 보니 대구에서 온 우리 건축사 회원이어서 다시 인사를 했다.
오름길을 넘어서니 출렁다리가 보였다. 약 100m 정도 길이에 로프에 매달은 출렁다리가 걸쳐 있는데 사람들이 조심스레 건너느라 지체가 되었다. 남자들이 가끔 일부러 발을 굴러 출렁거리게 해서 앞뒤로 가던 여성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호기심에 모두 그 공중다리위로 지나려 줄을 서고 있었다.
조금 가다보니 등잔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왔다. 좌측으로는 호숫가로 가는 산책로가 놓여 있었다. 우측에 놓인 산세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경사가 급했다. 오름길을 걷다보니 점차 시선이 높아지면서 호수쪽 시야가 시원스레 트여보였다.
10시 30분 등잔봉에 올랐다.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돌아보니 괴산호 가운데 부분에 안내판에 있던 한반도 지형이 보였다. 가족과 친구 등 각기 여러 곳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산을 오르며 흘린 땜을 식히고 사방을 돌아보며 즐거운 표정을 띠었다.
거기서 괴산호 풍광을 그리다 보니 좌측에서 충북건축사회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박성식 충북건축사회 전임 회장이 나를 향해 술 한 잔 하라고 권해서 그리로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충북 건축사회원들은 몇 번 서울 회원들과 월악산과 북산한 산행등 서로 교환 초청 산행을 함께 해서 친분이 쌓였다.
먼저 자리를 떠서 천장봉 쪽을 향했다. 조금 내려서다 보니 제주 회원들과 서울 회원 몇 분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제주 회원들도 전에 제주도 한라산 산행 때 동참하고 친절히 베풀어 주어서 친분이 있었다. 요새 그 곳에 개발 열기가 한창이라는 소식을 떠올리며 덕담을 건냈다. 한 회원 가족 분이 직접 갖고 온 거라며 권하는 흙돼지고기 한 점을 새우젓에 묻혀 먹고 길을 나섰다.
다시 조금 가다보니 길 우측의 평평한 공터에서 대구 회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회원들이라 반갑게 인사를 하니 거기서도 술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여 둘러보니 한 쪽 자리에 아까 보았던 이강언 회원이 시원한 맥주 한잔을 주어 한 모금 받아 마시고 다시 길을 걸었다. 다시 안부를 지나 능선을 오르다 보니 울산에서 온 회원 한분이 길을 물었다. 계속해 능선을 넘어서니 서울 회원 가족 몇 분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시 능선에 올라 한반도 전망대에 도착하니 인천 건축사등산동호회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인천 회원들도 몇 년 전 폭설이 내리는 날에 백운산 산행을 같이 해서 친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한반도 지형을 조망하여 스케치를 했다. 뒤따라 온 충북 회원 가족이 앞에 보이는 괴산호 풍광을 바라보며 “어디가 한반도야?” 하다가 내 그림을 보며 그림을 보니 알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산맥이 마을로 가는 진달래 능선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편하고 시간 여유가 있어 좀 더 멀리 돌아가려고 천장봉을 향해 나섰다. 그 쪽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적막감이 느껴졌다. 평평한 길을 지나 오름길을 올라서니 윤원석 고문과 서울건축사회 조병섭 회장 등 네 분이 중턱에서 쉬고 있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윤고문이 초상권이 있으니 그만 찍으라고 하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12시 8분 천장봉에 도착히니 인천 회원 몇 분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중 안택호 회원이 계룡산에서 만났던 기억을 떠올려 반갑게 인사를 했다.
거기서 산맥이 마을 향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사가 급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닌 흔적이 없었다. 잠시 멈춰 보니 괴산호가 수풀사이로 한가롭게 보였다. 12분 35분 콘크리트 포장이 된 임도로 내려서서 급은 길을 지나다보니 우측으로 산길이 보였다. 그 입구에 굴바위농원·선착장이 300 거리로 표시되어 있었다. 숲속 오솔길을 지나 내려가니 전원주택으로 보이는 두 채의 집이 보였다. 호수가로 선착장으로 내려서니 한 부부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배가 떠나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 배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여인과 뱃사공 모습을 스케치 하다 보니 잠시 후 노란색 작은 모터보트가 다가왔다. 안에는 연세가 조금 들어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분이 서 있었다. 그분에게 이 지역에서 오래 사신 듯 하여 이 지역이 호수에 잠기기 전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하니 아주 어렸을 때여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맥이마을 병광식씨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부에게 잠시 후 오는 배를 타라고 알려주고 떠났다.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산막이 마을을 향해 출발하려 할 때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착장에 닿자 안에서 씩씩한 처녀뱃사공이 문을 열며 부부 탑승객을 맞으며 표를 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때 뒤에서 빨간 옷을 입은 어여쁜 아가씨가 다가오며 뱃사공과 예기를 하고 돌아섰다. 뒷집에 살거나 배를 운행하는 회사의 직원인 듯 했다.
산막이 마을로 이어지는 호숫가 좁은 길을 들어서니 좌측에 오래전에 지은 듯한 흙집이 보였다. 볏짚을 썰어 이겨놓은 흙벽이 오랜 시간 건조되어 단단하게 굳어진 모습이나 아궁이의 흔적 등에서 이 마을의 원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산길은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등을 엮어 다듬어 놓은 곳도 있었다.
1시 25분 삼신바위에 도착했다. 나루터에서 걸어온 거리는 1.6km 산맥이 마을까지는 약0.8km 거리였다. 사진을 찍고 평평한 길을 나아갔다. 제대로 점심을 먹지 않고 계속 걷다보니 허기가 졌다. 배낭에 준비했던 물은 다 떨어졌고 김밥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 계속 걷기만 했다. 산맥이 마을까지 가면 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차에 앞쪽에서 길가에 모여 앉은 다른 일행이 있어 물 한잔 얻어 마시자고 하니 반갑게 맞으며 막걸리를 한잔 따라주고 쌍치쌈도 주었다.
우측 호숫가를 바라보니 언저리에 주산지처럼 물속에서 자라는 느티나무가 수면에 대칭적으로 반사된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산맥이 마을을 향해 갔다. 산맥이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 수월정이 보였다. 표지판에 “이 곳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노수신(1515~1590)이 을사사화로 인하여 유배되어 와서 거처하던 곳이다. 노수신은 자를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또는 이재(伊齋)라 했으며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38년(1543)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있다가 명종 2년에 순천에서 진도로 보내져 19년간 섬에서 귀양을 살았다. 그 후 명종 20년 이 곳으로 옮겨와서 2년 만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본래는 연하동에 있었으나 1957년 괴산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수몰되자 지급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고 쓰여 있었다.
수월정에서 우측을 바라보니 산맥이 마을이 보였다. 하지만 여태껏 상상하던 깊고 소박한 산중 마을의 모습이 아니라 말쑥이 단장된 전원주택 단지 같은 모습이어서 실망이 되었다. 아마도 이주민 들을 위해 좀 더 넓게 재 조성되었거나 외지인들이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상상하는 마을은 개울을 이용하거나 산기슭에 작은 터를 일구며 식량을 자족하며 푸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깊은 오지 마을이었다. 산맥이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삶터와 자연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맑고 순수함이 가장 큰 행복이었을 것 같았다.
산막이 마을
20150613 김석환
준령(峻嶺) 틈새서 발원한
시원(始原)의 물길
태고적 숨결 간직해 흐르고
산세 첩첩이 둘러친
산막이 마을은
한줄기 외길만이 세상으로 열려 있다
사오랑마을 가는 총각
님 생각에
은빛 물결 위로 부는
살랑 바람에 이는 흥을 홀로 가누며
산 그림자 그늘진
오솔길을 지난다
땡볕 비추는 유월 한 낯
앞산 산새소리 더운 숨결을 토하고
강가 풀섶에선
지리해진 물고기가
들숨날숨으로 모래알을 굴려댄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
이마에 땀을 훔치다
십리 오솔길 밖 세상이
문득 궁금해지면
먼 하늘 맴도는 솔개에
산막이 너머 소식을 묻는다.
마을 우측에 선착장이 보였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배에 오르고 한 소녀가 큰 소나무에 매 놓은 그네를 힘껏 구르며 타고 있었다. 전에는 사오랑 마을까지 산막이 길을 걷거나 그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이용해 왕래했던 마을이다. 그 주변에 조금 연륜이 쌓여 보이는 노송 숲이 호수를 가르고 여객선을 타고 오가는 손님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줄 것 같았다.
마을 어귀에서 우측 산막이 길로 접어드니 저만치 떡방아 집이 보였다. 그 안에서 길손들이 떠들썩 예기를 하며 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인절미 떡메를 치고 있었다. 거기서 주차장까지 거리가 3km로 쓰여 있었다. 박기호 서울건축사등산동호회 사무총장이 전화를 걸어 버스가 칠성초등학교로 이동하니 걸어오라고 했다. 걷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고 전화를 해준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산막이 옛길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자연 지형위에 데크를 깔아 걷기 편하게 해 놓았다. 가다보니 호수 전망대가 보였다. 켄틸레버 형태로 호수쪽으로 길게 뻗쳐나와 있어서 그 위로 오르는 사람들이 더 시원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호숫가로 이어지는 산막이 옛길을 걷는 동안, 들어오는 입구 표지에 나타나 있던 얼음바위골, 앉은뱅이 약수, 옷 벗은 미녀참나무, 여우굴, 매바위, 호랑이굴 등이 그림 찾기처럼 차례로 나타났다.
2시 46분 산행길과 갈라지는 연화담을 지나 출렁다리를 타고 입구로 나왔다. 들어설 때와 달리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붐벼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주차장을 지나 조금 가다 보니 괴산댐 관리사무소와 사택이 나타났다. 다시 그 곳을 지나니 흐르는 하천에서 낚시질을 하는 사람과 올갱이 채취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길 끝지점에서 좌측으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보니 한 음식점 안쪽에 사오랑 마을 표지가 보였다. 이번 산막이 옛길의 유래를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일 것 같아서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나와 칠성 초등학교로 들어섰다. 지금은 폐교가 되고 마을 회관처럼 쓰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후정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 좌측의 사월회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조회장이 올갱이 국밥을 그릇에 가득 담아 주고 옆에서 강명원 건축사가 막걸리를 잔에 가득 부어주어 마셨다. 허기와 갈증에 주려 있던 참이라 허겁지겁 먹었다.
이종호 전국건축사등산동호회장이 전임 회장과 사무총장 등 수고한 임원들에게 감사패 등을 증정하고 인사말을 하며 행사를 마쳤다. 기념촬영을 하다 마산에서 온 경남의 신종복 건축사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신 회장은 내가 글을 산행기를 올릴 때마다 댓글로 안부 인사를 나누어서 친분이 쌓였다. 그리고 낙동정맥을 단독 종주해 부산 몰운대에서 마칠 때 경남건축사회 김진수 회장과 이철식 회원이 마중해준 것이 언제나 고맙게 기억된다.
오늘 전국건축사등산동호회 정기 행사에 참여해 산길을 걷고 뒤풀이를 하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여러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연륜이 쌓여가는 동안 여러 산에서 만났던 인연이 쌓여 아는 분도 많아지고 점차 회원 간의 친분도 두터워지는 느낌이다.
2015613(김석환)
첫댓글 같이 등산했는데 못보던 풍경이 이렇게 많다니요..역쉬 발품이겠지요
잘 읽고 느끼고 갑니다
그날 행사 진행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산길에 산막이 마을 안쪽 선착장을 거쳐오면서 늪 속에 자라는 버드나무 같은 풍경 등을 만났습니다. 늘 건강하고 즐거운 산행길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