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블루’(1988)는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가슴조리며 보았던 영화입니다. 한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왠지 잘 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짐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그 남자는 엄마가 훌쩍 떠나버린 아픔을 안고 있었는데 아빠까지 바다 속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잃게 되는 ‘사랑의 부재’ 상태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빠가 계실 것만 같은 바다 속이 부모가 없는 바깥보다 더 좋아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심장 박동도 편안해지는 특이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아기까지 임신한 사랑하는 여인이 바깥에 있는데도 계속 마음은 바다 속을 향하고 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자에게 이런 전설을 이야기해줍니다.
“그 마음 알아요? 바다 밑에서 인어를 만난다면 말이에요.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닷물은 더 이상 푸른빛이 아니고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죠. 그리고는 떠다니는 거죠. 고요 속에서. 그곳에 머무르며... 인어를 대신해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길 때 그들이 나타나죠. 우리를 반겨주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심판하죠. 만약 그것이 진실되다면... 만약 그것이 순수하다면... 그들은 함께 있을 거예요. 영원히 곁에 있을 거예요.”
물론 이 이야기는 누군가와의 참된 관계를 위해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자기를 떠남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의미로 했을 이야기입니다. 자신 또한 바다 속을 사랑해서 세상을 떠날 용기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바다가 하느님을 의미하면 그 바다의 어둠은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그 남자가 임신한 여인을 두고 결국 인어를 만나기 위해 바다를 택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맙니다. 사랑은 균형이 잡혀야합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만 머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타볼산에 올라간 이유는 세상 사람을 더 사랑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만 머물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애인과 자기 아기보다는 부모를 잃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 바다 속의 평안함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는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한 한 남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렸을 때 느꼈던 사랑의 결핍은 애인으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먼저 채우고 애인을 만났어야합니다. 그 공간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을 만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당신을 채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다시 견뎌내고 사랑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혼배를 해 달라는 젊은 친구들이 찾아오면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은 대부분 ‘행복하려고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그 말 안에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음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를 만나면 그 상대가 그 빈 공간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 마음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금방 상대에게 실망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배고픈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려는 사람을 ‘모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모기는 배가 고파서 남을 이용해 자신을 채우려는 상태이기에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주러 오셨습니다. 관계는 내가 흘러넘치고 있을 때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모기에게 피를 빨려도 또 생길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어야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여기서 만약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짚어내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그 분야를 잘 해내기 위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한 가지는 명확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부는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어요?”라고 물어볼 때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공부를 못할 확률이 매우 큽니다. 과외 없이 독학으로 도쿄 대 입학 및 수석 졸업, 재학 중 사법시험·공무원시험 동시 패스를 한 야마구치 마유가 쓴 “7번 읽기 공부법”이란 책이 있습니다. 머리가 나빠도 7번만 읽으면 책이 머리에 다 복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느 분야에 일정 수준에 다다른 이들은 이것 하나만 잘하면 다 잘 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할 줄 모른다면 많은 시간을 허비해도 그 영역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 또한 일 년을, 혹은 평생을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남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야 했는지 신경 쓰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열심히만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존 베스트 셀러인 <나는 4시간만 일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루에 4시간을 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4시간 일한다는 말입니다. 평생 15시간씩 일을 했지만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선택과 집중을 하며 4시간만 일했더니 훨씬 좋은 성과를 내더라는 경험에서 나온 책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만 알면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해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영원까지 남게 되는 유일한 가치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심판 받는 유일한 기준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늘 나라에서 어떤 위치에서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평생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살아도 사랑이 없었다면 단 일분 사랑했던 사람보다 좋게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율법 학자는 이 멋진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해버립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만약 저라면 “그러면 사랑하기 위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사랑해야하는지는 아는데 사랑하는 방법도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다 사랑이라고 말해지는 이 상황에 사랑을 위해 한 가지만 신경 쓰라면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 대답하자면 일단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태양처럼 어떤 존재에게서 풍겨 나오는 에너지이지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모든 행위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없는 이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랑처럼 보일 수 있어도 위선입니다. 마치 모기가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고 원숭이가 사람 흉내 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되면 주위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자신이 먼저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그랑블루의 남자는 사랑의 결핍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여인까지도 버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충만해져 다시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관계는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사랑하기 전에 자신이 사랑이 되어야하는 것”이 저에게는 사랑을 위한 가장 큰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시며 거저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행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 사랑이 되었다면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충만히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충만히 받았으면 그 받은 사랑 때문에 행복해야합니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먼저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 먼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을 받을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을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나는 불만족입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하면 내가 비워진 것이고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면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내기 위해서난 나와 싸워야합니다. 사랑이 되기 위해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 하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광야에서 죄와 싸우셨던 것입니다. 그 힘은 성령이셨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율법학자가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매사에 감사하여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 하나에 다 집약될 수 있겠습니다. 이것만 하면 사랑이 되고 사랑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순간이 황금 잉크로 하늘나라에 의미 있게 기록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