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r.blog.yahoo.com/oonam715/1360233.html
종 목 중요민속자료 131호 명 칭 고성어명기가옥(高城魚命驥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강원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551 시 대 조선 영조 소유자 어용선 관리자 어용선
※ 본문설명
현 주인 어명기의 2대조 어용수가 1860년대에 사들인 집이다. 약 400년 전에 이 터에 처음 자리잡은 집으로 화재로 불탄 것을 영조 26년(1750)경에 어태준이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경사진 언덕바지에 넓게 집터를 잡고 ㄱ자형의 몸채가 위치하고 왼쪽으로는 방앗간, 오른쪽으로는 행랑채, 뒤쪽으로 헛간채를 두었다.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짓지 않고 한 건물에 모두 시설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로 세줄겹집이다. 건물 왼쪽에 넓은 부엌과 외양간이 있고 중앙에 안방과 건넌방·대청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사랑방 3칸이 세로로 있다. 외양간을 부엌 앞으로 돌출시킨 것은 고성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평면형태이다. 부엌과 외양간 사이 간격에는 지붕을 설치하고 뒤쪽으로 뒤주를 붙박이하여 곡식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 중 가장 앞쪽에 위치한 사랑방은 주인의 일상거처이며, 뒤쪽 2칸의 사랑방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더그매이다. 지붕과 천장사이에 나타난 공간을 더그매라고 하는데, 이 집에는 안방·웃방·가운데방 모두에서 더그매가 보인다. 필요할 때 집안물건을 넣어두는 보관장소로 사용되기도 하며,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기를 막기도 한다.
규모가 당당하며 건축기법이 능숙하고 옛 법식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는 모범적인 건축물이다.
※ 보충설명
태백산맥(太白山脈) 일대에서 삼척(三陟) 원덕리(遠德里)를 경계로 하면 폐쇄형의 북방형 겹집들 분포가 주류를 이룬다. 원덕리가 그 하한선(下限線)에 가까워 남방성의 집들과 교차혼재하는 고장이 된다.
이 남방형의 폐쇄성이 강한 까치구멍집은 그 분포의 북한계선이 강릉지역을 넘지 못하여 그 북쪽의 집들은 평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북쪽의 집들은 산곡간형(山谷間形)과 평야, 해안성형(海岸性形)의 집으로 나뉘는데 개마고원(蓋馬高原)쪽으로 이어지는 산곡간(山谷間)의 집과 해안을 타고 원산 · 함흥 등지에 분포되는 집들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녔다.
고성의 이 집은 해안성이 짙은 유형에 속하며 고식(古式)의 기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터는 양명(陽明)한 향으로 형국되어 있다. 남남서향하였고 배산(背山)이 두두룩 하다.
집의 평면구성은 이 지역의 통식(通式)에 따랐다. 이른바 세줄겹집이라 일컫는 것으로 정면 4간에 측면이 3간인 규모인데 부엌 앞쪽으로 1간이 전출(前出)되어 아래는 외양간, 윗층은 수장공간(收藏空間)으로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몸체와 이 1간과는 별조(別造)한 것이어서 간극(間隙)이 생기게 되는데 이 부분을 이용하여 뒤주를 붙박이 하여서 곡식저장에 유용하도록 하였다. 빈틈 없이 활용하는 지혜의 발로라고 하겠다.
이 1간의 결구(結構)는 매우 고식이면서도 훈련된 대목(大木)에 의하여 조영되어서 처리하는 기법등이 건실하다. 이 덧달아낸 1간을 초즙(草葺)하기도 하나 이 집에서는 홑처마의 당당한 건물로 구조하였다. 목재의 취득이 비교적 용이하였다는 여건을 이로써 이해하게 된다.
몸채도 홑처마이나 당당한 구성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깊은 처마를 구성한 서까래도 굵직하고 듬실하다.
평면에서 부엌은 좌단의 1간을 차지하였으나 세줄박이의 측3간을 통간(通間)삼아 전체로는 널찍한 넓이를 사용하고 있다. 안방쪽에 부뚜막이 있고 서북측에 부설한 내고(內庫) 1간이 별설되어 있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부엌간이 생기는 북방지역의 구조와는 다르다. 그 유형의 남방식형용(南方式形容)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엌간이 생략된 것이다. 그대신 이 집에서는 세줄박이에서 앞쪽 1간씩 3간을 전부 미루를 깔아 대청을 삼았고 또 우측 끝에 반간의 퇴를 두어 고상식(高床式)과의 절충된 구조를 보였다. 이점은 이 집이 대표하는 이지역 일대의 특색중의 하나가 되는데 북방식저상형(北方式低床形)에 남방식고상형(南方式高床形)이 절충되어진 사례를 잘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북방식 전형에서는 볼 수 없는 뚜렷한 남방적 요소인 것이다. 안방을 제외한 방들은 각간에서 2간식으로 나뉘어져서 쓰임에 따라 전유공간(專有空間)으로 활용하도록 의도하였다.
이 집의 구성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더그매의 존재이다. 안방, 웃방, 가운데방의 3간을 모두 평천장(平天障)하여서 대량이상(大樑以上)의 삼각장공간(三角狀空間)은 터져 있다. 마루에서 올려다 보면 연등천상이 다 드러나 있다. 필요에 따라 이 공간은 다 수장처(收藏處)가 된다. 이 구조는 귀틀집에 퇴를 첨가시키기 위하여 큰 건물 하나를 덧씌웠던 상대(上代)의 합병형(合倂形) 집의 근대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역시 특색으로 손꼽을 수 있다.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이며 충실히 법식에 따르고 있다. 서까래 사이의 앙토에는 맥질하여서 비교적 깨끗한 맛을 지니고 있다. 몸채 뒤로 동향한 3간의 고간(庫間)이 있고 배나무, 감나무를 심은 뒷동산이 널찍하게 가꾸어져 있다.
종 목 중요민속자료 134호 명 칭 보은선병국가옥(報恩宣炳國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래리 154 시 대 일제시대 소유자 선병국 관리자 선병국
※ 본문설명
시냇물이 모이는 넓은 삼각주의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은 집이다. 자연경관과 집이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는데, 건축 당시에 훌륭한 목수들을 가려뽑아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안채·사당채를 둘러싸고 있는 안담의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두껍고 높게 둘러쌓는데, 1980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어 많이 허물어졌다.
H자 평면의 사랑채는 남향하여 자리잡았는데 보통의 사랑채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앞·뒤 모두 툇마루를 설치하여 더욱 넓은 공간을 활용하게 하였다. 가운데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큰사랑방을 비롯한 골방·약방·마루 등을 시설하였다. 역시 H자 평면의 안채는 사랑채의 왼쪽에 자리하였는데 가운데의 대청이 중심이 된다. 대청은 앞·뒤 툇마루를 통하여 어떤 방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엌은 아주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위에는 다락이 마련되었다. 대체로 사랑채와 비슷한 구조를 하였으나,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원기둥을 사용한 반면 안채는 앞쪽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안채를 넓게 둘러싸서 안마당 공간을 만들고 있는 U자형의 행랑채는 대문간·문간방·구들·광으로 만들었다. 사당채는 행랑채의 북쪽에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해서 배치되었다. 남쪽에 부엌을 두고 있는 제수채와 사당을 연결하는 복도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시설물로 비바람이 칠 때도 의례를 거행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1919∼1921년 사이에 지은 이 집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개량식 한옥구조를 시험하던 때에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것이어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보충설명
시냇물이 모이는 너른 삼각주의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먼 바깥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연경관과 집이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사랑채, 안채, 사당채를 둘러싸고 있는 안담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둑담으로 두껍고 높게 둘러치고 있는 점이다.
사랑채는 정남향하고 있으며 사랑마당 앞에 조그맣고 예쁘장한 내대문(內大門)이 세워졌다. 이것을 중앙으로 하고 사랑채를 둘러싸는 네모 안담을 두르고 동남쪽 모퉁이에 안에서의 시선을 피하면서 뒷간이 자리한다. 사랑채와 중문의 축을 맞추어서 남쪽에는 3칸 대문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진 흔적만 남겼다. 대문간 앞은 넓은 마당이 마련되고 안산(案山)대신 조성된 소나무 숲속에 이 집 할아버지 선씨의 효자정각(孝子旌閣)이 직각축으로 세워져서 집의 어귀를 형성한다. 효자정각은 단칸 다포(多包)합각(合閣)지붕인 바 단칸 맞배대문을 두고 막돌담장을 둘렀다. 외대문은 3칸솟을대문의 전형인듯 싶으며 내대문은 일각대문으로서 빗장이 이중으로 되었고 둥근화반을 끼우고 위에만 소로를 받친 점이 재미있다. 사랑채는 H자형 평면으로서 뼈대를 2고주 7량으로 처리하여 몸채가 정면 4칸, 보간 2.5칸으로하고 날개채가 정면 2칸, 측면 5.5칸으로해서 앞으로 몸채보다 2칸을 내밀도록 계획했다.
몸채에는 앞뒤로 툇마루를 두면서 날개에는 앞과 안쪽에 툇마루를 시설했다. 몸채 가운데는 너른 3칸 대청과 상하 2칸의 작은사랑을 배치했는데 대청앞은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서쪽 날개에는 앞쪽에 서루(書樓)(아래는 불을 지필 수 있는 굴묵)와 뒤쪽으로는 큰 사랑을 두었다. 동쪽 날개에는 앞으로 부터 골방, 약방, 구들, 마루를 시설했으며 동쪽 측벽에 쪽마루를 내달고 몸채 외진주 줄에 맞추어 쪽대문을 시설해서 앞뒤의 이용을 구분짓고 있다. 지붕은 골기와에 합각지붕이며 홑처마이다. 굴도리에 장혀를 받치고 뜬장혀를 보내서 소로를 끼웠다. 두리기둥위에 커다란 주두(柱頭)를 얹었고 주초(柱礎)는 팔각인데 약간 높다. 기단은 세벌인데 위에만 장대석 갑석을 돌리고 아래 2단은 네모꼴 면석으로 쌓았다. 날개쪽 툇마루 앞에는 난간을 두르고 아(亞)자 살로 장식했다. 창문들은 비교적 살이 가늘고 장식적인 바 연약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구조기법은 안채와 같다.
안채는 사랑채의 축에서 직각으로 꺾어서 서향(西向)하여 배치되며 역시 H자형 평면을 갖는다. 이것을 ㄷ자형 행랑채가 넓게 둘러싸서 안마당 공간을 형성한다. 행랑채의 남쪽 끝에는 ㄱ자형으로 꺾어서 솟을대문을 덧달고 내대문을 시설한 바 외대문에서 ㄹ자로 꺾어 안채에 이르도록 계획되었다. 이것을 더욱 곡진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문 앞에는 ㄴ자 담장을 둘러쳐서 대문 앞을 가로 막았다.
안채는 몸채가 정면 4칸, 보간 2.5칸이고 날개채가 정면 4칸, 측면 6칸으로 해서 앞은 1.5칸, 뒤는 2칸을 몸채보다 내밀도록 계획했다. 몸채에는 가운데 넓은 2칸에 대청을 배치하고 오른쪽에 상하 2칸의 안방과 왼쪽에 역시 상하 2칸의 건넌방이 놓였다. 앞은 툇마루이고 뒤는 쪽마루가 시설되며 이것은 오른쪽 날개 뒤까지 연결시켜서 부엌마루, 부엌방과 동선을 이어준다. 오른쪽 날개에는 부엌 앞에 모방과 툇마루가 있고 뒤쪽에 역시 상하 2칸의 부엌마루와 부엌방이 만들어졌다.
왼쪽 날개에는 몸채 툇마루와 연결해서 조그만 대청과 창호가 시설된 마루방이 마련되고 그 앞은 반칸 크기의 곳간(庫間)과 주위에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마루방 뒤에 갓방이 놓이고 그 뒤에 다시 1칸짜리 구들이 마련되며 가운데에는 뒤뜰과 연결되는 상하 2칸 크기의 부엌이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모두 광인데 상부에는 부엌까지를 포함해서 넓다란 다락이 시설되었고 이것은 뒤툇마루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이것의 구조는 대체로 사랑채와 비슷하나 특이한 점은 뒷퇴를 두지 않고 앞퇴만 두면서 7량으로 처리하고 이것을 굽은 부재를 이용하여 앞뒤 지붕의 물매와 길이를 맞추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이때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홍예보를 써서 2중으로 보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곧 장혀를 받친 종도리를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종보 위에 얹었다. 종보는 중상도리와 맞춰지며 밑의 장혀는 중도리 사이의 홍예보 꼬리와 맞춰져서 무지개를 하고 중하도리와 머리를 맞추었다. 이때 중상도리는 위동자주로 받쳐서 대들보 위에 올리는데 대청중앙이 아닌 경우, 뒤의 동자주는 앞뒤 대들보를 얹은 고주가 받쳤다.
고주머리는 가름장맞춤으로 뒷보를 끼우고 그 위에 대들보 꼬리를 긴장부로 끼워 맞추었으며 다시 앞중하도리는 홍예보와 맞추고 홍예보 밑바닥을 대들보 위에 얹었다. 앞중하도리 밑에는 장혀로 받치고 소로를 끼워서 뜬장혀를 보내고 무지개꼴 툇보의 꼬리와 맞추며 뒤중하도리는 짧은 동자주로 받쳐 뒷대들보 위에 올리고 뒷평주에 가서 평범하게 결구(結構)한다.
말하자면 상하중도리사이에 홍예보를 써서 2중보를 둔 것이 특이하고 나머지 기법은 사랑채와 같다. 조금 다른 점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두리기둥을 쓴 반면 안채는 전면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행랑채는 맞걸이 3량 맞배지붕인데 북동쪽 끝부분만 작은 합각으로 처리했다. 평면은 전면 14칸, 북쪽 날개 9칸, 대문간을 포함해서 남쪽날개는 9칸으로 이루어졌다. 솟을대문 옆에는 문간방이 마련되며 서남쪽 모퉁이에는 사랑채와 연결하는 중문간이 시설되었다. 나머지는 몇개의 구들과 광칸으로 만들어졌다.
사당채는 다시 안마당에 축을 직각으로 꺾어서 행랑채의 북쪽에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해서 배치되었다. 3칸의 솟을 삼문을 전면으로하고 뒤로 3칸의 사당채가 놓였다. 사당마당 서쪽에는 3칸 제수(祭需)채로 구성되는데 제수채에서 사당채까지 ㄱ자로 꺾어진 복도채가 연결된다. 전면 삼문을 가운데로 하여 담장이 둘러쳐졌다. 삼문은 맞배지붕이며 마루를 깔았다. 제수채는 남쪽에 부엌을 두고 뒤로 2칸 구들을 놓았으며 구들 앞은 쪽마루가 시설되었다. 복도채는 벽과 지붕을 갖추어 비바람칠 때도 의례를 거행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시설물이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채의 세 공간으로 구획하여 내담을 둘러치고 이를 밖으로 다시 크게 둘러싸서 또 하나의 외담을 만들어 구획한 점이 특이하다. 특히 정원은 사랑채의 경우 전통적 맛을 잃지 않게 조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1919∼1921년 사이에 지어진 이 집은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서 건물의 간살이나 높이 등을 크게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대의 대표적 지주계층의 살림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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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135호 명 칭 중원윤민걸가옥(中原尹民傑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충북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133 시 대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윤민걸 관리자 유경하
※ 본문설명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낮은 동산을 두르고 있는 곳에 자리잡은 집이다. 원래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에 나 있던 중문을 통해 사랑채로 출입하였는데, 행랑채와 중간 담이 모두 무너져 현재는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별당처럼 구성되었는데 앞·뒤 모두 툇마루가 있으며, 마루방과 툇마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구들을 설비한 방이다. 안채는 사랑채의 왼쪽으로 자리하였다.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배열된 안채는 건넌방의 앞쪽으로 작은 부엌을 만들어 불을 지피게 한 ㄱ자형 구조이다. 안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안채의 왼쪽에 아래채가 있는데, 뜰아랫방과 곳간으로 되어있다. 안채 뒤쪽으로는 담장과 문이 없어진 상태의 사당이 자리한다. 방·부엌·광으로 이루어진 광채는 안채의 오른쪽에 있으며, 광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쪽문이 있어 사랑후원과 뒤뜰을 연결하고 있다.
이 집에는 다양한 외부공간이 구성되어 짜임새 있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대략 19세기 중엽에 세워진 집으로 추정되며, 충주댐 건설로 인근의 중요한 집들이 옮겨져 다시 지어지거나 없어져서 이제는 이만한 집조차 볼 수 없게 되어 지정·보존하게 되었다. 같은 중부지방의 집이면서 서해안 일대의 집들과는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보충설명
집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집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을 두르고 있다. 개울에 면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의 일각대문을 통해 사랑마당에 이르고, 왼쪽으로 행랑채에 시설된 중문을 지나서 안마당에 다다르도록 계획되었으나 지금은 행랑채나 중간담이 모두 무너져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솟을대문 뒤에는 약간 오른쪽으로 축을 옮겨 일각대문과 사랑채를 배치해서 담장을 두르고 사랑공간을 만들며 왼쪽으로 축을 옮겨 중문을 둔 행랑채와 ㄱ자 모양의 안채를 배열해서 안마당을 형성한다. 안마당 서쪽에는 직각으로 아래채가 놓이고 안채 뒤는 뒤안이 마련되는데 외부로 통하는 편문(便門)이 시설되었다. 안채 동쪽에는 뒤뜰이 설정되는 바 사랑채와 축을 맞춰 뒤에 사당채가 배치되고 동쪽에는 사랑채와 사이에 직각으로 광채가 만들어졌다. 광채 동쪽은 뒤뜰과 공간을 구분하여 사랑후원이 된다.
사랑채는 3간전퇴일자형 합각지붕 집으로서 별당처럼 구성되었다. 평면은 왼쪽에 2간 사랑방을 두고 머리에 대청을 두었는데 대청은 전퇴까지를 쓰고 사랑방 앞의 아래 전퇴는 골방을, 위 전퇴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또한 아랫사랑 뒤로는 처마 밑을 이용하여 헛기둥을 세워 내밀고 방을 크게 만들었다(툇마루 앞 합각문과 윗사랑 뒤 쪽마루는 후보(後補)인 듯). 대청(大廳)의 창문은 모두 판장문으로 된 점이 특이하다. 납도리집이며 네모기둥, 네모 높은주초, 화강암 외벌대 댓돌로 처리했다. 합각은 전돌로 장식되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역시 남도식인데 특이하게 T자 모양으로 되었다. 전체적으로 전퇴집으로서 왼쪽에 부엌을 두고 다음은 안방, 웃방, 안대청 그리고 작은대청, 앞으로 꺾어져서 간반(間半) 크기의 건넌방을 배치했다. 그러나 대청 동쪽으로 고방을 1간 덧달아서 일반적 유형과는 달리했다. 안방에서 안대청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건넌방 안쪽에는 쪽마루를 놓았으며 건넌방 동쪽 퇴는 골방이 만들어지고 앞쪽에는 반간(半間)을 들여서 상부는 벽장을, 아래는 아궁이를 시설했다. 부엌은 전퇴까지 크게 쓰며 상부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대청 앞문은 분합문이며 안대청과 고방문은 모두 지게문이다. 건넌방과 안대청의 샛문은 틀 수 있는 미닫이이고 안대청과 고방은 모두 마루가 깔렸다. 지붕은 골기와에 박공지붕이며 T자로 모이는 부분은 합각없이 모임지붕으로 처리했다. 납도리집이며 네모기둥, 높은 네모주초, 외벌대 화강암 댓돌로 만들었다.
아래채는 L자 모양으로서 전체적으로 뒷퇴를 만들었는데 꺾어진 날개만 3량으로 처리했다. 꺾어진 중앙에 2간 부엌을 놓고 뒤로 뒷방을 덧붙였으며 도리간으로 아래 ·위의 아랫방을 두고 끝머리에 광을 시설했다. 아랫방으로부터 광까지는 헛기둥을 세워 퇴를 달아내고 아랫방 뒤는 골방, 다음은 널마루, 광간은 광을 크게 쓰고 있다. 아랫방 앞에는 또한 쪽마루가 널마루로 놓였는데 나중에 덧달아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부뚜막 위에는 벽장이 시설되며 아래 ·웃방과의 사이 및 골방과의 사이에는 틀 수 있는 미닫이가 만들어졌다. 지붕은 골기와로서 맞배지붕이며 역시 납도리, 네모기둥, 높은주초, 외벌대 장대석 댓돌로 되었다.
사당채는 3간 맞배집이며 광채는 맞걸이 3량5간집으로서 남쪽으로부터 구들, 부엌(상부 다락), 3간 광으로 이루어졌다. 광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쪽문이 시설되어 사랑후원과 뒤뜰을 연결하고 솟을대문은 5간이었던 듯하나 가운데 솟을대문간만 남아있다. 이와 같이 이 집에는 바깥마당, 가운데마당, 사랑마당, 사랑후원, 안마당, 뒤꼍, 뒤뜰 등 다양한 외부공간이 구성되어 하나의 짜임새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전체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아름다운 집이라고 생각되나 변형된 부분이 많다.
종 목 : 중요민속자료 130호 명 칭 : 궁집(궁집) 분 류 : 가옥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4.01.10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426-1 시 대 :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 권옥연
※ 본문설명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궁집이라는 칭호는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
전형적인 ㅁ자형의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대문을 들어선 정면으로 부엌·안방·대청이 있고 꺾어져서 오른쪽에는 건넌방·부엌, 왼쪽에는 아랫방과 사랑뒷마루, 대문 옆으로는 광 ·책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 귀퉁이에 있는 ㄱ자형의 사랑채는 안채의 사랑뒷마루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덩어리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집은 화길옹주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이렇게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 보충설명
이 집은 북한강변(北漢江邊)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 산이 둘러싸며 국(局)이 좁고 주밀(周密)하다. 산자락 한줄기가 집의 뒤를 감싸돌고 다른 줄기가 집 앞 50m쯤 거리에 조그만 동산을 만들었는데 이 동산이 바로 안산(案山)이며 여기에 집주인 옹주의 묘(墓)가 조성되어서 항상 사랑누마루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기자(己字) 모양인데 꼬리가 거꾸로 돌아 앉았으며 건물이 한덩어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 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는 안방과 대청을 일자(一字)로 두는 남도방식(南道方式)으로서 사대부(士大夫)집에서 가끔 쓰이는 ㅁ자집이다. 서북쪽에는 부엌, 안방, 대청을 일자로 배치하고 꺽어져서 양쪽 측면으로 동쪽에는 건넌방과 부엌, 서쪽은 아랫방과 사랑뒷마루가 놓였다. 안마당 전면은 동쪽에서부터 대문간과 광, 책방의 차례이고 귀퉁이에 연결하여 커다란 사랑방이 시설된다. 사랑방 서쪽은 사랑대청이며 서쪽 끝에는 높다란 누마루가 사랑툇마루 앞으로 쑥 내밀었다. 구조는 안방과 사랑부분을 모두 1고주5량으로 하여 보간을 2간 너비로 처리했고 기타 안채 날개와 중문간을 맞걸이3량으로 하였다. 사랑채의 모든 샛문과 전면문, 안대청의 샛문과 전면문이 모두 분합문(分閤門)으로 되었으며 특히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도 분합문을 달아서 공간을 구분짓고 있다.
이 집은 산기슭에 위치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 문간채가 있었음직한 자리에는 소나무 2그루가 있으며 사랑방 앞에도 정원수들이 심어졌다. 뒤뜰에는 감나무와 앵두, 오동나무, 철쭉, 회양목, 호두나무 등이 자라며 뒷산은 밤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원축조물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집은 옹주의 시집으로서 궁집이라고 불리웠으며 대략 18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종 목 : 중요민속자료 128호 명 칭 : 양주백수현가옥(楊州白壽鉉家屋) 분 류 : 가옥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4.01.10 소재지 : 경기 양주시 남면 매곡리 282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백수현
※ 본문설명
명성황후(1851∼1895)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난처로 지은 집이다. 원래는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채가 있었으나, 사랑채와 별당채는 헐려 없어지고 현재 안채와 행랑채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ㄱ자형의 안채와 행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마당의 안쪽에 동남향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정면의 대청과 건넌방을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이 대청 옆에 세로로 꺾여 있는데, 부엌의 왼쪽 옆으로 칸을 넓혀서 아궁이 부엌과 찬방을 꾸며놓은 점이 특이할 만하다. 안방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제법 널찍한 크기이다. 부엌 윗부분은 다락을 만들었는데 안방에서 드나들 수 있다.
행랑채는 사대부집 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대문간의 왼쪽에 부엌과 방 3칸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마굿간·마부방·아랫방·곳간·쌀광이 있다. 행랑채는 모두 안마당쪽으로 동선이 연결되었으며 대문 옆의 방들은 모두 사랑방처럼 만들었다. 앞쪽의 사랑마당은 원형이 많이 파괴되었고, 안방 서쪽의 뒤뜰과 집 뒤로는 정원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건축된 주택으로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있다면 명품으로 손꼽힐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다.
※ 보충설명
집 뒤 매봉재를 진산(鎭山)으로 삼고 그 줄기가 좌우로 돌아 청룡백호(靑龍白虎)를 이룬다. 집 앞은 너른 들이 펼쳐지고 멀리 낮은 토성형상(土城形象)의 산이 둘렀으며 그 너머로 도랍산이 조공(朝貢)하고 있다. 동구(洞口)에는 조그만 냇물이 흐르는데 안산(案山)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냇가를 따라 회나무를 심어 정취를 돋운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별당채는 지대석(址臺石)만 남긴 채 헐리고 없으며 튼ㅁ자 모양인 살림채만 남아있다. 외부공간은 행랑채앞의 사랑마당, 집안의 안마당, 안채뒤의 뒤뜰로 이루어졌다. 살림채는 ㄴ자형의 행랑채와 꼬리가 달린 ㄱ자형의 안채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일반적인 ㄱ자형집과 같아서 부엌, 안방을 세로로 두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하였는데 부엌 뒤(가로)로 광과 뒷방을 곁달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성은 사대부(士大夫)집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보간은 모두 간반(間半)으로 했는데 다만 뒷방쪽만 단간(單間) 크기로 만들었다. 도리간은 부엌, 안방, 대청이 2간 길이이고 기타는 단간이다.
행랑채는 사대부집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서쪽 아래로부터 부엌, 아래·위문간방, 광, 대문간, 마구간, 구들이 배치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2간부엌, 2간뜰아랫방, 고방(庫房)(쌀광), 2간광의 순서로 놓였다. 모두 안마당으로 동선이 연결되는데 전면구들들은 안쪽으로 문을 내었다. 안채의 구조는 가로, 세로 모두 1고주5량이며 대청 중앙은 긴보5량으로 처리했다. 물론 뒷방(채)쪽은 맞걸이3량이다. 대청의 앞 중도리 아래에는 기둥과 비슷한 벽선을 세워서 1고주5량처럼 만들고 여기에 분합문(分閤門)을 설치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기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지대석은 두벌대로서 화강암을 잘 다듬어 곱게 배열했고 높은 주초이다. 기둥은 네모꼴인데 실오리모로 접었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격식에 맞춰 잘 다듬었으며 장혀는 없다. 다만 종도리에만 작은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헛창방을 보냈다. 대공은 사다리꼴이며 보는 둥근 네모꼴이다. 지붕은 합각으로서 한식기와를 얹었다. 부엌 웃간 상부에는 다락을 시설했는데 그 앞에 만들어진 선반은 당초 무늬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까치발로 받치고 있어서 인상깊다. 행랑채의 구조는 맞걸이3량이며 기와지붕 맞배집이다. 전체적으로 건축기법은 조선조 말의 기법을 따르고 있으나 매우 정교하게 건축되었다. 행랑채 앞의 사랑마당은 원형이 많이 파괴되어서 정원(庭園)다운 것은 남아 있지 않으며 안마당에도 별다른 정원시설물은 없다. 그러나 안방 서쪽에 마련되는 뒤뜰에는 우물과 전나무, 잣나무, 앵두나무, 복숭아등을 심고 집뒤로는 화강암 장대석을 한벌 돌려서 나무를 식재하여 정원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행랑채 용마루 망와에 1682년(강희(康熙)21년)이라는 명기(銘記)가 있으나 실제의 건축년대는 건축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훨씬 뒤인 19세기말 정도로 추정된다. 강희년간의 망와는 경기·충청지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아마 당시까지는 제작년대를 기록했으며 그때 기와를 계속해서 새집에 옮겨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집의 명기(銘記) 있는 망와를 보면 이후에 제작했던 기와인데 거푸집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옛 것을 그대로 글자까지 모사(模寫)하여 구운 것도 있다. 따라서 이 집은 조선조말 민비(閔妃)의 피난처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는 전언(傳言)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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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125호 명 칭 화성정용래가옥 (華城鄭用來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108 시 대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정용래
※ 본문설명
1800년대 말에 지은 초가집이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안방·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 보충설명
정용채(鄭用采) 가옥 아래쪽에 있는 초가집이다. 평면은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ㅁ자 집이다.
사랑채는 바깥마당에 면하고 있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으며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로 부엌이 서쪽으로 놓이는 간살이이다. 부엌, 안방 뒤로 조그만 찻방이 만들어지고 꺽어져서 중앙에 대청이 놓이며 머리에는 건넌방과 앞의 누마루가 배치되었다. 대청(大廳)은 도리간 2간인데 퇴를 포함하여 3간 대청이라 부른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전면은 개방된다.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신주(神主)를 모시고 사당(祠堂)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관습이다. 중부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안방 뒤의 골방을 찻방이라고 부르는 바 아마 그것의 이용에서 과방(果房)의 기능이 강조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랑채는 전면 가운데에 대문을 시설하고 나머지 3간은 앞퇴에 마루가 깔려 있으며 뒤로 구들을 시설해서 사랑방과 문간방을 만들었다. 문간방 뒤로는 날개를 달아내서 안마당을 감싸는데 외양간, 헛간, 광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랑대청은 따로 마련되지 않고 툇마루는 우물마루이다.
구조는 대청 부분을 긴보5량으로, 건넌방은 1고주5량으로 하고 사랑방 부분은 평사랑으로, 나머지 부엌과 광 부분은 맞걸이3량으로 처리했다. 기둥은 모두 네모꼴로 대문간으로 들어선다. 바깥마당은 사랑방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마련되었고 안마당은 사랑마당으로부터 폐쇄도었다. 살림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향을 하며 건축년대는 19세기말 정도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부농(富農)의 집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oonam715/1360155.html | |
종 목 : 중요민속자료 124호 명 칭 : 화성정용채가옥(華城鄭用采家屋) 분 류 : 가옥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4.01.10 소재지 :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 시 대 : 조선 순종 소유자 : 정융구
※ 본문설명
나즈막한 동산이 둘러있는 명당 터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큰집이다. 솟을대문에 적힌 기록에는 고종 24년(1887)에 문을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안채와 사랑채는 이 문보다 약 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은 정면으로 내지않고 북쪽측면으로 내어 언뜻보면 집이 커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큰 규모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며, 마당의 왼쪽으로 길게 줄행랑채가 뻗어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맞은편의 마당끝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대문이 있다. 중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ㄷ자형의 안채는 앞이 개방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안방·찻방(과방)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건넌방·마루를 배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사랑채의 안사랑방 뒤에 있는 골방이 뒷마루를 통하여 은밀하게 안채의 대청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대부 집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길다란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의 앞을 가로막아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대문채는 여기에 연결이 되어 있다. 안사람들의 아늑한 생활공간이었던 뒷뜰은 우물과 장독대를 두어 안살림의 옥외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주위에 심은 감나무와 소나무는 뒷산으로 이어져 자연에 파묻힌 아름다운 공간구성을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月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이는 주택이다.
※ 보충설명
나지막한 뒷산이 손바닥을 가볍게 오므린 토성(土城)의 모양으로 둘러있고 이 산의 한맥이 집 왼쪽을 돌아서 집 앞 60m 정도 거리에 얕으막한 동산을 만드는 바 지리상으로 안산(案山)에 해당하며 속칭 노적가리라고 한다. 진입로는 이 동산의 남쪽 옆을 끼고 북쪽에 나 있는 대문간을 향해 S자로 꼬불꼬불 돌아 들어간다. 집의 오른쪽은 뒷산 끝이 나지막히 돌아들어 뒤뜰을 감싸돌고 그 끝은 터져 있어서 집의 수구(水口)에 해당하며 수구너머로 멀리 조산(朝山)이 보인다.
평면 형태는 일자(日字)모양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서 대문을 정면으로 내지 않고 북쪽 측면으로 하게끔 계획되었다. 안채는 우리가 통상 보는 좌우대칭의 ㄷ자형 평면인 바 중앙에 3간 대청을 두고 왼쪽에 부엌, 안방, 찻방과 오른쪽에 부엌, 건넌방, 마루를 배치했다. 다른점이 있다면 안방 쪽은 뒷퇴를 만들어서 툇마루를 시설하고 여기에 연결해서 뒤뜰로 뒷방을 내었다. 사랑채는 4간의 一자형 전후퇴집으로 오른쪽 2간은 통간(通間)인 사랑대청으로 꾸며졌고 왼쪽 2간은 구들로 만들어졌으며 앞퇴에는 전체적으로 마루를 깔았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안사랑 뒤 골방에서 뒷마루를 통해서 은밀하게 안대청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대부집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안채와 사랑채 앞에는 길다란 행랑채가 가로막아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한다. 여기에 연결되어 사랑마당 북측에는 대문채가 놓였는데 솟을대문으로 처리되었다. 안채 남쪽에는 비탈을 따라 나무울타리를 널따랗게 두르고 뒤뜰공간을 만들었다. 뒤뜰에는 가운데 우물이 있고 주위에는 감나무와 소나무가 심어져서 뒷산의 수목으로 이어진다. 솟을대문이 상량문에는 1887년에 지은 것으로 명기 되었으나 안채와 사랑채는 이보다 앞선 19세기 초의 건물로 추측된다.
구조는 안대청 중앙을 긴보5량으로 처리하고 양측1면을 통상 쓰는 1고주 5량이다. 따라서 가운데 기둥이 중도리의 바로 아래 놓이지 않게 한다. 대들보는 옆구리를 배부르게 하고 배쪽의 장혀 면만 다듬은 항아리 모양이다. 납도리 집이며 장혀와 헛창방 등은 일절 쓰지 않는 고식 방법이다. 대공은 판대공이고 비교적 높으며 대공이 받치고 있는 상도리 받침은 고졸(古拙)한 맛이 나는 우진각 모양이다. 사랑채의 구조 역시 1고주 5량이며 안채의 구조와 거의 같다. 댓돌은 한벌대 긴 장대석으로 두꺼운 맛을 자랑한다. 건넌방 창문이나 사랑방 밀장의 창살을 아자(亞字) 문양으로서 퍽 인상적이다. 사랑방 앞 툇마루에는 한 개의 나무를 깍아 만든 통난간을 설치하였는데 머름처럼 네모꼴 테를 보이고 사이는 빈지로서 막아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물론 출입하는 곳은 난간을 터 놓고 있다. 어느 주택에서나 보는 현상으로 이 집에도 과실수를 집 주변에 많이 심어서 집 앞에는 호도와 대추나무, 뒤뜰에는 감나무 등이 심어졌으며 앞동산과 뒷산의 참나무, 소나무, 등에 연결되어 하나의 자연에 파묻힌 아름다운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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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민속자료 153호 명 칭 해남윤탁가옥(海南尹鐸家屋) 분 류 가옥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전남 해남군 현산면 초호리 276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윤탁
※ 본문설명
나지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앞으로 들이 펼쳐진 남향 땅에 자리하고 있는 기와집이다. 안채에서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광무 10년(1906)에 지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이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ㄱ자형의 문간채, 안채, 별당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길과 이어진 낮은 터에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에서 곧바로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문간마당보다 높은 터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 뒷쪽으로 중문간채가 있다. 그 안에 안채와 별당채가 마주 보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ㄱ자로 꺾인 평면 중 남쪽 끝칸과 다음칸이 부엌이며 그 윗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위로 마루방이 있다. ㄱ자로 꺾여서 3칸의 대청이 있고, 그 옆에 작은방 1칸이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의 집으로 서쪽으로부터 약방과 골방이 앞뒤로 있고 그 옆에 사랑방 2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방 앞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별당채는 뒤집은 ㄴ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방이 1칸씩 있다. 또한 ㄴ자형으로 꺾인 부분에 방 1칸이 더 있다.
대문간채는 ㄱ자형 집으로 동쪽에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 2칸의 광과 솟을대문간, 광 그리고 헛간이 자리잡고 있다.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각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집 주변 경치도 뛰어난 곳이다.
※ 보충설명
마을 어귀에 심어진 커다란 정자나무와 조그만 시내를 지나면 안쪽에 기와집 몇 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집이 바로 이 집이다. 안채의 상량문(上樑文)에는「광무십년(光武十年) 병오(丙午)십일월 이십칠일 경신수주(庚申竪柱) 동십이월 초삼일 을축(乙丑) 신이시(辛已時) 상량(上樑) 축좌(丑坐)」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1906년에 건축됐다고 믿어지며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등도 같은 연대에 지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문간채와 사랑 앞의 정원시설은 연대가 조금 더 떨어진 20세기 초반에 꾸며졌으리라 추측되며 기타 건물들은 근래에 지어진 임시 건물이다.
건물의 배치는 안채가 뒤로 가고 사랑채가 앞에 오는 서남향의 직선축을 썼다. 전면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을 두고 정면에 ㄴ자로 꼬부라진 솟을 대문채를 두었다. 넓은 사랑마당을 가로질러서 한길 이상 높은 축대를 쌓고 뒤쪽으로 당당하게 사랑채를 배치했다. 사랑 앞은 정성들여 만든 정원이고 사랑 서쪽 모퉁이를 돌아 사랑 뒤곁을 지나면 또 다시 두길 높은 축대 위에 중문간채가 자리한다. 이 뒤에 안채가 ㄱ자로 배치되며 안마당 서쪽 맞은편에는 뒤집은 ㄴ자로 별당채가 놓였다. 안채 동쪽은 가사노동공간인 뒤뜰이고 뒤안은 다시 축대를 만들어서 후원(後園)으로 연결된다.
안채는 ㄱ자형집으로서 중부지방식 평면구성을 보인다. 가로칸은 전퇴, 세로칸은 전후퇴(세로칸 동쪽으로 다시 헛기둥을 세워서 반칸을 덧달았으나 이것은 근래에 변형된 부분이다)로 간살이를 해서 맨 남쪽에 2칸부엌을 배치했다. 다음은 복판의 상하 2칸을 큰방으로, 다음은「골마루」, 꺾어져서 3칸대청을 배치했고 맨 끝머리가 작은방(이곳에서는「못방」이라 부름)인데 머릿퇴에 벽장과 굴묵공간을 마련했다. 큰방 앞퇴에서부터 작은방 끝 모퇴까지에는 툇마루를 시설했으며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마루가 꺾어지는 곳에는 세모마루를 덧붙였다. 대청과의 사이 대청문은 중부식으로 모두 분합문을 시설했다. 큰방과 골마루 동쪽퇴에는 예전에 모두 골방이 시설되었던 곳이다.
구조는 가로칸을 1고주5량으로 하였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장혀를 받쳤으며 보밑에는 단이를 끼웠다. 대들보는 달걀꼴 단면이고 대공은 사다리꼴이다. 기둥은 전면만 큼직한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대강 네모난 덤벙주초이고 댓돌은 얼추다듬은 한벌대 화강암이다. 지붕은 골기와 합각지붕이다.
별당채 역시 ㄱ자형집으로 뒤쪽을 향해 뒤집어졌다. 간살이는 가로칸 ·세로칸 모두 전퇴를 두고 가로 ·세로의 전퇴와 맨 뒤의 머릿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그러나 머릿퇴 부분은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전면을 향하는 좌우 2칸에는 샛방을 배치하고 뒤로 꺾어져서 상하 2칸은 대청이며 맨 마지막은 머릿방이 된다. 대청 앞문은 남도식으로 세살문을 해 달았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장혀를 받친 납도리집이다. 기둥은 전면 기둥만 두리기둥이며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이다. 초석은 덤벙주초인데 동남쪽 기둥 2개에만 아주 높은 8각주초이다. 아마 후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댓돌은 얼추 다듬은 화강암 외벌대이다. 사랑채는 7칸 一자형 전후퇴집이다. 간살이는 서쪽으로부터(겹으로 배치하여) 앞칸에 약방, 뒷방이 놓이며 다음은(홑으로 배치하여) 복판 좌우2간을 사랑큰방으로, 다음 2칸은 대청, 맨 끝 2칸은 사랑갓방으로 구성하였다. 사랑큰방에서 사랑갓방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고 약방 앞에는 쪽마루가 놓였다. 또한 뒷퇴에는 각 칸으로 나누어「다락」(골방)이 설치되었는데 큰방의 웃칸과 갓방의 머리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바닥을 마루로 했다. 대청 앞문은 모두 분합문이고 나머지는 겹창으로 만들었다.
구조는 2고주5량이며 납도리집이다. 장혀는 처마도리와 종도리에만 덧대고 중도리에는 생략했다. 처마도리에는 단이를 받쳤는데 전면은 직절이고 후면은 빗절이다. 갓 보는 활꼴로서 끝이 고주머리에 맞춰졌다. 대공은 동자주 모양이고 기둥은 네모꼴인데 모접기를 크게했다. 초석은 덤벙주초이며 댓돌은 막돌 허튼층쌓기 두벌대 높이이다. 지붕은 의외로 우진각이다.
대문간은 맞걸이 8칸 ㄱ자형(전면 6칸)집인데 맨아래(동)에 퇴칸을 두었다. 간살이는 동쪽에 뒷칸을 시설하고, 2칸광, 대문간, 광, 다음은 꺾어지면서 헛간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 대문칸은 솟을대문으로 하였고 동쪽 지붕은 둘로 나누어서 층단으로 끼웠으며 끝은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서쪽은 중앙을 모임으로 하고 맨 머리는 박공으로 마감했다. 중문칸은 2칸으로서 모두 대문간인데 바로 진입치 못하고 근사(近似)로 꺾어지도록 칸막이를 만들었다. 구조는 맞걸이이며 모임지붕이다.
이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기 정원이 꾸며졌는데 특히 사랑마당은 정성껏 만들었다. 향나무, 대나무, 감나무, 전나무, 철쭉 및 정원석들이 짜임새 있게 짜여졌다. 그러나 왜색(倭色) 맛을 지울 수는 없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랑마당의 석축과 안마당의 석축인데 전자는 다듬돌 바른층 쌓기이고 후자는 자연석 바른층 쌓기로서 후자의 석축기법은 전래의 깊은 맛을 풍긴다.
가야산방 (kms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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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가옥에 대한 과학적이고 이상적인 면면들을 공부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가치들을 잘 보존해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