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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을 돌아보면서
‘그러나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3:11하, 새한글성경
2021년의 마지막 주간에 나는 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신앙인으로 살아온 자신을 돌아볼 기회다. 지난 2019년 1월 23일에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글을 쓴 적 있다. 이제 3년이 되어간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늘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진지함이 없다면 신앙은 취미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갔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로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정성과 진심을 다해 예배하고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고통 중에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즐거운 일에는 주님의 은총이라 여기고 감사드렸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했고, 결국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것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길로 갈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한번뿐인 인생을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목사가 되어 2012년에 교회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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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비마다 나는 신앙심으로 일어나고 견뎌왔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순간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 한 교회를 담임하고 책임자의 자리에 서고 보니 신앙의 위기를 크게 느꼈다. 물론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나의 인생을 바칠 신앙의 바탕이 될 성경의 진정성이 흔들릴 때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수련회에 가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담임목사로서 교회의 존립을 염려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하나님께 나의 소망을 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입지와 현실은 나의 정당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가에 따라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교인들이 떠나면 결국 목사인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어서 이런 일을 만났나?’ 고난 중에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책하고 두려워할 때 나는 ‘은혜의 복음’을 만났다. 그 복음은 폴 엘리스의 책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2014년 정초에 그 책을 나에게 전해준 사람은 필리핀의 목회자 로니 멘도자(Ronne Mendoza)였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주눅든 신앙인으로 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도 계속 전쟁을 벌이며 29년동안 필리핀의 정글에서 살았던 일본군인 히루 오노다와 같았다.
폴 엘리스의 책은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몇 달에 걸쳐서 그 책을 번역하며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미출간된 나의 첫번째 번역서가 ‘열개의 키워드로 쓴 복음(The Gospel in Ten Words)였다. 나는 그 후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글을 찾아서 읽었다. 그 중에 두 사람 스티브 맥베이(Steve McVey)와 앤드류 팔리(Andrew Farley)의 책을 주로 읽었다. 나는 그들의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서 유익을 나누려고 노력도 했다. 나에게 기쁜 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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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15년에 나는 새소망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내가 집사로 임명 받은 교회이며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사로 섬긴 교회다. 나는 10년만에 본교회로 돌아왔다. 나는 풍파를 많이 겪은 교회에 와서 은혜의 복음을 전했는데, 교우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나 보다. 인생에서 고난과 실패를 겪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은혜의 복음은 인생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적어도 하나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자학적으로 하는 수렁에서 건져주는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이 안정되고 나니 나는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기만 하는 분일까? 주님의 계획과 의도는 무엇일까?’ 수렁에서 빠져나와 의관을 정제하고 나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났다고 할 수도 있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에 대한 갈증은 율법주의의 덫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보다 못하지 않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해 없이 나의 인생과 노력을 바르게 투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아니 무의미한 수고를 했다고 인생의 끝자리에서 후회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온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김세윤 박사 등이 쓴 책,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철수 목사의 책, ‘하나님 나라’도 도움이 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유익이 된 책은 톰 라이트(Tom Wright)의 작품들이었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좀더 넓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휴거에 대한 그의 설명은 나의 신앙 체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적인 천국에 대하여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은혜의 복음’에 대한 여러 책을 번역하고 읽으면서 나는 율법적인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도 하도 나의 뼛속 깊이 박힌 개념이라 바로잡는데 많은 시간과 공부가 필요했다. 나는 설교자로서 강단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씨름을 했고 나 자신과 함께 우리 교우들도 때로는 힘들어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을 바꾼다는 것은 때로는 죽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고통과 혼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은혜의 복음을 배우면서 나는 신앙인이 두려움과 자책에 더 깊이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면서 나는 신앙인의 인생목표가 이 세상을 벗어나 저 세상을 사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 하도 뿌리 깊게 박힌 개념이라서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오해로부터 기독교인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꿈과 그 꿈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어려운 이유는 천국을 영혼이 사후에 들어가는 천상의 세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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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기독교인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자세로 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소수자로 박해받던 시대를 지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본래 세상을 포용하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라고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대신에 잊을 만하면 불쑥 터져 나오는 종말이 임박했다는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의 일탈행위는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내부 모순적인 문제다.
왜 내부모순적인 문제인가 하면, 가장 독실한 신자가 되려고 할수록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내세지향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병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실 이런 문제로부터 신천지 집단도 일어났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제한적이라며 그들은 기존교인들을 미혹한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교회 입구에 신천지 출입금지를 알리는 벽보를 붙이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로서 지금 여기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이미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또는 저기에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는 어떤 세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세상이다. 욕심과 허영만 버리면 누구나 들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인데 죽으면 들어갈 세상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니 그렇게 협박하고 미혹할 때 넘어가는 것이다.
나는 요새 여호와의 증인들과도 논쟁하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포교를 해왔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세상이 지상낙원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그곳은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천상의 왕국이 이 땅에 내려와야 가능한 일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처럼 믿는 자들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이 땅에서 자라날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에덴동산과 성막, 그리고 성전과 이스라엘, 교회 이 모든 것은 사실 온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장소이며 사람들이다.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며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중심이 되는 장소이며 대리인들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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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하여 새롭게 개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받은 질문이 이것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상상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질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모든 문명의 장례 풍습이 그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아무도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공자가 사후세계에 대한 일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정직하고 실리적이다.
성경도 사후세계에 대하여 언급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가문의 묘실에 함께 장례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습을 반영한다. 전도서에는 사후세계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소개한다.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상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은 온 곳으로 갔다는 말이 된다. 그 외에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온갖 상상이 민간에 전해져 온다. 그것은 심판과 형벌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지옥과 천당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면서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온갖 즐거움을 향유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들은 사후세계에 대하여 심각하게 왜곡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고 가엽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회도 오랫동안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해 온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이 땅에서 더불어 살라는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오늘 이 땅에서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이다.
이점이 중요하다. 성경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창조 이야기의 가치이며, 예언자들의 환상과 계시록의 판타지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정들의 이야기와 산타클로스의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든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이야기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물론 너무 약발라서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와 신화들을 무시하고 차갑고 냉랭한 현실에 갇혀 사는 어른들에게 동화는 인생의 교훈을 새롭게 일깨워줄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이야기를 현실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 나의 고민이 있다. 지옥의 실재를 믿지 않는 이가 구제와 나눔의 삶을 외면할 때 겪을 형벌을 두려워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아름다움을 실재로 믿지 않는 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있겠는가? 문자 그대로 창조의 이야기가 진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창조주를 믿고 경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구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창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를 무익한 것이며 또는 해로운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할리우드 영화계는 온갖 판타지의 각축장이다. 인간은 판타지를 먹고 사는 존재다. 꿈은 일종의 판타지다.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길로 안내하는 이야기는 비유와 판타지로 제시될 때 효과적이다. 하지만 악몽도 있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판타지도 허다하다.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반드시 지옥의 이야기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사야가 들려주는 평화와 배려의 판타지는 정말 아름답다. 그는 사자와 어린 양이 더불어 살아가는 판타지를 들려주었다. 그런 미래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바라보고 그런 세상을 동참하고자 한다면 사람은 새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존재다. 낡은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로 대체된다. 더구나 인간에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여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새로운 판타지로 교체되어야 한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세상을 바꾸는 비결이 바로 더 새롭고 더 매력적이고 더 강력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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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돌아보니 인생은 끊임없는 각성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에 옳다고 확신한 것을 지금 돌아보니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고전 13:11, 새한글성경)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무척 가난했고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나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 것이었다. 좀더 성장해서 실패와 고난을 겪으면서 낮아진 자존감을 가진 나에게 위로가 된 것은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인생을 어디에 쏟아야 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고민할 때에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나에게 다가와서 분명한 푯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마다 나의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벗겨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구도자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나의 아집과 편견을 벗고 더 큰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에게 두려움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내가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더 큰 진실 앞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법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렇게 점차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런 성장의 과정에 어떤 일이 있는가? 아이는 성장하면서 고통의 길에서 고민을 해야 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기도하며 생각을 해야 한다.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하고 자기 양심의 소리도 들어보아야 한다. 배움과 소통을 멈추면 결국 사람은 아집과 편견이라는 껍질에 갇히고 만다. 그만큼 자유를 누릴 수 없고 그 껍질이 깨어질까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인생은 끊임없는 구도의 길이라고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거나 이미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2)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이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노라고 구도자로서 새롭게 깨달은 경험을 들려준다. 그는 전에 율법에 기초한 의로움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움을 획득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리새인으로 자라던 청년 사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도의 길을 걷고 새 사람이 된 과정은 그의 편지 곳곳에서 진솔하게 드러난다. 인생은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아닐까?
<끝>.
참고로 전에 쓴 글과 최근에 쓴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2019년 1월에 쓴 글:
산 중턱에 앉아서 생각한다… 독서의 여정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305
최근에 쓴 글: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대한 유감1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559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대한 유감2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