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 : 2016. 4. 9(토). 답사지역 : 충북 제천(금왕봉, 정방사)
청풍호 맑은바람이 꽃향기와 어우르니
이 종 월
화사한 꽃 치장을 한 벚나무가 막 도착한 일행을 웃음으로 어루만지듯 가지를 늘이고 있었다. 정오를 넘긴 봄볕마저 몽실몽실 느끼게 골짜기 가득 진을 치고 객을 맞이했다. 봄은 꽃을 피워 새로움과 신선함을 알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청풍호를 안고 병풍처럼 길게 둘러쳐진 금수산 자락에 이르는 자드락길을 걸었다. 사람이 드문드문 다니는 한적하고 풍경 좋은 오솔길이다.
길 따라 늘어선 나무들도 잠에 든 고즈넉한 숲을 도란도란 일행이 흔들어 깨웠다. 봄은 빛과 함께 소리로도 오는 성 싶었다. 지척에서 속살거리듯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풍경까지 불러와 일행을 반겼다. 청아한 소리에 티끌 섞인 생각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듬성한 마음에 끼어드는 상념들을 그냥 눈빛으로만 보냈다.
여인의 앞가슴 모양을 닮은 바위사이를 은근히 훑고 더듬던 물줄기는 탄력 있는 종아리를 지나 능강교 밑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흐르지 않으면서도 흐르는 잔잔한 그 물 얕은 계곡에 나는 눕고 싶었다. 세월을 두른 어머니 가슴처럼 너른 바위다. 한 발 한 발 무거운 몸을 지탱하여 이끌고 가는 내 발밑에서 꿈틀대듯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는 꿈도 가져보았다.
이 골짜기에도 추위와 눈까지 겹치던 겨울은 봄비에 밀리어 벌써 떠나 간 것 같았다. 어린 나무마다 새 순이 생긋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아래에는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숨 멎어 누워있었다. 한갓 초목도 계절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보니, 삶에 얽매여 미지근한 것들에 대해 나만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산길은 진달래꽃에 눈을 밝히며 쉬엄쉬엄 걸어야 했다. 이 번뇌한 세상에서빨리 빨리에 길들여진 조급증은 벗어 내려놓고 느릿한 길 위에 마음을 굴리며 걸었다. 저 산자락에 얹힌 한 점 조각구름처럼 속을 비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연일랑 접고 걷는 게 길이 주는 가르침일 거라는 생각도 얼핏 들어왔다.
이런 저런 사념에 젖어 오르다보니 길은 어느 덧 커다란 두 개의 바위 사이로 지나며 긴 세월 기다린 듯 정방사(靜芳寺)가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이런데서 홀대받기에는 범상하지 않은 돌 같아 앞서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일주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절간에 들기까지 흔히 서있는 단청으로 기둥을 두른 문을 보지 못했다.
천년사찰 지붕위에 또 하나의 바위지붕이 하늘을 가리듯 앞으로 뻗치어 있었다. 아래로는 바위가 마당을 만들고 집을 받치고 있어 마치 석굴 안에 절이 들어가 있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주변 사방의 바위까지도 기기묘묘한 형상들을 짓고 있으니 어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허수로이 들을 수 있었겠는가.
제천 정방사는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2년(66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정원 스님이 창건하였다. 스님은 십여 년 천하를 두루 다니며 공부를 하던 중 제행무상(諸行無常),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은 단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앎과 다르지 않고, 부처와 중생의 근본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윽고 의상대사께서 던진 지팡이를 찾아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지금의 자리에 내려앉아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절 주위로는 겹겹이 아름다운 산이 둘러 싸였다. 맑은 강이 흐르는 곳에 우뚝 솟은 억 겹의 바위로 마치 하늘 세계의 궁궐과도 같았다. 금수산과 청풍강의 맑은 물과 바람이 꽃향기와 어우러져 천 여 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몸피가 굵은 나무들 사이로 갖가지 사연을 담은 시간들은 이어서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오르던 자드락길은 여기까지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의례히 절이 있기 마련이 아니던가.
생각하지도 못한 행운을 잡은 듯 일행의 얼굴마다 반들반들하게 기쁨이 번져있었다. 세월로 곰삭은 삶 속에 묻어 둔 울분과 시름마저도 이곳에서 씻기어지는가 싶기도 했다. 이런 절간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왜 꽃보다 산을 좋아하는지 그 까닭이 비로소 풀리는 듯 했다. 꽃은 화려하나 진득하지 못해 믿음이 덜하나, 산은 사시사철을 두고 흐트러짐 없는 생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자비를 베푸는 부처의 마음인양, 목마른 이를 기다리는 석간수가 돌샘 가득 넘실했다. 그 옆에 표주막이 나를 보고 눈짓을 하고, 주위에 빙 둘러 서있는 사람들도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왔다. 석간수 한바가지를 단숨에 들이 키니 세속에 찌든 먼지가 씻기어 내려가는 듯 가뿐해졌다.
마침 곁에서 물을 떠 마시던 사람이 제법 아는 체를 하며 내 마음을 당겼다. 어디를 가나 세 사람 가운 데 한사람은 스승이라 했으니 이분이 바로 스승인가 보았다. 스승님(?)의 말씀 따라 해우소에 들어가 보았다. 사진틀처럼 네모난 나무창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담기어 들어왔다. 운무가 깔리어 흑백사진처럼 희끄무레한 청풍호는 아쉬움으로만 남겨야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일 것이라 위로하며 발길을 옮겼다.
청풍호를 바라보니 나옹선사의 시 한 구절이 호수가 불어주는 바람에 실리어 와 가슴에 새기는 듯 했다.
청산은 날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청풍은 날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선이란 우리 같이 삶에 매여 사는 사람의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편하게 해주는, 머리에 담은 앎과 창자에 담아야 사는 밥을 대신하는 무엇이 아닐까? 사랑도 미움도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 온 길을 뒤돌아 내려다보았다. 이내 마음은 비바람에 신바람이 난 듯 잎 파래진 초목처럼 물오른 나무가 되었다.
첫댓글 그날의 풍광과 감성이 다시 살아납니다. 되돌아보며 님의 상념을 얹으니 새롭게 다가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