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황등행 열차는 20시에 떠나네.(제91회)
"그그그...그렇지, 내가 키우고 있는 사사사...사조직 문제는 우리를 부른 구실이고 각하의 해해해...핵심의중은 바로 그거야!"
유비손은 이 또한 박정희의 수법이라는 것을 어디 한두 번 경험했던가? 엉뚱한 것으로 화제를 삼아 빙빙 돌리다가 정작 핵심복안은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던지고 자리를 털어 버리는 박정희의 수법!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불쑥 그 결과를 확인한다. 그때, 그 결과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불벼락을 내린다. 그래서 박정희와 독 대를 할 땐 항상 흘리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된다.
"그렇습니다. 부장 님, 김대중 문제는 저에게 맡기십시오. 그를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여기에 유비손은,
"처처처...처치라니?! 이거란 말인가?"유비손은 엄지를 세웠다가 좌측으로 젖히며 경악했다.
"네, 그렇습니다. 각하의 뜻이라면!"
"그그그...그러지 말고 그냥 안 죽을 만큼 혼만 내주는 것이 조조조...좋지 않겠어?!"
"아닙니다. 그자가 있는 한 각하의 심기는 항상 불편하실 겁니다. 그리고 부장님께서도 윤필용 소장 사건으로 실추 된 신뢰를 회복하시려면 그 처리를 확실하게 해 두실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노삼택의 의중은 이미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그그...그런데, 만약 실패 할 경우 그 뒤뒤뒤...뒷감당은?"
"그 모든 것은 어떤 신의 뜻에 맡기고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겁니다."
어떤 신의 뜻??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알게 하는 것도 신의 뜻일까?? 하긴 그런 '노망난 신'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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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김대중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그 한참 전 교통사고를 위장한 제 1차 김대중 살해 기도 설을 돌아보자. 그것은 3선 개헌 후에 치러진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다.
------------(1971년 5월24일 오전 9시 반경 전남 무안군 삼양면 대양리 앞길에서 목포를 떠나 광주로 가던 신민당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의 승용차 서울 자3-8797호 크라운(운전사 양승만·28)이 앞에서 오던 경기 영 7-4755호 트럭운전사 (권중억·36)을 피하려다 높이 2m의 길옆 개울로 처박혀 金씨는 오른손에 찰과상을 입고, 비서실장 (이명우·45)씨와 비서관 권노갑(권노갑·45)씨가 각각 중경상을 입었다.
또 뒤따라오던 목포 다니엘 회사 소속 전남 영 1-2160호 코로나(운전사 최정로·29)도 이 트럭과 정면 충돌, 운전사 최씨가 현장에서 숨졌다. 김씨는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열차 편으로 서울로 떠났다.)---------이것은 그 사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요약 한 것이다.
아무튼, 그 사건이후, 김대중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피신한다. 그런 와중에 그는 일본에서 유신을 맞는다. 그 후 그는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한다. 이후, 그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진행한다.
당시 국내 상황은 유신반대 발언을 하는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김대중을 철저히 배척한 가장 큰 원인은 3선 개헌 후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가 참신한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어필된 점이었다.
즉, 민중들은 그 동안 지배 계급 내에서의 여야 투쟁만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러한 민중들에게 김대중의 출현은 진정 자신들을 위한 정치지도자로 각인되어 열광한다. 이로 인하여 박정희는 정권유지 불안과 김대중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박정희는 김대중을 제거대상 최우선 순위로 정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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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1973년 8월 8일,
운명의 그 날! 김대중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도쿄, 지요다 구 이이다바시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호텔, 바로 옆방인 2211호실에 묵고있던 유신 전, 한국민주통일당 대표 양일동의 점심초대를 받고 호텔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끝내고 본인의 숙소인 2212호에 돌아온 순간 건장한 청년들에게 기습을 당해, 바로 옆방인 2210호실에 감금당한다. 김대중은 그 방에서 마취제를 묻힌 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 막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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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 발생 25년만인 1998년 2월18일자 동아일보는 그 사건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 내용 중 사건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이철희씨를 동아일보취재기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 한 것을 요약해본다.
<사건 지휘 내막>
-이후락 부장, 궁정동 안가로 이철희 차장을 부름.
-일본에 있는 김대중 문제 이후락이 꺼냄.
-죽이느냐? 살리느냐? 문제도 나옴.
-이후락이 동경에 있는 김대중을 무조건 데려오라고 명령.
-하태준 국장과 이철희가 두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이후락은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고 핀잔하여 어떤 상부 지시가 있는 것 같아 반대할 사안이 못된다고 판단 함.
-박정희의 지시라는 말은 이후락으로 부터 직접 듣지 못함.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총괄하고 윤진원 공작단장이 현장 지휘를 했으며 김기완 주일 공사 등이 동원됨.
-동원된 인원은 총 46명, 1개조에 5명씩 9개조로 편성.
<납치 계획 실행 과정.>
-사전 미행 실시.
-1973년8월8일 13시 19분, 현장 납치 조 행동 개시.
-6명이 김대중이 묵고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실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온 김대중을 납치.
-2210호로 끌고 들어감.
-침대에 눕히고 마취제를 묻힌 수건으로 코 막음.
-엘리베이터에 실어 지하주차장으로 감.
-행동대 행동 개시, 동경에서 오사카로 호송.
-대여섯 시간 후 오사카 오카모토 빌딩 302호 주일 대한민국 총영사관 안가 도착.
-안가에서 도쿄에서 온 4명과 박승민 김기도 합류
-엘리베이터로 다른 다다미방으로 이송.
-김대중의 코만 남기고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전부 포장.
-차에 태워 오사카 부두로 감 (운전사 안용덕과 납치범 4명 동행.)
-부두엔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 대기중.
-이동 조 행동 개시.
-9일 새벽 한 시경, 김대중 용금호에 납치.
-눈에 안대, 검은 보자기에 김대중을 전신을 말아 로프로 묶어 선창 밑, 타기 실에 감금.
-자해 못하도록 붕대 감은 막대기를 재갈로 끼웠다가 막대기 제거.
-일반 선원들은 무슨 일인지 전혀 몰음.
-이튿날인 8월9일 오전 8시 45분 오사카로 출발.
-관문해협 통과.
-같은 시간 한국에선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박정희를 만나 풀어줄 것을 요청.
-10일 현해탄 건넘.
-11일 밤 부산 도착
-12일 오전 7시 부산 부두 진입
-부두에 김진수 중정 일본과장. 강재원 공작과장. 윤석만, 김선대 의무실장 등 나옴.
-신상 체크
-부산에서 서울로 엠브란스 위장 차로 호송, 안가 감금
-하태준이 직접 와서 김대중임을 확인
-다음날 이휘윤 소령. 강제원. 과장 등이 김대중의 동교동 집 앞에서 그를 풀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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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약, 1973년, 8월 9일,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가 박정희에게 김대중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실종 된 김형욱의 꼴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 납치사건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1998년 2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이 때문에 그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니면, 압송된 김대중을 以心傳心的 反國家團體組織可能罪(이심전심적 반국가단체조직가능죄)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정희 시절에 발생한, 3대 미스터리 즉, '정인숙 피살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김형욱 실종사건'은 아직도 그 확실한 진위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인가? 정말 궁금하다.
'춘향가' 판소리 여섯 마당 중에 가장 궁금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춘향이가 암행어사 이 도령을 다시 만나 남원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이후에 관한 것이다. 그 대목에 대하여 춘향전은 다음과 같은 사설(辭說)로 끝을 맺는다.
"그 뒤야, 뉘가 알랴! 더어딜 더어딜 더어딜."
그렇다. 위에서 말한 그 3대 미스터리도 "그 진실을 뉘가 알랴. 더어딜 더어딜 더어딜"이다.
소설을 흔히 팩션 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필자인 나는 이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그때, 그 사건을 어디까지나 '사실과 지어낸 이야기'로 재구성해 볼까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건들도 당시 최고 권력자의 편에서 써 놓은 소설이 아닌가? 나는 그 반대쪽 시선에서 관찰하며, 이 소설을 이어갈까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