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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6:1-9절) 관계의 회복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마7:16절)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과일 나무가 아닌, 보통 나무에서 과일이 맺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시나무와 같던 우리 자신이 포도나무로 변했고, 엉겅퀴와 같은 우리가 무화과나무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다른데서 열매를 한두 개 빌려서 자기 나무에 달아 놓고*열매를 맺었다*고 자랑하고, 또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우선 철저히 변화시켜,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되게 하십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지만, 속에서 흐르는 진액(津液)은 포도의 잔액과 사과나무의 진액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무슨 열매를 맺게 될까? 그것은 곧 *사랑의 열매요, 겸손의 열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權力)을 갖고, 돈을 많이 모으면, 축복받은 것이라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얼매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멋없게 보이는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참 행복(幸福)이란? 부부간의 진정한 사랑과 신뢰회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열매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춘기나 청년기가 되면, 이성(異性)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사랑의 열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의 열병마저 없으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적인 짐승으로 살다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껍질을 깨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속에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사랑은 정욕적인 사랑이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즉 상대방을 차지하고, 빼앗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열정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점점 식어지고, 다시 자기중심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정욕적인 사랑을 찾아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이런 정욕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에 옷을 벗고, 진정한 사랑에 헌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열정이 지나간 후, 자기중심적이 되고, 정욕적인 사랑을 하려는 것에 제동을 걸고, 끝까지 이 사랑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편이나 아내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고, 자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은 진정한 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받아들여, 순종과 지혜로 남편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공하도록 섬겨주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귀부인의 모습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싼 옷과 보석으로 꾸며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부인도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안과 밖이 모두 온전한 귀부인이 되도록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살펴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이런 부부 사이의 사랑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매는 사회 속으로 계속 확대되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몇 가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①신앙 안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직적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후, 이전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②자식과의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기초입니다.
③세상 속에서 상전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④자기 아래 부하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Ⅰ.아버지와의 관계 회복
우리에게 아버지는 참으로 어려운 분입니다. 물론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경제적 도움을 받아 이렇게 성장한 것은 틀림이 없지만, 때로는 아버지는 무서웠던 분이고, 때로는 우리 마음에 상처를 준, 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예수를 믿지 않고, 신앙을 반대한 아버지의 경우는 더욱 어려운 분입니다. 한때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대단히 비난을 받던 단어였습니다. 즉 집에 매일 늦게 들어오고, 그나마 술에 취해 들어오고, 자식들의 고이자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새벽 같이 출근하는 사람이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실직하거나, 명예퇴직을 하여 더욱 불쌍해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중,*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6:1-2절)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후, 아버지를 새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공경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부모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공경하라.*는 뜻은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진정으로 존경하는 위치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한다.*고 할 때, 그 안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은 오직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도움 없이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세전애 우리를 계획하셨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는 부모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역할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는 거의 하나님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즉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의 헌신적인 도움 없이는 생존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보면, 무섭고, 그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연세가 들면서 그의 권위가 차차 없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중에 많이 늙었을 때는 오히려 자녀가 돌보아 주어야 할 정도로 허약해 집니다. 그 이유는 부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세의 얼굴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졌던 것처럼, 부모에게 있던 하나님의 영광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고, 그의 사랑과 헌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 것,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그렇게 순종한 부모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때는 아버지를 경쟁의 대상이나, 대결의 상대로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자신의 어린 아들로 생각하고, 명령만 하지, 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에게 반발하고, 아버지와 대결해서 이기는 것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출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이 집을 나가 봤자, 죽도록 굶고, 고생스러우니까 결국은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육신의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가 12살 때, 성전에 올라갔다가 집에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가출인 셈입니다.
집에서는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야단을 맞고 난 후에 갈릴리로 따라가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 생각으로는 성전에서 성경 토론하는 것이 곧 하늘에 있는 아버지 뜻에 맞는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하여 집에 가서 목수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만난 후, 어떻습니까? 육신의 아버지께 받지 못했던 좋은 것들을 하늘 아버지가 채워주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고 난 후, 더 여유가 생겼고, 더욱 겸손하게 되어 육신의 아버지를 더 존경하고,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도 나름대로 아버지의 노릇하느라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알아주고, 위로해 줄 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므로 세상의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부모나 직장 상관들에게 불순종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를 광신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감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종교적 열정을 *참 신앙*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순종함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묘미입니다.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지게 되면, 더욱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즉 우리가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눈물이 있고, 감정에 있고, 정상적인 분별력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부모를 부모로 알고, 공경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신비적 체험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깊은 신앙의 세계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생활에서 약속들을 잘 지키고, 더욱 아름다운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란 부모를 무시하고, 교만한 영성이 아니라, 부모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어른 역할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어른이 된 후에도 더욱 어른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이요, 아직도 마음속에 죄 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가르쳐 주고, 의논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어른이 되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야단을 치는 사람도 없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상담할 대상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자신이 결정해야 하고, 자신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해관계에 얽히고 설킨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무조건 사랑하고, 변함없는 애정으로 바라보시는 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마음에 큰 위안을 얻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1절)...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말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하나님을 잘 대변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말씀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말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인지 되면서 특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점점 차이가 있습니다. 즉 어떤 부모는 자식이 선교사나, 목회의 길로 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기도 합니다. 또 신앙을 가진 자와 결혼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특히 부모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고난의 프로그램에 집어 넣으셔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이때 우리는 육신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불효자식이 되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녀들은 권위적인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받아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도 사람이므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 마시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마음을 닫고, 살다가다가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난후에 아버지를 찾아가 화해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이런 화해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자기 자신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입니다.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잘해 주어도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상처가 치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2-3절)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 중, 제 5계명을 말합니다.
출20:12절)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줄 땅이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느냐? 는 곧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느냐? 공경하지 않느냐?* 하는 이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잘 공경하여 살면, 오래오래 복을 받으면서 잘 산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겸손의 미덕을 가진 것이요, 자신과 화해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겸손한 사람을 신뢰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엄청난 재산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저 사람은 괴팍한 사람이요. 언젠가 배반할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아마 끝까지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공경하고, 자기 안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신뢰가 갑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십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사람이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든 복을 다 받게 되어 있습니다.
Ⅱ.자식과의 관계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부모는 자신들의 문제에 빠져서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거나, 아예 가정 자체를 내 팽개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주위에서 정말 남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우리가 산에 올라갔다가 아주 예쁜 호랑이 새끼 한 마리를 주워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면, 그 호랑이 새끼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그 호랑이 새끼는 작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맹수의 본성이 있습니다.
호랑이를 길들인다고 자꾸만 때리면, 그 호랑이 새끼는 일찍부터 사나워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이나 주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나중에는 주인을 물어 죽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랑이에게 먹는 것을 주면서 애정을 표현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인의 의사를 알아듣도록 반복적으로 훈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 교육은 무엇보다 인간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한편으로는 귀엽고,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부패한 죄인의 본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정도를 넘어 악을 쓰면서 우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잘못된 영향을 받으면, 죄성에 많이 자극을 받아 아주 악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교육이 어떤 부분에 치중되어 있습니까? 주로 기능 교육에 치중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나 수학. 아니면, 피아노나, 태권도를 배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능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성 교육입니다. 크리스천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즉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마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난 것보다 더욱 복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아이 안에도 죄의 본성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이를 키우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3: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식물은 자랄 때, 누군가가 씨를 뿌리고, 또 누군가가 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 식물이 자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자랍니다. 그럼 누가 그 나무를 자라게 할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부모는 어디까지나 보조하는 사람들일 뿐, 아이가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먹는 것을 마련해서 먹입니다. 그리고 좋은 책들을 구입해서 아이에게 읽어줍니다.
그러나 사실 부모는 아기가 어떻게 자라는지 잘 모릅니다. 이것은 부모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 부모가 하는 것을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사실 아이들의 알고자 하는 욕망은 많습니다. 즉 무엇이든지 다 알려고 하고, 배우려고 합니다. 때로는 어른들의 지나친 욕심이 아이들의 배우려는 의욕을 꺾을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일일이 모든 것들을 다 신경 써야만 잘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 부모의 지나친 염려와 걱정이 오히려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잘 자랄 아이를 부모가 쓸데없이 간섭하고, 개입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이상한 방향으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착한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부패한 본성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자기의 귀여운 아이가 결코 천사가 아니라, 그 안에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어서도 안 됩니다.
자녀에게 어떤 제안 안에 놀아야 하고,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즉 무한정으로 놀게 한다든지,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게 한다든지, 혹은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전혀 통제받지 않은 아이들이 행동하는 것은 별로 귀엽지 않고, 심술궂고, 예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부모는 아이들로 하여금 남의 물건을 탐내지 못하게 하거나, 식사를 할 때, 돌아다니지 말고, 먹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야합니다. 또 잠이 올 때는 자고, 장난감도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아이들이 알면서 잘못된 일을 할 경우는 야단도 쳐야 하고,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야 할 때는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제한 당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런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쓸데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4절)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의 욕망은 어느 선에서 저지를 당해야 하는데, 그때 마음속에 분노가 생겨나게 됩니다.
부모는 친절한 설명과 애정어린 설득으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아이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게 될까?
부모의 가르침과 징계가 어린 나이에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형평성을 잃었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 자신이 생각해도 분명히 잘못을 했는데, 그 잘못에 합당한 야단과 매를 맞는다면, 분노하지 않고 꾹 참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심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될 때, 분노하게 됩니다. 즉 지금은 힘이 없어서 당하지만, 나중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한 번 했는데, 두 시간씩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게 한다든지, 아니면 밥을 먹다가 음식을 좀 흘렸는데, 화장실 안에 불을 끄고, 한 시간씩 있게 한다든지, 혹은 말대꾸를 했다고, 온 몸에 멍이 들 정도로 맞았다면, 이것은 이미 자녀를 노엽게 한 것이요, 자식은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부모에게 겸손해야 하겠지만, 부모도 아이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5:21절)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어느 한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쌍방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겸손한 것이 어떤 것일까? 아이들 앞에서 부모라고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며, 이번 일은 엄마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분노하는 상태에 빠져 있으면, 우울증 증세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만나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싸울 때, 그 집 아이들은 주의력이 산만하고, 어른이 뭐라고 말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이에게 잘못한 것 이상으로 그 아이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맹수한 마리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이의 성격에 문제가 있고, 불안해 보여도 앞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4절)...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양육한다.*는 것은 필요한 것으로 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내의 경우, 남편이 아내의 영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 주어야하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어야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채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줄 때, 안심하게 되고, 무슨 일을 해도 덜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고,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우연한 사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들에 다 신경을 쓰면서 자라야 한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살지 못합니다. 부모는 아이를 자기의 분신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의사가 되려고 했다가 못했기 때문에 의사가 될 것을 강요한다거나, 법관이 되려고 했다가 실패했는데, 아이를 법대에 억지로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하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억지요, 욕심입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있습니다. 부모는 일정 기간 동안 맡아서 잘 돌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미 청소년 시기가 되면, 부모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이것은 이미 부모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런 기회에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고, 기왕 놀려면, 떳떳하게 놀 수 있게 해 주여야 합니다.
Ⅲ.새로운 사회의 발견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①남녀 사이의 사랑과 헌신의 회복. ②내가 존경하고 복종해야 할 대상.
③내가 가르치고 돌보아야 할 대상.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기본 훈련을 받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사랑과 축복과 겸손과 돌봄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이 세상 헌실 속에 들어가서 이 세상 현실을 인정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5-6절)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지성인과 귀족과 심지어 천사보다 더 존귀한 자들이 이미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이 노예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신앙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과 이 세상 현실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습니다.
즉 함께 예배드리고, 은혜를 나눌 때는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인데, 세상 현실로 돌아오면, 그때는 노예요, 가장 비참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고, 영적 능력이 대단해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즉 절대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예인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자신을 노예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곧 심판이 온다* 면서 예언이나 하면, 주인은 이 종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려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이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차별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더 높아지고, 더 부자가 되는 것을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쳐 복종시킬 때, 그리스의 항기가 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보석이 되었으니까 더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있는 그곳에서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사실 주인이 대단한 것 같지만, 주인도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닙니다.
종이 주인을 인정해 주고, 겸손하게 복종할 때, 주인은 이 종 때문에 엄청나게 높아지게 되고, 또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8절)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주인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런 됨됨이를 보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인정하시면, 그때부터 기적의 축복이 계속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9절)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고, 상전 노릇 하기를 좋아 합니다. 왜냐하면 밑에서 죽도록 일하는 것 보다는 위에서 큰 소리 치면서 명령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명하게 되었을 때, 이 세상에서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끝까지 변치 않는 보석같은 믿음의 성도들 다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가정의 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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