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의 의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慈善)은 한자어입니다.
자선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베풀다, 베푼다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실’과 연관된 어원입니다. ‘베’라는 것은 의복의 재료인 천이나
직물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명주실, 무명실 등의 비싼 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풀다’를 직역하면 ‘옷의 실을 푼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위해 비싼 옷의 실을 풀어서 이웃들에게 나눈다.’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벼’와 연관된 어원입니다. ‘베’는 벼의 방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베푼다.’는 것은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웃들에게 벼를 나누어주기
위해, 벼를 묶고 있는 줄(실)을 푼다.’라는 말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선(慈善), 베풀다와 베푼다는 말들이 왜곡되어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혹은 재물에 대한 권력을 가진 이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시혜적(은혜를 베푸는) 행동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좀 가진 사람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공동체 유지 및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곧 모든 구성원의 공생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콩을 심을 때도 세 알 정도 심었다고 합니다.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에게, 한 알은 하늘의 새들에게,
그리고 한 알은 사람들의 몫으로 심었답니다.
조상님들은 이렇게 자연과의 공생을 위해 나누고 살았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도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하다면 남에게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자선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쓰고 남는 것을 베푸는 행위는 참된 자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심 쓰듯이 자선을 베풀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재능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또한 이웃들의 도움이나 양보,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내가 가진 재화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글 : 서철승(가롤로) 신부 – 전주교구
너는 내 밥이여!” - “내가 네 밥이 되어줄게!”
살기가 힘들어도, 한 해의 끝자락과 다시 시작하는 새해 첫날을 의미 있게 지내려고 준비해봅시다.
지는 해와 뜨는 해를 맞아보겠다고(송구영신送舊迎新) 해안가나 산을 찾아 나서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2021년도 교구장 사목교서(司牧敎書)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례(聖餐禮)를 제정하시며 하신 말씀이십니다. 내가 너희 ‘밥’이 될 터이니,
그러한 나를 기억하여 성찬례를 하라는 당부말씀으로 저는 알아들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당신 몸을 ‘밥’으로 내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면서 이웃을 초대하며 푸근하게 살았습니다.
성찬례 제정의 본디 의미도 그런 마음과 멀지 않을 것입니다.
곧,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을 챙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와 만나는 사람들을 그냥 ‘밥’으로 봅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해
관계가 없어도 기회만 닿으면 ‘제 밥’으로 만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많이 가진 사람들 가운데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대며 제 앞에 큰 감 놓기에 혈안이 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가 자꾸만 팍팍해집니다. 그런데 부부부터 시작해서, 부모와 자식이, 친구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면, 거기에 곧 평화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끼리 만이 아니라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푸근해집니다. 너부터 하라고 다그치지 말고 내가 먼저 그래봅시다.
세계적인 대 감염병 코로나19, 아무리 보아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내적 평화를 잃지 않도록 기도하고, 생태계의 질서 회복을 위하여
환경을 지키며, 또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방편 하나를 제안해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내맡기는 수녀님들이 오로지 모금에 의지하며 운영하는
‘성 요셉 동산 양로원’(전북은행 505-13-0314880 천주교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익산에서 문을 연 ‘요셉식탁’(신협 134-004-094887 천주교유지재단)에
한 달에 만 원 이상 후원하십시다. 나누면 따뜻해지는 기부천사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전례력으로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 곧 대림(待臨)시기를 앞둔 한 해의 끝자락에 교회는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를 챙기라”는 마태오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로마 15,1)라고 일러줍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많이 가진 사람이 나약한 이들을 보듬어 안으라고 말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입니다. 나의 모자람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새해에는 보다 넉넉하게 지내십시다.
뱀발(사족蛇足); 주치의(主治醫)께서 “이제 나는 먼저 떠나갑니다.”해서 놀랐다고
말을 걸어주어서 기뻤습니다.
세상만사,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십시다.
- 삼천동성당 월보 두레마당 2020년 12월치 중에서 -
글; 한상갑 바오로 / 전주 삼천동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