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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菩薩의 十種取
佛子야 菩薩摩訶薩이有十種取하야 以此不斷諸菩薩行하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取一切衆生界니究竟敎化故며取一切世界니究竟嚴淨故며 取如來니修菩薩行하야 爲供養故며取善根이니 積集諸佛相好功德故며取大悲니滅一切衆生苦故며取大慈니與一切衆生一切智樂故며 取波羅蜜이니 積集菩薩諸莊嚴故며取善巧方便이니 於一切處에皆示現故며取菩提니得無礙智故며 略說菩薩이 取一切法이니 於一切處에 悉以明智로 而現了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取하면 則能不斷諸菩薩行하야 得一切如來無上無所取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취(取)함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모든 보살의 행을 끊지 않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중생계를 취하나니 끝까지 교화하는 연고며, 일체 세계를 취하나니 끝까지 깨끗하게 장엄하는 연고이니라.
여래를 취하나니, 보살의 행을 닦아 공양하는 연고며, 착한 뿌리를 취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쌓는 연고며, 크게 가엾이 여김을 취하나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는 연고며, 크게 인자함을 취하나니 일체 중생에게 일체 지혜의 즐거움을 주는 연고이니라.
바라밀다를 취하나니 보살의 모든 장엄을 쌓는 연고며, 공교한 방편을 취하나니 모든 처소에서 다 나타내 보이는 연고며, 보리를 취하나니,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는 연고이니라.
간략히 말하면 보살이 모든 법을 취하나니 모든 처소에서 밝은 지혜로 분명히 아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취(取)하는 데 편안히 머물면 모든 보살의 행을 끊지 않고 일체 여래의 위없고 취할 바 없는 법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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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취(十種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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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열 가지의 취착이라. 붙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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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취(有十種取)하야 : 열 가지 취착함이 있어서, 보통 12연기를 보더라도 좋아하면 취하게 되어 있다. 애(愛)취(取) 유(有) 이렇게 가잖는가. 좋아하는 것은 딱 잡게 되어 있다.
이차부단제보살행(以此不斷諸菩薩行)하나니: 이차부단제보살행한다. 꽉 움켜잡고 취한다. 보살도 좋아하면 딱 붙잡는다. 사람도 일도 내 좋아하는 거에 딱 달라붙게 되어 있다. 완전히 못을 박아 버린 것이다. 그것을 취라고 한다.
몸에 익숙하듯이 생각에 배는 것이 취다. 마치 된장이 익어가면서 메주 냄새가 싹 빠져 버리고 된장으로 팍 익어가듯이, 과일이 풋맛이 없어져 버리고 새콤달콤한 과일 맛이 제대로 팍 배기게 되는 것이다. 절에서는 못 먹는 건데 젓갈 같은 거 팍 삭아서 비린내가 싹 사라져 버리고 젓갈로 콤콤하니 삭아가듯이, 사람이 성숙되어서 완전히 보살행이 몸에 푹 익어진 것, 성숙된 것이 취라고 할 수 있겠다.
하등(何等)이: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소위취일체중생계(所謂取一切衆生界)니 : 이른바 일체 중생계를 붙잡나니 그러니까 보살행이 몸에 무르익어서 일체 중생계를 붙잡나니
구경교화고(究竟敎化故)며 : 끝까지 교화하는 연고이고
취일체세계(取一切世界)니 : 세계를 붙잡는다.
능엄경 같은 데는 ‘세계기시, 중생기시, 업과기시’ 꼭 그렇게 나온다.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위에는 세계보다 몇 백만 배나 더 많은 중생이 있다. 또 몇천만 배나 더 많은 중생의 업과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를 붙잡나니
구경엄정고(究竟嚴淨故)며 : 끝까지 깨끗하게 장엄하는 연고이고, 기세간, 중생세간의 그 세간을 다 툴툴 털어버린다는 것이다.
취여래(取如來)니 : 부처님을 붙잡나니 어쨌든지 부처님한테 달라붙는다. 우리는 붙잡을 거 안 붙잡을 거 엉뚱한 데 달라붙지않는가. 여래를 붙잡나니
수보살행(修菩薩行)하야 : 보살행을 닦아
위공양고(爲供養故)며 : 공양하는 연고이다.
‘부처님을 잡는 방법이 뭐냐? 아, 보살행을 닦아서 공양하는 것이구나’ 이런 대목은 눈물이 쑥 빠지려 한다. 가슴이 막 찌릿찌릿 흔들린다.
취선근(取善根)이니: 선근을 붙잡나니, 부처님들의 모습과 선근이라고 하는 게 뭐냐?
범어사에 올라가면 의상교 옆 큰 돌에다가 이름 하나를 새겨 놨다. 김선근(金善根)이렇게 새겨 놓았다.
김선근. 범어사에 있다.
범어사 오른쪽에 보면 김선근 거기서 삼사 미터 왼쪽으로 가면 김영덕(金永德) 영원한 공덕이라고 새겨져 있다.
저는 김선근이라 안 읽고 김영덕이라고 안 읽는다.
황금 같은 금선근, 금영덕이라고 읽는다.
만해 한용운님의 시처럼 ‘황금같은 맹세’ 철석같은 맹세가 아니고 황금같은 맹세, 우리는 황금의 서원을 사홍서원이라 한다. 범어사에 딱 올라가면 일주문 기둥이 네 개 확 박혀 있다. 사홍서원이다.
강의가 달라서 그런데 어떤 분이 ‘사홍서원이 뭡니까’ 하고 물어서 아레 강의할 때는 한번 해 드렸었다.
교리를 가르칠 때, 불교의 결론은 사홍서원이다.
그러면 사홍서원의 제일 출발점이 어디냐?
어디에서 씨앗이 뿌려져서 사홍서원의 열매, 결과물을 맺게 되느냐? 사성제다. 고집멸도(苦集滅道)가 나중에 자라서 사홍서원이 된다.
고(苦)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사성제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된다. 중생의 고통을 다 없애 주려다 보니까 중생무변서원도가 된 것이다.
집(集)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모이는 걸 집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집을 없애버리는 것이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다. 번뇌가 다닥다닥 보이는 걸 털어버리는 것이다.
멸(滅)이라고 하는 거는 뭐가 되느냐?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 된다. 적멸의 세계를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나중에 사홍서원의 불도무상서원성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뭐냐? 정법, 정도를 배운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이 된다.
고집멸도 작은 씨앗이 이렇게 나중에 사홍서원이 된다.
사성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밀행을 닦으면 종래에 가서는 중생이 감히 꿈도 못 꾸는 것을 이룬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교는 사성제와 12연기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데 그 사성제가 완전히 자라난 것이 사홍서원이다.
스님들도 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또 남을 가르쳐야 되는 입장이니까 스님들께서는 그런 것을 일일이 치밀하게 연구하고 공부하셔야 된다. 어렵고 힘들 때는 대장경속으로 들어가면 답이 거기에 다 있다.
불교는 지금 연구해야 될 게 아무것도 없다.
연구는 이미 다 끝났고 완성되어 있다.
맹장수술하는 것은 이미 다 나와 있잖은가? 이미 있는 이론을 가지고 어떻게 이 시대에 더 알맞게 어프로치해서 수술하느냐가 남은 문제다.
불교 역시 대장경 속에 다 있는 것을 더 좋게 좋게,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는 것이 관건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쌓아가는 것, 인간의 성숙이, 성숙된 사람이라고 하는 건 아집이 사라지는 거잖은가.
아집이 사라지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중선봉행, 제악막작, 모든 것이 중도다,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한다. 좌측 우측의 중간이 중도도 아니고 위나 아래나 상하의 중간이 중도도 아니다. 앞뒤의 중간이 중도도 아니다.
“중도가 뭡니까?”
물으니까 의상스님이 그러셨다.
“중도? 싹 다 중도다. 각득기소(各得其所)다. 세주묘엄이 다 중도이고, 모든 사람이 다 중도다.”
선악이 떠났을 때가 중도다. 도둑놈은 도둑질을 해라. 경찰은 도둑놈을 잡아라. 잡는 놈도 잡히는 것도 누가 나쁘고 좋은 것이 아니다. 불사선 불사악했을 때 모든 것이 중도로 바라봐진다. ‘저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저 사람이 이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 사람이 저렇게 훌륭하게 되지 않을 수 있겠나?’ 이게 다 중도다.
부는 바람도 불려가는 돛대도 전부 다 같이 중도다. 주객이 다 끊어져 한 모습이 돼서 바람과 그 돛대가 같이 배를 움직이잖는가?
적집제불상호공덕고(積集諸佛相好功德故)며: 적집제불상호공덕고며
취대비(取大悲)니 : 크게 가엾이 여김을 붙잡으니
멸일체중생고고(滅一切衆生苦故)며 : 일체 중생에게 온갖 지혜로, 지혜의 즐거움을 주는 연고다.
일체 중생의 멸일체 중생고라.
이것이 대비이고 중생무변서원도다.
취대자(取大慈)니 : 큰 대자를 붙잡는 것이니 대자비에 취착하는 것이니
여일체중생일체지락고(與一切衆生一切智樂故)며 : 일체 중생에게 온갖 즐거움을 주는 것,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취바라밀(取波羅蜜)이니 : 바라밀을 붙잡는 것이니
적집보살제장엄고(積集菩薩諸莊嚴故)며 : 보살의 모든 장엄을 쌓는 것이다. 사람이 바깥 모양은 명품으로, 물건을 가지고 장엄할 수 있지만, 마음을 장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라밀 행의 장엄이다. 이래서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말씀한다.
취선교방편(取善巧方便)이니 : 선교방편이다. 공교한 방편을 그 사람 수준에 딱 맞는 방편을 제대로 챙겨야 된다.
어일체처(於一切處)에 : 일체처에
개시현고(皆示現故)며 : 개시현고라.
모든 곳에 언제 어디에 가더라도 자유자재롭게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똥꼬집이 있어서 ‘나는 이건 안 한다. 이건 내 입맛에 맞다, 안 맞다’ 한다.
어떤 사람이 ‘커피가 안 맞다. 콜라가 안 맞다’고 하는데, 콜라도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 될텐데 설탕 빼버리고 무슨 제로 콜라, 커피도 카페인 빼버리고 맛도 없는 걸 먹는다.
커피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커피를 먹고 소화할 수 없는 자기가 문제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은 어떤가?
청경관세음보살 목이 새파란 관세음보살은 독을 먹고도 죽지 않고 삼켜 버렸다. 왜 독을 삼키고 뱉지 않아서 목이 새파랗게 되었느냐? 그 독을 바다에 뱉어버리면 다른 중생이 다 죽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성질이 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뱉어버리면 남이 다 죽어버리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니까, 엔간하면 자기가 삼켜서 내 목이 새파랗게 되더라도 중생을 위해서 독기를 뱉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내 죽으면 어떡해?’ 네가 죽든지 말든지 켁하고 뱉아버린다.
방계로 내려오는 선종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달마스님께서 혜가스님한테 두드려 맞았다는 것이다.
방송용어로 나가면 안 되는데 제가 어릴 때 우리 스님한테 들었던 이야기다. 달마스님이 혜가스님한테 맞아서 이빨이 다 나갔는가, 코피가 나는데 달마스님이 땅에다가 팩하고 그 피를 뱉어버리면 그 땅이 저주의 땅이 되기 때문에 그런 봉변을 당하고도 입을 꾹 다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혜가스님은 결국 그 팔을 툭 잘라가지고, 설인심주라. 제가 혜가스님을 모셔놓은 조사당에 가니까 편액이 설인심주(雪印心珠)라 설인(雪印) 눈에다가 그 붉은 도장, 마음구슬의 도장을 찍었다. 설인심주(雪印心珠) 이름 좋잖은가? 그걸 보고 가슴이 짠했다.
2조 혜가스님을 모셔 놓는 법당에 설인심주라.
또 달마스님께서 처음 오셔서 수행 정진하셨던 데가 지금 중국 광효사(光孝寺)다. 우리 육조단경에는 법성사(法性寺)라고 나온다. 그 절에 세발전이 있다.
제가 여러 번 어른스님 모시고 자주 갔는데 지금 중국 광저우, 보리수나무 아래 육조스님이 머리를 다시 삭발하시고 다시 재출가하여 16년만에 머리 깎은 걸 묻으셨다.
그 보리수를 육조스님은 남화선사(南華禪寺)에 다시 옮겨 심었다. 남화선사는 육조스님이 37년 동안 교화 설법하셨던 곳이다. 거기로 그 보리수를 옮겨가셨는데 그 조당이 보니까 해인사 대적광전과 같았다.
조당에 싹 들어갔을 때는 처음엔 스님들이 없는 줄 알았다. 누워서 정진하는 스님들이 밀랍으로 만든 미란 줄 알았다. 중국 선방 스님들은 빼짝 곯아있다. 누워가지고 정진하고 있길래 ‘야 잘만들었다’ 하고 쿡 찔러보니 사람이 일어났다. 얼마나 육조스님을 사모하고 참선해서 자기가 도에 깊이 들어가려고 했는지, 똥품 잡고 선방의 좌복에 앉아있는 상태하고는 전혀 달랐다.
완전히 사람이 미라처럼 돼 버려서, 처음엔 진짜 인형인 줄 알았다. 생기도 없고 조용하게 숨결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뭔고 싶어서 흔들려니까 사람이 일어났다.
이런저런 것을 보니까 육조스님이든지 원효스님이든 의상스님이든지 화엄경이든지 이런 경지는 보통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입장들이 아니다.
그분들이 해놓은 것은 일체처, 어디에 가든지 능수능란해야 한다. 이게 자비심이다.
특히 경허스님 같은 경우도 묶어 놓으면 묶어 놓는 대로 자유를 얻어버리고, 풀어 놓으면 풀어 놓은 데 들어가 버리고 방 안에 들어가면 방 안에서 자유롭고, 바깥에 나와 시장 바닥에 가면 시끄러운 데서 자유롭다.
서장에는 그렇게 해놓았다.
‘정처에서 고요한 곳에서 힘을 얻은 사람은 요처에서 시끄러운 곳에서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
고요한 곳에서 훈련소에서 힘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야전에 전쟁에 투입되면 거기서 바로 달달달달 떤다.
그러나 요처가 없는 것이 일체처다. 시끄러운 거 하면 시끄러운 대로
취보리(取菩提)니 : 취보리라. 보리에 달라 붙어야 된다. 보리라고 하는 건 뭐냐?
득무애지고(得無礙智故)며 : 걸림 없는 지혜를 얻는 연고이고
약설보살(略說菩薩)이 : 약설보살이
취일체법(取一切法)이니 : 취일체법이니 간략히 간단하게 말하자면, 약설하자면 보살이 일체법에.
원효스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득의즉(得意卽)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팥을 가지고도 메주를 만들 수 있다.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떤 틀린 말을 해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뜻을 모르는 사람, 사칭하는 사람은 실의즉(失意卽) 뜻을 잃어버리고 뜻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어떤 미사여구, 고운 말로 현혹하더라도 다 허망한 것이다.
그 대목을 청량국사가 원효스님을 찬탄하면서 소초에서 두 번이나 쓰셨다. ‘해동의 효공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이러면서 앞에 한번 쓰시고 뒤에 한번 쓰셨다.
그건 아주 중요하다.
청량국사는 7대 황제가 국사로 모셨던 분 아닌가.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하고 다르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굉장한 분인데 그런 분이 원효스님을 그만큼 칭찬했다고 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원효스님의 지위를 짐작해야 된다.
원효스님의 지위는 허공이 썩지 않는 것과 같은 정도의 가치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천년의 원효를 봐왔지만 앞으로 만년 뒤에도 원효는 계실 것이다.
석가모니를 영산불멸이라고 하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우리가 그런 분들하고 내 인생을 같이 섞어서 이렇게 한 세상 산다는 것이 굉장한 행운이다.
특히 화엄경을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이 화엄경을 하나의 지식이라고 보는 쪽이 아니다. 푹 쪄들어서 보는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을 이렇게 설명한다고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바둑의 정석 책을 봤다고 바둑을 두는 것도 아니고 요리 레시피책을 봤다고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레시피책을 볼 수는 있다, ‘그럼 요리해 봐’ 이러면 못 한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다. 화엄경을 봤다고 실력이 또 왕창 느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이 분별심이 무분별심 쪽으로 자꾸 가닿아야 오매일여 쪽으로 갈 수가 있잖은가.
어쨌든지 무심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인 것 같다.
어일체처(於一切處)에 : 모든 처소에서
실이명지(悉以明智)로 : 밝은 지혜를
이현료고(而現了故)라 : 분명히 아는 연고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보살 수행자가
안주차취(安住此取)하면 : 이 취착하는 데, 붙잡는 데 편안히 머물면
즉능부단제보살행(則能不斷諸菩薩行)하야 :모든 보살의 행을 끊지 않고
득일체여래무상무소취법(得一切如來無上無所取法)이니라 : 여래의 위없이 붙잡을 수 없는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다음 대목 넘어가겠다.
다. 菩薩의 十種修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修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修諸波羅蜜하며 修學하며 修慧하며 修義하며 修法하며 修出離하며 修示現하며 修勤行匪懈하며 修成等正覺하며 修轉正法輪이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安住其中하면 則得無上修하야 修一切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닦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바라밀다를 닦고, 배움을 닦고, 지혜를 닦고, 이치를 닦고, 법을 닦고, 벗어남을 닦느니라.
나타냄을 닦고, 부지런히 행하여 게으르지 않음을 닦고, 정등각 이룸을 닦고, 바른 법륜 굴림을 닦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위없는 닦음을 얻어서 일체법을 닦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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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수(十種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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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수(有十種修)하니 : 열 가지의 수행하는, 닦는 것이 있는데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수제바라밀(所謂修諸波羅蜜)하며 : 이른바 모든 바라밀을 제대로 닦아야 되고
수학(修學)하며 : 제대로 배워야 되고
수혜(修慧)하며: 제대로 혜해야 된다. 우리가 흔히 문사수라고 하듯이 육조스님이 계시던 남화선사에 가면 벽에 제일 크게 쓰여진 게 문(聞) 사(思) 수(修)라는 글씨다.
지자대사(智者大師) 육신보탑에 가면 그 앞에 써놓은 것이 ‘즉시영산(卽是靈山)’이다. ‘여기 이대로가 영산회상이다’ 법화경을 영산회상에서 설했다고 그런 글귀를 써놓았다.
그다음에 연수선사가 종경록을 쓰셨던 항주 영은사에 가면 뭐라 써놨는가?
중국 절의 특징이 커다랗게 일주문 앞에 글을 하나씩 다 써놓은 것이다.
영은사에는 지척서천(咫尺西天)이라. ‘여기가 바로 서방 극락 세계다’ 이렇게 써놨다.
범어사 같은 경우는 커다랗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써붙여야 된다. 대빵 크게 써붙여 놔야 되는데 그런 것을 안 붙여 놓고 얄궂은 그림 하나를 찍 붙여 놓았다. 중이 보따리 하나 매고 고개 푹 숙이고 가는 얄궂은 거 있잖은가. 발우 하나 들고 동냥 다니는 것 비슷하게 그려놓았다.
제가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과 묵담스님과 몇이 이렇게 부석사나 해인사나 화엄사에 간다. 가면 저는 설명을 절대 안 한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제가 설명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똑같이 갔는데 나중에 물어보면 기억이 하나도 없다. 신기하다.
화엄사에 가면 축대에다가 잘 쓴 글씨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확 박아 놓았다.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오며 가며 그것을 본다. 바위가 법문을 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범어사도 바위가 법문을 한다. 대성암 골짜기에 가면 올망졸망 ‘천 거북 만 자라’ 말 못 하는 바위가 말하는 중들을 먹여 살린다.
범어사에서도 그렇게 아는 사람은 자연의 일체유심조를 보지만, 그런 것이 일반 사람들 눈에는 안 들어온다.
그러니까 화엄사에는 눈 밝은 스님이 계셔서 화엄경 전체 80권을 그 돌 하나에 새겨 놓은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더 복잡하게 해놓을 필요도 없다.
일체유심조는 누구든지 다 안다. 관세음보살도 누구든지 다 안다.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화엄경을 똑 써놓은 것이다.
“범어사가 우리 어른스님 모시고 살아가고 이런 것도 있지만 화엄사에는 꾀많은 스님이 한 분 계신가 보다.”
보제루는 ‘모든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범어사에도 보제루가 있고 화엄사에도 보제루가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나 새나, 지친 구름도 구름 같은 나그네나 뜨내기나 누구든지 다 와서 구제한다고 보제루잖은가. 그 보제루에 가면 범어사에는 보제루에 화엄경 게송이 없다. 통도사에도 그런 게 없다.
그런데 화엄사에 가니까 거긴 화엄법회도 성하지 않은데, 화엄사 보제루에는 옛날에 얼마나 화엄경이 성했으면 현수품을 쫙 써 놨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단제의망출애류(斷除疑網出愛流) 개시열반무상도(開示涅槃無上道) 그 게송이 보제루에 있다.
터벅터벅 올라가서 대웅전에 가면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眞珠)라는 주련이 있다. 그거하고 게송이 안 맞는데 기둥이 여섯 개다 보니까, 네 게송이 끝나고 뭐라고 써놓았는가 하면 자라장리살진주 다음에 구류동거일법계 대신 비슷한‘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을 써놨다. 그걸 쳐다보면서 ‘야 짜깁기를 해도, 저렇게 게송을 잘 맞췄다’ 빵구 났는데, 왜 털옷에 빵구가 나면 꽃문양을 덧대지 않는가.
‘콜라병에다가 사이다 뚜껑 올려놨네. 그래도 딱 맞아, 딱맞아’ 참고로 그 콜라병 뚜껑 주름이 몇 개인가? 스물한 개다. 왜냐? 화엄경이 삼칠 일간 설했기 때문이다. 닭이 며칠 만에 부화하느냐? 21일, 우리 천수를 몇 편 치느냐? 스물 한 편.
무조건 우기고 보는 것이다.
화엄사는 각황전도 들어가 보면 기둥이 굉장하다.
안에 기둥이 있잖은가? 높이 쫙 서가지고 ‘기둥 같은 사람이’ 각황전 안에 기둥이 있잖은가? 고주기둥이라서 높은 기둥이다. 작고 낮은 기둥은 의미가 없다. 기둥은 높아야 된다.
‘와, 이만큼 큰 기둥을 하려면은’
사람이 자기가 꺼리가 조금 있는 사람은 그런 데에 가서 우리보다 훨씬 백 배 천 배 느낌이 더 있었을 것이다.
지은 사람은 아마 백 배 천 배 더한 심정으로 했을 것이다.
또 같이 갔다 왔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
자기 혼자 가서 이렇게 느끼면 그런 감정들이 더 잘 느껴진다.
아까 대선스님하고 황복사에 갔던 이야기를 했는데 갔다와서 “스님 좋지요?” “예.” 그랬는데 나중에 물어보니까 아무 느낌이 없으신 것 같다.
느낌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다가 절을 하는데도 눈을 이렇게 뜨면 향기도 없는 개망초꽃에서 향내가 온 데 잔뜩 풍긴다.
“내가 오늘 향을 한 개도 안 들고 와도 개망초 향기로 대신 올립니다. 의상스님, 그렇게 받으세요.”
느낌이 있으면 개망초도 향기를 막 뿜어내는 것 같다.
자, 넘어가겠다. 그 지혜를 닦고 이치를 닦고, 이치를 깊이 닦고 뜻을 닦고 또 법을 닦고
수의(修義)하며 : 의라고 하는 것은 안쪽으로 이렇게 계란 노른자처럼 갖춰진 것이다.
수법(修法)하며 : 법이라고 하는 건 계란 껍데기처럼 바깥으로 갖춰진 것이다.
수출리(修出離)하며 : 출리를 닦고, 벗어나는 것을 닦고, 번뇌로부터.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수시현(修示現)하며 : 시현을 닦고, 나타내는 것, 나타내는 건 어떻게 나타내느냐? 바라밀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보시 지계를 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수근행비해(修勤行匪懈)하며 : 수근행비해라. 부지런히 행해서 게으르지 않고
수성등정각(修成等正覺)하며 : 등정각을 이루고
수전정법륜(修轉正法輪)이 : 바른 법륜의 굴림을 닦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다. 그 앞에까지는 전부 다 인(因)을 닦고 나중에 결과가 도착한다.
‘아 여기서 9번 10번은 결과물이구나. 결과물은 정각해서 뭐 하노?’ 법륜을 굴려서 중생을 제도해야 된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보살이
안주기중(安住其中)하면 : 그 법에 안주하면, 그 가운데 안주하면
즉득무상수(則得無上修)하야 :즉득 느릿느릿 있는 것이 아니고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즉득, 속득, 무상수라. 곧바로 위없는 닦음을 얻어서
수일체법(修一切法)이니라 :수일체법이라 일체법을 닦게 되느니라.
라. 菩薩의 十種成就佛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成就佛法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不離善知識하야 成就佛法하며 深信佛語하야 成就佛法하며 不謗正法하야 成就佛法하며 以無量無盡善根廻向하야 成就佛法하며 信解如來境界無邊際하야 成就佛法하며 知一切世界境界하야 成就佛法하며 不捨法界境界하야 成就佛法하며 遠離諸魔境界하야 成就佛法하며 正念一切諸佛境界하야 成就佛法하며 樂求如來十力境界하야 成就佛法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成就如來의 無上大智慧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불법을 성취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선지식을 떠나지 않고 불법을 성취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불법을 성취하며, 바른 법을 비방하지 않고 불법을 성취하느니라.
한량없고 그지없는 선근으로 회향하여 불법을 성취하며, 여래의 경계가 그지없음을 믿고 알아 불법을 성취하며, 모든 세계의 경계를 알고 불법을 성취하며, 법계의 경계를 버리지 않고 불법을 성취하느니라.
모든 마(魔)의 경계를 멀리 떠나서 불법을 성취하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바르게 생각하여 불법을 성취하며, 여래의 열 가지 힘의 경계를 즐겨 구하여 불법을 성취하나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큰 지혜를 성취함을 얻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성취불법(十種成就佛法)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성취불법(有十種成就佛法)하니: 십종 성취 불법하니
하등(何等)이 : 어떤 것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소위불리선지식(所謂不離善知識)하야 :소위 이른바 불리선지식하야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성취불법하며, 선지식을 떠나지 아니하고 불법을 성취한다. 불교와의 인연을 불유연(佛有緣)이라고 하잖는가. 부처님하고 인연이 있는 것을 불유연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과 불교와의 인연을 성취하려면 어떻든지 수승한 인연을 해우해야 된다.
그래서 절에 오면 우리 제일 처음에 가르치는 게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악지식을 가까이 하지 말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수오계십계등(受五戒十戒等)하야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하리라 단의금구성언(但依金口聖言)이언정 막순용류망설(莫順庸流妄說)이어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지 시원찮은 자기 나름의 소리를 따라가지 말라고 한다.
며칠 전에 대강백 스님께서 보자고 연락을 하셨다.
“스님, 오늘 강의 있어서 못 갈 것 같은데 나중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그거 식전에 오면 된다고.”
목소리 들으면 아실 것이다.
아침 6시부터 밥 먹고 잡혀갔는데 하시는 말씀이
“이거 한번 해석해 봐라.”
딱 책을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지금 방금 부처님 말씀이 나왔으니 망정인데
“그거 이 해석을 다 틀리게 하는데.”
서장을 딱 꺼내 놓고는 말씀하셨다.
“스님, 한번 해석 해. 절대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내 스님을 테스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걸 갖다가 스님한테 일러 주려는 거니까.”
하셨다.
갈 때도 아침부터 가고 있는데도 전화가 와서
“어디쯤 왔냐”고 물으셨다.
“스님, 10시부터 강의 있습니다.”
“그거 10시 같으면 충분하고만. 빨리 와보라”
그런데 하신 말씀이 시원찮은 우리 같은 강사에 대한 말씀이셨다. 강사나 경전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해 놓으니까 어록이나 이런 데 기록되기를 강사들이 똥자루 취급을 받는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경이 최고인데 원래 강사는 그 뜻을 해석해내는 사람이라서 선사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라고도 하셨다.
강사중의 강사가 대선사가 된다는 것이다.
경허스님부터 시작해서 감산 덕청스님, 임제스님, 위앙종의 위산 영우스님, 조주 종심스님까지 누구든 할 것 없이 대선사는 모두 대종장들이며 삼장법사들이라는 것이다.
경전이 훨씬 높은데 경전을 해석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글 좀 몇 개 본다고 그 지식 가지고 사촌 지식으로.
사촌(四寸) 지식 아실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봤던 것을 생각도 안하고 입으로 뱉는 것을 말한다.
진짜 강사는 어떤 사람이냐?
보고 들었던 것이 아금문견득수지 했던 것이 손으로 움직이고 발로 움직이고 온몸 전체가 작동해야 경전이 살아 있는 것이다.
‘어록이 높겠냐, 부처님의 경이 높겠냐’
대강백 스님은 경전을 해석하는 게 어록보다도 높다고 하셨다.
“말할 것 없이 경이 높은데. 경을 해석해 낼 사람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니도 똑바로 공부해라.”
아침부터 불려가서 혼났다.
대부분은 누가 해석을 해도 똑같겠지만 특수한 부분에 가서는 해석이 달라지니까, 혹시나 강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그것을 딱 집어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거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이거는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두 시간 잡혔있다가 왔다.
“그것 녹음하라고.”
혹시 또 까먹을까 싶어서 녹음까지 재촉하셨다.
녹음하다가
“스님 요거는 어떻습니까?”
당신이 주신 책에 볼펜으로 요렇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거 책에다가 함부로 낙서를 하고, 책이 부처님 같은 것인데, 그러니까 강사가 욕 들어 먹는다고. 여기 볼펜 지워지는 지우개 있으니까 볼펜 지우라고.”
“예 알겠습니다.”
괜히 갔다가 혼만 나고 왔다.
그러니까 강사가 욕 들어 먹는다고. 책에 함부로 쓰지 말라고, 쓰려면 위에다 이렇게 딱 표시나게 정성스럽게 쓰든지 아니면 따로 메모해서 끼워놓든가 해야 한다고 하셨다.
‘책에다가 왜 써놓으냐’고, 당신이 주신 책에다가 메모 조금 썼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저는 원래 책에 그렇게 잘 안 쓰고 따로 쓰는데, 까먹을까 싶어서 종이도 없고 해서 그렇게 썼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어떤 강주스님을 거론하면서
“거기도 한번 그래가지고 누구야? 그 있잖아.”
어찌어찌 하다가 이름이 나왔는데 누구 누구 이름을 대니까
“내게 되게 혼났다고 거긴. 몇 번 그러더만. 내가 보다보다 못해 다시 그렇게 하지 마라 그랬는데.”
가만 생각하니까 제가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선생이 보시던 책을 본 적이 있다. 주묵 빨간 걸 똑똑 찍어 놨는데 얼마나 책에다 균일하게 찍어 놓으셨는지 ‘야 대학자는 다르다’ 생각했다. 안동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선생은 책을 저렇게 보셨구나’ 구두점을 딱, 딱 빨간 주묵으로 찍어 놨다.
그리고 우리 저쪽에 있는 화엄경, 여러분들 다 가지고 계실 것이다. 한암스님께서 현토하신 것 있잖은가.
얼마나 구결토를 이두토를 정성스럽게 딱딱 글에 겹치지 않게 옆에 써놨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간경도감에서 나온 책들, 제가 요즘 반야심경하고 현수소 같은 것을 다시 보고 있는데, 보면 우리나라 한글인데도 동그라미를 콤파스에 대고 그린 것 같다.
짝대기는 옆에 삼각자를 대고 그린 것 같다.
한글도 그렇고 한문은 말할 것도 없다.
‘야, 옛날 분들이 경전을 대하고 판본을 대해서 글자를 조각해서 새겨 놓을 때는 생명을 불어넣어서 자기 인생을 담아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셨구나’
새삼 어제 아레 가서 야단 되게 먹고 온 날 그런 것들이 다시 눈에 보였다.
어쨌든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부처님의 말씀을 보고 있는데, 한낱 지식을 가지고 여기서 논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단한 신심을 가지고서, 우리의 일생을 걸고 가는 길이지 않은가? 우리의 일생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도 어떻게 중간에 한 분을 만나서 ‘출가를 하고 싶습니다’ 해서 보시도 받아오고 이랬다.
아무것도 아닌데 ‘유튜브 강의를 들었습니다. 54살인데 출가하고 싶습니다’ 이러면서 울려고 하다가 보시만 잔뜩 내놓고 가셨다.
‘아, 이것이 전부 영향을 미치는구나’ 싶어서, 말씀하는 것도 강의하는 것도 조심해야 되고, 반드시 경전에 의거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신불어(深信佛語)하야 :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는다. 대단한 일이다.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 불법을 성취하며
불방정법(不謗正法)하야 : 그다음에 하지 말아야 될 일이다. 부처님의 정법을 비방해서 비방하지 않고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 불법을 성취한다.
서푼어치 지식을 가지고 요즘 빨리어는 어떻고 산스크리트어는 어떻고 위경(僞經)이 어떻고 의경(疑經)이 어떻고 하는데 다 박복한 소리다.
아까 원효스님 말씀처럼 ‘아는 자의 입장에서는 풀도 다 약이고’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약도 다 잡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무량무진선근회향(以無量無盡善根廻向)하야 : 무량무진선근 회향하야 다함없고 한량없는 선근을 회향함으로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 불법을 성취하며
신해여래경계무변제(信解如來境界無邊際)하야 : 여래의 경계가 그지없음을 믿어 알고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불법을 성취하며
지일체세계경계(知一切世界境界)하야: 모든 세계 경계를 알고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불법을 성취하며
불사법계경계(不捨法界境界)하야 : 법계의 경계를 버리지 않고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불법을 성취하며
원리제마경계(遠離諸魔境界)하야 : 모든 마의 경계를 멀리 떠나서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불법을 성취하고
정념일체제불경계(正念一切諸佛境界)하야: 일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바로 생각하고 정념하고
성취불법(成就佛法)하며 : 불법을 성취하며
낙구여래십력경계(樂求如來十力境界)하야 :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의 경계를 즐겁게 구하여서
성취불법(成就佛法)이 : 불법을 성취하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모든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안주하면
즉득성취여래(則得成就如來)의 :즉득 그 자리에서 바로 여래의
무상대지혜(無上大智慧)니라 : 무상대지혜니라.
즉득성취여래 무상대지혜가 범행품 제일 말미에 어떻게 나오는가? 초발심시변정각이라.
초발심시변정각을 60화엄에는 변성정각이라 하고 80화엄에서는 초발심시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나온다.
즉득을 다른 말로 공간적으로는 미진이라고 한다.
즉득을 시간적으로는 일찰나, 일념이라고 한다.
흔히 불교에서 분석할 때 일념이 한 생각이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이며, 일념에 생각이 900번 일어났다 꺼진다고 한다.
일념에 생각이 900번 일어난다. 일념에 900번 생멸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일념을 머리카락 하나 뽑듯이 뽑아서 열 가닥으로 세로로 쪼개고, 솜털같은 그 머리카락을 잘 드는 칼로 싹뚝 자른 시간을 일념이라고 한다.
그만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미진에 안이 있고 하루살이가 입이 있는 줄로 안다.
하루살이가 지가 먹으면 뭐하겠는가, 하루만에 죽어버리는데, 하루살이는 입이 없다.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고 하루살이는 입이 없는데 일념이라는 사이에서, 일미진이란 데는 미진은 인허진이라고 능엄경에서는 표현하고, 요즘은 미세먼지라고도 한다.
미진은 안이 있고 밖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팎을 따질 수 없는 것, 그 본래 없는 것이 미진이다, 일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글자로 가다 보니까 ‘작은 먼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옛 분들이 보신 걸 따라서 같이 뜻을 깊게 새겨야 한다.
내 길이 없거나, 내 길을 개척할 지혜가 없으면 남이 갔던 길을 따라가면 되잖는가.
그렇기 때문에 청량국사나 통현장자나 원효스님, 이런 분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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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스님 말씀처럼 ‘아는 자의 입장에서는 풀도 다 약이고’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약도 다 잡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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