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 예수의 영광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광과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들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예수는 마지막 설교와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십자가와 영광을 분명하게 연결시키셨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이 행하는 모든 사역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십자가를 통해 그 영광의 역설적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 제자들 역시 아들의 영광을 소유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영광이요 영원히 사랑 가운데 거하는 축복이다.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 속에서 나타났듯이 제자들의 영광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가운데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순종과 겸손과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도들의 십자가이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제자됨의 사명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획득한 영광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요 17: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내주하는 것 속에 제자들도 함께 거한다는 논조로 전개되지만, 본절은 보다 수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과 아버지의 상호 연합을 위한 중보적 매개체로서의 아들을 설명하면서 세상 가운데서 사랑을 나타내야 할 제자들의 온전한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또한 아버지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 이 구절은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자들이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온전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온전함'은 '수행하다', '완성하다' 등의 의미이며 성경 말씀의 '성취'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제자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일체의 수중에로 지향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온전함을 이루라는 것은 하나가 되기까지 온전히 장성하라는 뜻이며 또한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종적인 연합과 완성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것이지만 교회는 그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 - 여기서 '알게'는 21절의 '믿게'와 동의어가 아님이 분명하다. '알게'라는 말은 믿음에 이르는 것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인정까지 포함한다.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을 보면, 설령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감탄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려는 계획과 연결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을 보내심이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과 같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 역시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할 때에만 가능하다.
[요 17: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나 있는 곳'이란 이 세상의 어느 곳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다. 예수는 앞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후에는 따라 오리라'(13:36)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결국 미래의 시점을 염두에 둔 것이며, 종말론적인 소망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더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임박한 십자가의 수난과 영광을 예고하신 바 있다.
이제 제자들을 당신이 계신 곳에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 뒤에 있을 영광에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미 영광에 참예하였으나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보좌에 앉으신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창세 전부터...내게 주신 나의 영광 -
22절에서 '영광'은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과 주로 연관된 것임에 반해 본절은 미래에 회복될 영광에 강조점을 둔다. 이 영광은 그가 창세 전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의미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을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성도들은 지금은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으나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보게 될 것이다.
[요 17: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 요한은 형용사 '의로운'을 하나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신구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사항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는 칭호이며, 주님은 아버지의 의로우심을 선포하심으로 아버지에 대하여 무지한 가운데 있는 불의한 세상을 단호히 정죄하고 있다.
세상이...알지 못하여도 - 세상의 무지는 두 가지로 지적되는데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예수는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낸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또한 세상의 믿음을 위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
본문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나 세상은 아들을 거부함으로 여전히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제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재된 지식이다.
[요 17: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본성을 의미하며 아들의 지상 사역 가운데서 가장 확연히 나타났다. 아들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알게 하리니'는 장래의 사건을 암시하는데 혹자는 바로 이후에 있을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경이 증거할 사역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문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 - 본절 마지막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마무리하는 내용이다. 이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설교의 끝 부분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한 제자들이 장래에 알게 될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