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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군과 대구참사랑산악회의 32차 합동산행이야기
산행일시: 2022년04년24일
누구와: 서울독립군과 대구 참사랑산악회원
산행거리: 약12.01㎞
산행시간: 6시간15분(09:27~15:42)
산행코스:청소년수련원(09:27)-미숭산성남문(10:20)-미숭산정상(10:35)-망향대(10:59)-이미숭장군입간판(11:01)-반룡사갈림길(11:50)-412삼각점(12:20)-청금정(12:30)-주산정상(14:15)-지산동1호고분(14:46)-마지막고분(15:25)-대가야테마관광단지 정문(15:42)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09:27 합천종합야영수련원에서 산행시작, 해발378m
09:44 귀원갈림길3거리, 산행거리0.53km, 산행시간17분, 해발522m
10:03~18 소나무쉼터, 산행거리1.21km, 산행시간36분, 해발658m
10:20~22 미숭산성남문터, 산행거리1.28km, 산행시간53분, 해발675m
10:25 영천(샘터)
10:38~48 미숭산정상, 산행거리1.68km, 산행시간1시간10분, 해발755m
10:59 망향대(나대치길안내판), 산행거리2.13km, 산행시간1시간32분, 해발733.5m
11:01 이미숭장군안내판, 산행거리2.22km, 산행시간1시간32분, 해발719m
11:15~22 조각쉼터, 산행거리2.55km, 산행시간1시간46분, 해발598m
11:38 무명봉, 산행거리3.22km, 산행시간2시간11분, 해발530m
11:40 천제단, 산행거리3.34km, 산행시간2시간13분, 해발506m
11:50 반룡사갈림길3거리쉼터, 산행거리3.78km, 산행시간2시간23분, 해발433m
12:20 삼각점 산행거리5.22km 산행시간3시간53분, 해발412.4m
12:30~13:20 청금정, 산행거리5.41km, 산행시간3시간03분, 해발422m
13:30 임도공원쉼터, 산행거리6.06km, 산행시간4시간03분, 해발310m
14:03 주산정상,대가야박믈관갈림길, 산행거리8.08km, 산행시간4시간36분, 해발229m
14:15~35 주산정상, 산행거리8.32km, 산행시간4시간48분, 해발310m
14:46 지산동1호고분, 산행거리9.22km, 산행시간5시간20분, 해발182m
15:00 44호 고분 옆, 벤치가 있는 쉼터
15:09 덕곡재
15:25 마지막고분, 산행거리11.13km, 산행시간5시간58분, 해발182m
15:30 대가야테마관광지 입간판
15:42 대가야테마관광지 정문, 산행거리12.01km, 산행시간6시간15분, 해발44m
○합천야영수련원들머리에서 미숭산 정상 구간
버스가 멎은 곳은 합천야영수련원 상부 야영장.
일요일임에도 산행을 하기위해 이곳을 온 사람은 없는지 주차되어 있는 차가 없다.
버스에서 내려 각각 산행 채비를 마치고 오늘도 즐겁고 보람 있는 산행이 되기를 기원하며 단체사진을 찍는다.
들머리 입구에는 등산로 안내판과 미숭산성 안내판이 있어 대충 읽고 선두를 따라 들머리로 들어선다.
들머리 초기에는 특별한 지형지물이나 조망은 없으며 잡목은 대부분 활엽수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등로를 따라 약20분 정도 오르면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변하게 되는데 등로 사정도 아주 좋은 편이다.
들머리에서 15분 정도 올라 귀원 갈림길을 표기한 이정표(정상0.9km↔귀원8.8km.↓청소년수련원0.7km)를 지나며 등로는 사면으로 결처 지나며 경사는 완만하게 바뀐다.
송림이 우거지고 조망도 없으므로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른다.
주변에는 진달래는 이미지고 없지만 철쭉이 간간이 눈에 보이는데 특별한 지형지물은 보이지 않는 등로를 따라 한동안 오르다 보니 좌측으로 노송이 어우러진 바위쉼터가 나오고, 선두팀은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갖는다.
바위쉼터 아래 계곡에서 냉장고 바람이 불어주니, 그동안 땀 흘리며 오른 보상으로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우리가 최고다.
중간팀은 사간 차이가 거의 없이 도착했는데 후미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선배님이 계시니 이해는 가면서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일부 대원들은 먼저 출발하고.....
이럴 때마다 늘 이상한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왠지 모를 일이지만, 잘못된 일은 아니겠지, 아무 일없을 거야.... 스스로 자신을 달래며 기다리자 앞서간 선두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후미 팀이 올라온다.
후미 팀과 합류해 잠시 시간을 보내고 2~3분을 오르자 눈앞에 축성이 나타나니 이곳이 들머리 안내판에 언급했던 미숭산성으로 산성 가까운 곳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미숭산성(美崇山城)
미숭산성은 미숭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이 언제 쌓았는지의 기록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가까운 곳에 가야 고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여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497.8m라고 나오는데 현재는 1.45km인 것을 보면 약1km정도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는데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조선 중종 대 이후 산성을 보수하거나 난이 있을 때 마다 성곽을 넓게 늘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6곳의 우물과 1곳의 연못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성으로서의 입지는 성안에서 상주하기 위한 물이 필수이므로 6곳의 샘터를 확보한 것인데 이 가운데 2곳의 샘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남문지로 문루는 없지만 남문지 양쪽 옆으로는 성문의 초석으로 쓰였던 것 같은 석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내판에 의하면 미숭산성은 757m 미숭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8부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보축하여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산성 안내판에는 원래 상원산이었던 이 산이 미숭산으로 바꿔 부르게 된 사연을 적시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정몽주 문하의 이미숭장군이 고려의 재건을 위해 최후 항전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하여 후인들이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미숭산으로 바꾸어 불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산성내에는 동문, 서문, 남문, 망향대(望鄕臺), 주마대(走馬臺), 달각암, 연병장, 순사암(殉死巖), 봉수대 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고 적었다.
미숭산성 안내문을 읽으면서 제일 눈에 띠는 것은 망향대이고 다음은 순사암이었다.
주석으로 단 설명문에는 망향대는 려조회복을 천지신명께 축원하던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쇠퇴해져가는 고려가 개국 초기의 화려하고 굳세지기를 하늘에 바라던 곳이라고 하지만 망향대(望鄕臺)는 고향에 떠나 전장에 나온 병사들이 부모형제, 그리운 아내와 아들, 딸을 그리워하며 고향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던 곳이라 할 수 있는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고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순사암은 누군가 순직했음을 암시하는 바위인데 주석을 보면 이미숭장군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하는데 순사암에는 각자가 있다고 하는데 산행 시 가 보았으면 좋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성안으로 들어서서 등로를 따라 가는 길 양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지기는 했으나 자연 원시림의 느낌보다는 가꾸다 버려진 듯한 나무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이곳의 숲은 나중에 생겼다는 반증으로 다른 곳의 성(城)과는 차이가 있다는 느낌이다.
길가에는 파릇파릇한 풀이 자라 초원을 이루었는데 귀한 야생화는 없을까? 눈 여겨 보았는데 귀한 꽃은 보이지 않았는데 광대수염, 들현호색, 으름덩굴이 눈에 띤다.
광대수염은 저지대 습한 곳에서 자라는 꽃인데 이곳에 산재해 있는 것을 보면 근처에 샘이 있는 습지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고 광대수염이란 꽃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꽃을 자세히 보면 꽃잎아래 있는 포를 보면 뾰죽뾰죽 나온 모양이 광대의 수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선인들 눈에는 이러한 꽃잎 받침 포가 광대의 수염 같아 보였나보다.
들현호색은 예전에는 들에 나가면 눈에 띠는 현호색이라고 해서 들현호색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요즘은 들현호색 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데 이곳에 들현호색이 자라고 있음은 이곳 식물은 아직도 고려말로 착각을 하고 사는 건 아닌지......
광대수염가까운 곳에 샘터의 흔적이 보이는데 물이 넘쳐흐르지 않는다.
어디엔가 또 다른 샘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위에 또 다른 샘터가 있는데 물은 많지는 않았지만 관리만 하면 음용으로도 가능한 샘터가 있는데 물은 적은 양이 흐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샘터를 덮었던 낙엽을 치워 놓았는데 물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오늘 치운 것인데 그러면 앞서간 우리 일행이......
누가 샘터의 낙엽을 치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낙엽이 파헤쳐 널브러진 곳에 다량의 도룡용 알이 석여 있는데 햇볕을 받으면 말라 죽을 수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뒤에 오던 시인선배님과 성봉현씨를 급히 불러 상의하니 도롱용 알을 덮고 있는 막 안에 수분이 있어서 말라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샘터를 떠났는데 나중에 안내판을 보니 이 샘이 영천으로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했지만 이곳이 으뜸이었던 샘터 같았다.
샘터를 지나 편한 길이 이어지고 주변은 온통 멧돼지들의 놀이터다.
등로 좌측 큰 공터가 보여 무슨 유적지라도 있나 해서 등로를 벗어나 가 보니 누군가의 묘지인데 멧돼지들이 봉분 위 조금만 남기고 봉분 주변을 모두 파헤쳐 밭을 일구어 놓은 듯 했다.
등로로 다시 복귀하여 조금 오르자 능선3거리로 이정표(정상0.1km↔청소년수련원1.6km,↓야로초등학교4.6km)를 지나면 능선을 따라 성곽길로 멀지 않은 곳에 앞서간 우리 일행들과 미숭산 정상 입석이 보인다.
팀 플레이에서는 역시 마지막이 좋은 것은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열열한 환호를 받으며 골인하게 되는데 오늘 이 시간이 뜨거운 응원과 환호가 있는 미숭산 정상으로의 골인 순간이었다.
○합천야영들머리에서 미숭산정상까지 산행거리1.68km, 소요시간1시간10분, 해발755m, 현재시간10시38분이다.
○미숭산 정상에서
미숭산(美崇山)
미숭산의 조상은 백두산에서 대간을 따라 내려서다가 대덕산을 막 지나 초점산 삼도봉에서 동남방향으로 한줄기 가지를 치니 이 산줄기는 봉우산->시코봉->수도산->단지봉->용두암봉->목통령->두리봉->가야산->서장대->가산->북두산을 지나 미숭산에 이른다.
이미숭장군의 충절로 상원산이 미숭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대동여지도를 보면 미숭산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느낄 수 있다.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백두대간 대덕산에서 금광산->수도산->가야산->미숭산으로 이어지는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만 해도 초점산, 봉우산, 시코봉, 단지봉, 용두암봉, 목통령, 두리봉, 서장대, 가산, 북두산 등은 이름도 없는 산들이었지만 미숭산은 당당히 대동여지도에 이름을 올린 산이었다.
2011년에 만든 한국지명유래집에 미숭산은 경상남도 합천군의 야로면 나대리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합천)에 "야로현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합천군지」에는 "고을 북쪽 60리 야로현에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1872년지방지도」와 「조선지지자료」(합천)에는 미숭산(彌崇山)으로 한자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이 산은 경남과 경북을 가르는 가야산 줄기에 있는데, 「해동지도」(합천)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각사리(各寺里)를 통해 해안사에 이르는 길이 잘 묘사되어 있다. 봉수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여지도서」(합천)에는 "미숭산 봉수는 남쪽으로 초계 미타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동쪽으로 고령 망산 봉수에 신호를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문헌에 나와 있는 미숭산은 이렇다 치고 이제 현실로 돌아가면 미숭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달각바위에 있고 합천군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이 있다.
달각바위는 산성 안내판 주석에 따르면 이미숭 장군이 쏜 화살이 월광사 석탑에 도달하면 미숭산 정상에 있는 이 바위에서 ‘달각’하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산불감시 초소에는 산불감시원이 있는데 우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 본인 업무에 충실해서인지 아무 말이 없다.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부탁하니 쾌히 응해 전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인가 했더니 말을 거니 답변도 하고 웃기니 빙그레 웃기도 하는 걸 보면 그냥 경상도 아저씨다.
미숭산은 3위1체의 산이다.
산세가 부드러워 여성이나 실버들도 종주할 수 있는 산인가 하면 미숭산과 주변 산에는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니 미숭산정과 주산산정에 산성이 있고, 주산 능선에 대가야 고분이 있다.
또한 미숭산은 조망권이 뛰어난 산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조망대는 미숭산 정상과 청금정에서 주변 산의 조망이 일품이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 올라서니 가야산 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는데 임상택대장이 오도산과 비계산 그리고 남산제일봉에에 대해 알려 주기는 했지만 날씨도 도와주지 않아 더욱 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미숭산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방향 감각도 떨어지고 주변산을 잘 모르므로 누군가 알려준다면 좋을 것인데 이곳 산불감시요원은 알려주지도 랂는데 만약 내가 산불감시원이라면 이곳을 찾는 산객들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산불감시초소에서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줄 수 있을 텐데 산불감시원이 되지 못해 설명해 줄 수가 없다.
또한 미숭산은 조망권이 뛰어난 산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조망대는 미숭산 정상과 청금정에서 주변 산의 조망하는데 최고라고 했다.
미숭산 정상 산불감시초소 뒤로 가서 정상표지석을 등진 상태에서 좌측으로 만대산과 우측으로 오도산은 꼭대기만 보이고 두무산이 앞에서 오도산을 가로막아 오도산은꼭대기만 보이는데 오늘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원거리 조망이 안 되는데 날씨가 맑은 날은 만대산 뒤로 황매산이 오도산 좌측 뒤로 지리산 천황봉이 보인다고 한다.
12시 방향으로는 비계산이 보이는데 비계산도 대동여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산인데 대동여지도에서는 비학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계산 좌측 뒤로는 날씨가 맑으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데 오늘은 볼 수 없으며 비계산 우측으로 4년 전 우리가 지났던 우두산 의상봉과 장군봉이 보인다.
2시방향으로 매화산과 약간우측으로 남산제일봉이 있고, 4시 방향으로 가야산 만물상과 만물상능선 서장대와 높게 칠불봉이 보이며 우측 아래쪽으로 동성봉이 보인다.
지금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조망을 하고 산정을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으니 행복한 사람이다.
가야산은 예전에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산이고 천상이 있다는 추정으로 가야산 꼭대기에서 풍악소리가 가끔 들린다고 전해졌다는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해인사 서북쪽에는 가야산 상봉이 솟아있다. 사면은 날카롭게 깎아낸 듯한 형상이라 사람이 타고 오를 수 없다. 정상은 항상 구름기운으로 뒤 덮여 있고 나무하는 아이와 소치는 사람들이 때때로 봉우리 위에서 흘러나오는 풍악소리를 듣는다. 자욱한 안개가 끼면 산위에서 가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고 사찰의 승려가 전해주었다.」 라고 적었다.
미숭산 정상에서 사진도 찍고, 조망도 하고, 이제 정상을 내려 가야한다.
벌써 앞서간 일행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곽을 따라 내려서면 평지같은 길이 이어지는데 우측으로 잡목이 우거진 곳은 안내판에 의하면 주마대로 군사들이 말달리기 교육을 받던 곳이다.
붉은 립스틱을 칠해놓은 것 같은 철쭉이 쉬어가라고 잡고 늘어지는 것을 억지로 떼어놓고 조금 지나면 나대치길 안내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망향대인 것 같다.
지금은 잡목들이 우거져 사방을 볼 수 없지만 이곳 높은 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수없는 날을 눈물로 보냈을 병사들의 원한이 서려있던 곳이다.
망향대는 733.m로 다음지도 등고선을 보면 고치모양을 이룬 지형 등고선이 730m를 넘긴 곳이니 틀림없는 망향대다.
○미숭산 망향대에서 청금정 구간
임상택 대장은 망향대에서 흩어진 대원들을 수습한 후 하산을 시작한다.
망향대에서 조금 내려서면 이미숭장군 안내판이 있는데 내용은 산행들머리, 산성입구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안내판을 지나 조금은 가파른 내리막으로 15분 정도 내려서면 미숭산 9번 이정목이 있는 남근 조각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릴 겸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쉼터에서 이어지는 하산길은 이제까지 내려온 등로와 아주 흡사한 편으로 곳곳에 철쭉이 피어 있고 곳곳에 소나무 숲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약15분 정도 내려서면 등로는 앞에 무명봉을 두고 우측 사면으로 지나는데 앞서간 여학생들도 무명봉으로 오르기에 무명봉 정상에 오르면 특별한 지형지물이라도 있나? 하고 사면길을 버리고 무명봉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무명봉 정상에는 특별한 지형지물도 없고 조망도 터지지 않은 그냥 그대로 무명봉이었다.
무명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희미하고 낙엽이 깔려 있어 미끄러워 상당히 조심스러웠는데 조금전 사면 우회길과 만나기 바로 전 작은 석비가 보인다.
누군가의 무덤이 오랜 세월이지나 봉분은 없어지고 비석만 남았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전면에 天際壇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무슨 천제단이 이런 곳에 있나?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무명봉 정상에 세워야 한 게 아니었나? 그리고 천제단 앞에 제절도 정리가 되지 않아 좁고 고르지 못했다.
산행기를 쓰며 다른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는데 이곳 천제단은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늘에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묘지를 쓰면 아랫마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우리는 천제단을 보기는 했지만 뒷면을 본 사람은 없는듯한데 천재단 뒷면에는 「이곳에 하인을 막론하고 묘지를 설치하지 못함. 고령 낫질·용동마을 주민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하여 용동마을이 어디 있으며 낫질은 어디란 말인가?
다음지도에서 찾아보니 이곳 능선 우측이 용리인데 용리를 용동으로 표기한 것이고, 고령 낫질골은 있기는 한데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낫질낚시터는 능선 좌측 신리마을 담마못을 말함이었다.
하긴 예전에는 하늘에 의존하고 살았으므로 그렇다고 치더라도 지금은 과학의 발전과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 묘지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 것인지........
천제단을 지나면 오랜 세월 이 산을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줄지어 이어지고, 지형의 형태로 보면 오래전 고개가 있을듯한데 고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노송을 친구삼아 5분정도 내려서면 넓은 쉼터가 나오는데 천제단길 안내판과 반룡사길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이 반룡사로 가는 4거리 쉼터로 직진형은 청금정으로, 우측은 반룡사로, 좌측은 신리로 갈라지는 길이다.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등로를 이어간다.
등로는 앞 무명봉을 우측으로 우회하여 이어지며 소나무가 울창한 우회길을 지나면 작은 바위와 어우러진 쉼터가 나오고, 10분 정도 지나면 또 다른 쉼터가 나온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얼마를 갔을까? 평범한 평지능선에 삼각점이 나오고, 삼각점 옆 나뭇가지에는 준희님의 목패가 달려있는데 가야지맥412.4m고지임을 표기했다.
삼각점에서 5분을 지나면 등로는 Y 형태로 갈라지는데 좌측은 우회길이고 우측은 청금정으로 오르는 길로 갈림길에서 3~4분을 오르면 팔각정자가 있는 청금정으로 다음지도에는 이곳을 불당산이라고 표기했는데 불당산이라는 입증은 안 된다.
다음지도에는 등고선이 450m에 고도표기가 450m인데 스마트폰에 깐 산길샘 앱의 지도는 등고선이420m이고 고도는 422m를 나타낸다.
○합천야영들머리에서 청금정까지 산행거리5.41km, 소요시간3시간03분, 해발422m, 현재시간12시30분이다.
○청금정에서 주산 정상 구간
청금정(聽琴亭)
가야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자.
그러니까 누군가와 함께한 자리에서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유흥을 즐기는 곳이라는 뜻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야금 발상지인 정정골이 조망되는 곳에 악성 우륵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령군 주최로 2009년 5월 28일 청금정 중수기념 현판행사를 가졌으며 금강 송(松)으로 만든 이 팔각정자는 8개 읍면의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정골은 어디인가?
청금정에서 3시 방향 능선아래 중화저수지가 있는데 정정골은 저수지 바로 아래 우륵박물관이 있는 인근을 나타낸다.
청금정의 이러한 유래는 이 고장 사람들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데 이렇게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정자라면 청금정 안내판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유래를 공유했으면 좋을 같은 생각이다.
금강송으로 만든 정자여서인지 관리가 잘 되고 있으며 정자는 신을 벗고 올라가서 쉴 수 있는 곳이고, 정자위에는 마른 걸레가 준비되어 있어 이곳에 쉬어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청소를 해야 하는 곳이다.
우리 일행에게는 이곳 청금정이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중요한 행사?
우륵선생께서 가야금을 한곡 뜯으러 오시나?
그건 아니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청금정이 아무리 명당에 있다고 해도 우선 먹어야 주변 감상도하고, 우륵선생도 기리는 것이지......
대구팀과 만나는 날은 항상 입이 즐거운 날이다.
아침도 논공휴게소에서 맛있는 나물에 국밥으로 해결했는데 점심은 사방이 트이고 명당인 청금정에서 잊지 못할 산상 성찬이니 감사감사 또 감사다.
청금정은 조망처로 뛰어난 곳이라고 했는데 오늘 일기가 좋지 않아 먼 곳을 보는 것도 실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미숭산 방향이나 가야산 방향은 청금정 주변 나무들이 자라 조망권으로 부적격하였다.
그래도 현장에서는 어렴풋하게 보였는데 사진으로는 판독하기 힘든 정도인데 사른사람이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 환성산 방향과 앞산에서 비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아주 희미하게 판독할 수 있기는 하지만 형식에 불과하다.
가야산 일대를 볼 수 없는 게 조금 미련이야 남겠지만 미숭산에서 그런대로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고 바람이 있다면 청금정 주변 나무 관리를 하여 조망이 가능하도록 지자체에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청금정에서 내려서는 길은 비포장이지만 제대로 길을 만들었으며 길가 주변으로는 꽃나무를 조성해 붉은 연산홍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10분을 내려서면 청금정길 안내판이 있는 임도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음용이 가능한 수도시설이 있고, 화장실도 있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으로 능선을 가운데 두고 좌측의 신리임도와 우측 지산리 임도가 만나는 곳으로 쉼터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임도쉼터를 지나면 큰 난이도는 없지만 등로는 서서히 내려앉았다가 정점을 찍고 서서히 오름이 지속되는데 점심을 먹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데다가 과식을 해서인지 몸이 무겁다.
오후가 되면서 날씨는 무덥기만 하고, 바람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고, 간간이 쐬는 직사광선은 따갑기만 하니 벌써부터 힘든데 한여름 산행은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지점에서 지나온 능선을 볼 수 있었는데 오전에 지났던 미숭산이 아주 멀게 보이고 조금 전 떠난 청금정도 제법 멀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많이 지나왔음을 알 수 있다.
어느새 선두가 되어 함께 걷던 경환아우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빨리 서둘러 가자고 부추기니 쉬어가지 못하고,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억지로 따라 붙으며 뭘 보여 준다는 거냐? 고 물어보지만 가 보면 안다며 알려주지도 않는다.
청금정에서 약40분, 임도쉼터에서 30여분을 지나자 이정표(청금정2.56km↔주산0.24km, ↘대가야박물관1.59km)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은 지산동 고분으로 직접 내려서는 길이고 주산은 직진이다.
3거리에서 2~3분 오르면 등로는 가팔라지면서 암릉도 나오고 로프지대가 이어지는데 가슴이 벅찬 감이 들어 경환아우에게 쉬어가자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투박뿐이다.
청금정에서 마신 술이 취하는 듯 어지러움 증상이 나타나자 알맞은 곳에서 2~3분 쉬자 정신이 차분하고, 맑아짐을 느끼고 주산으로 오른다.
주산 정상은 넓고 안전지대다.
힘겹게 오르자마자 경환아우가 서둘러 갔다가 다시 와야 한다고 보채니 둘이서 충혼탑 방향으로 내려서자 김칠곤원장 부부도 뒤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주산에서 3분을 내려서자 유적터가 나타나는데 안내판에는 주산성 목곽고 터라고 표기하였다.
안내문에 의하면 2015년 발굴조사를 했다고 하는 이곳은 6세기경 백제의 축조기술에 의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대형 지하 저장시설이라고 한다.
목곽고 주변을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송화가루가 바람에 날린다.
박목월의 윤사월이 생각나 잠시지만 화제가 송화가루로 이어진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학창시절 때 시험에 많이 나왔었는데......
눈 먼 처녀
그때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바로 눈 먼 처녀였는데......
윤사월이라면 계절적으로 6월 초순일 것인데 이때는 이미 송화는 지고 없을텐데 시에서는 해 길은 외딴봉우리에 송화가루가 날린다고 썼으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에 박목월이 이 시를 쓸 때와 지금과는 세계적으로 기후 변동이 있으므로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그럴 듯하기도 하다.
송화가루
우리만 해도 시골에서 자랐으므로 이때가 되면 산으로 송화를 따라 다녔다.
송화를 따서 햇볕에 말리면 노란 송화가루가 나오는데 이 꽃가루로 다식을 만들었다.
엄마는 제사나 명절 때가 되면 쌀가루로 만든 쌀다식, 송화가루로 만든 송화다식, 검은깨로 만든 깨다식을 만들었는데 송화가루가 귀했으므로 송화다식을 제일 적게 만들고는 했다.
예쁜 꽃무늬를 새긴 다식판은 예쁜 다식을 찍어내는 마술기계와 같았는데...
박목월의 윤사월에서 송화가루로, 송화가루에서 다식이야기를 나누며 목곽고에서 다시 주산 정상으로 되돌아오니 일행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합천야영들머리에서 청금정까지 산행거리5.41km, 소요시간3시간03분, 해발422m, 현재시간12시30분이다.
○청금정에서 주산 정상 구간
주산(主山)
주산은 이산(耳山)이다.
주산은 남북으로 두 봉우리가 사람의 귀를 닮은 형상이라 해서 귀이(耳)를 써서 이산이라고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젠가부터 주산으로 불리고 있는데 미숭산에서 붙였던 대동여지도에서 이곳 주산을 찾을 수 있는데 앞서 기록한대로 주산이 아닌 이산(耳山)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주변으로 성의 흔적이 있는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이곳 이산성이 나온다하니 이산성의 역사는 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성으로 1963년에 사적61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다.
이산성이라는 문헌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주산성은 대가야 왕권의 상징인 지산동 고분과 인접해 있는 것을 보면 대가야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읍내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310m의 주산에 위치한 산성은 주변 지대가 낮아 방어범위가 넓다는 견해이며 주산성의 축조시기 대략 5세기 후반경에 축조되어 지속적으로 유지 보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다.
산성은 주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동쪽의 능선을 따라 둥글게 흙으로 쌓은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타원형으로 돌을 쌓은 외성으로 된 2중 성벽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계곡쪽으로는 아직도 성벽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외성은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먼 곳에서 산성의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며, 성 안에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2015년 주산성 발굴조사 때 목곽고(木槨庫)가 발굴되었고 내성은 평탄지가 대부분인 정상부 일대로 산성의 주요 시설들이 많은 몰려 있었다고 한다.
주산 정상에는 측량의 기점이 되는 삼각점이 있으며 평탄지 같은 정상에는 여기저기 벤치도 설치되어 있어 쉬기도 좋다.
목곽고를 다녀오는 사이 일부는 이미 고분방향으로 내려섰으므로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다 함께 지산동 고분으로 하산한다.
주산성에서 지산동 고분으로 내려서는 길은 정비가 잘되었으나 경사가 심하므로 빨리 내려서기는 부담스럽다.
산성 정상부에서 7~8분 내려서면 길은 Y 자형으로 갈라지는데 고분으로 가는 길은 우측이다.
우측으로 방향을 잡고 조금 들어서면 거대한 고분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등로 옆에는 고령지산동 고분군 입간판이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지산동 고분은 5~6세기 대가야의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가야 고분군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지산동 고분의 경우 고분 규모가 클수록 전망이 좋고 높은 곳에 위치하며 큰 고분 주변으로 작은 고분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44호, 45호, 73호, 75호 고분은 10~40명이 함께 묻힌 순장무덤으로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안내문을 읽고 고분을 접근하면 먼저 내려선 일행이 첫 번째 고분인 1호 고분 음지에서 쉬고 있다.
지산동 고분으로 들어선 것이다.
대가야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고령지역에 대형봉토분이 밀집 조영된 최고지배자집단의 고분군으로 주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주능선과 그 동남쪽 사면에 대규모로 고분군이 분포한다.주능선과 지맥의 정상부를 따라서는 봉분 직경이 20m가 넘는 대형분과 10~15m 가량 되는 중형분이 줄지어 분포하고 경사면에는 그보다 작은 중소형 봉토분들이 밀집 분포한다고 한다.
날씨가 무더우니 그늘에서 쉬고 있는 일행들은 땡볕인 고분군으로 나서기를 머뭇거리자 대장이 앞으로 나가며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높고 낮은 고분 사이로 한 줄로 이어가는 모습이 개미들이 이사를 가거나 먹이를 운반할 때 모습과 흡사한 풍경으로 우리는 지금 5~6세기경 과거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선 것이다, 그것도 신분이 상당히 높은 지배층 집단 묘역속으로......
대가야는 기원후 42년 시조 이진아시왕이 건국해 520년동안 유지하다가 신라에 진흥왕에 의해 멸망했는데 대가야의 중심이 이곳 고령으로 대가야는 금관가야가 쇠퇴한 이후부터 급성장해 6세기에는 영역이 합천·거창·산청·함양·남원·장수·여수·순천까지 뻗었음을 묘제, 토기, 장신구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신라가 정복한 후 약100년동안 대가야군으로 부르다가 이후 고령군으로 바뀐 뒤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역사서를 통해 볼 때 당시 대가야는 '가라(加羅)'로 불렸다고 하며 '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라고 한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 시가지를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을 따라 분포하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봉토분은 706기에 이르며 봉토가 남아있지 않은 소형 무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무척 많다고 한다.
지산동고분군의 묘제는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로 이는 가야 고분군의 일반적 특징으로 주 피장자가 매장되는 주곽에 인접해 부곽이 설치되고, 주·부곽 주변으로 순장곽이 배치되며, 다시 그 주변으로 호석이 설치되는 것이 기본 묘형이라고 한다.
대가야 고분의 가장 큰 특징은 순장곽으로 5~6세기 고대사회에서 순장은 비교적 흔하게 확인된다.
다음은 2000년3월18일 방영한 KBS역사스페셜에서 순장고분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본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지증왕 때 순장을 금한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면 그 이전에는 순장은 흔하게 있었던 묘제 방식이라는 것이다.
순장(殉葬)
순장은 따라죽을 殉(순), 장사지낼 葬(장)으로 누군가 장사지낼 때 함께 장사지낸다는 것이다.
죽음(死)이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피하고 싶은 본능이다.
그런데 어느 지체 높은 사람을 장사지내는데 2~3명에서 심지어 30~40명까지 함께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흔했던 모양이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순장을 확인시켜주는 첫 번째 순장고분인 경산 임당고분을 대상으로 파헤쳤으며 이곳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산사람을 산채로 묻었을까? 아니면 죽여서 함께 묻었을까?, 죽여서 함께 묻었다면 어떻게 죽였을까? 때려 죽였을까? 아니면 약물로 죽였을까? 또 순장자는 어떻게 골랐는지?, 순장자의 신분은 어떠했는지? 이런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을지 궁금하다.
순장자는 산채로 묻었을까? 아니면 죽여서 함께 묻었을까?
어떤 방식으로 묻혔던지 끔찍한 일이며 현재의 잣대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당시 순장 풍습이 그러했다.
경산 암당고분의 두개골을 확인하면 순장자의 두개골에 심각한 외상이 나타난 것을 보면 외부충격으로 죽여서 매장했을 것이라는 것이 견해이며 여타 다른 지역의 순장자들도 의학적으로 검증한 결과 죽여서 순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장자의 무덤에 젊은 여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첩이라는 추측이 나오며 순장자는 대부분 부부나 천한 노비나 노예로 인식해왔는데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굴조사하며 또 다른 주장이 대립하게 되는데 바로 절대 권력자, 절대지위자, 그러니까 왕의 존재 같은 사람이 죽었을 때 왕을 모시던 가까운 신하, 호위무사, 궁녀, 시녀, 농부 등이 순장자로 이는 살아서의 세상이 죽은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내세관, 계대사상으로 살아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순장자의 대상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말이 없으니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으며 순장자가 피장자와 함께 생활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건 순장자들의 차림에서 금귀고리나 목걸이를 한 지세가 높은 사람, 갓을 쓰고 있었던 사람, 칼을 차고 있던 호위무사, 말장식을 소지한 기마무사, 농기구와 함께 묻힌 사람 등이 뒷받침이라는 것이다.
경산 임당고분에서는 갖가지 먹거리를 함께 넣고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고분에서 농기구, 철전, 토기, 볍씨, 콩, 복숭아, 닭뼈, 말뼈, 그리고 바닷가에서나 볼 수 있는 50~60cm정도로 추정되는 복어의 턱뼈, 우럭조개, 고동, 상어 척추뼈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왕의 자녀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피장자인 고분에서는 유모가 순장자로, 장남감 등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순장고분 중 순장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은 지산동44호 고분이라고 하는데 중앙에 구덩이를 길이9m, 폭1.7m, 깊이2m를 파고 나무로 짠 목관을 넣은 후 목관에 피장자가 안치했으며 옆에 1구씩 2곳과 4구가 들어 있는 목관이 중앙부 피장자 옆에 있고 사방으로 땅을 파고 순장자를 안치한 후 돌로 덮은 형태로 사방으로 둘러쌓았다.
순장(殉葬)
이렇게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순장은 신라 지증왕 때 순장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으니 순장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그렇다고 권력자 층에서 행해오던 장례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었으니 순장이 불법으로 행해지다가 200년이 지난 후 완전히 순장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 순장의 대체법으로 토용이 등장하게 된다.
토용(土俑)
흙 土(토), 허수아비 俑(용)으로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말함으로 다시 말하면 장사를 치를 때 무덤에 부장용으로 흙으로 만든 인물상을 함께 넣고 장사를 치른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토용은 신라에서도 이용되었는데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에서 토용이 출토되었는데 토용은 각 계층으로 다양한데 가까이 있던 대신의 토용, 궁녀와 시녀의 토용, 눈물을 닦는 토용, 무릎을 꿇고 통곡하는 토용, 키타를 치며 슬픔을 달래는 토용 등등 다양하다.
그러나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는 토용이 발견되지 않음을 보아 지증왕이 순장을 폐지한 이후 순장과 토용이 근절된 것 같은데 지증왕 때부터 중앙집권제로 국가를 다스렸으므로 이전 지자체형 부속국가의 힘이 약해 중앙의 명을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암튼 순장에 있어서만은 지산동 44호 고분은 우리나라 순장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44호 고분은 최고 크기의 고분은 아니지만 중대형으로 그 크기가 폭이27m, 높이가 3.6m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아쉽게도 44호 고분과 45호 고분을 옆에 두고도 제대로 답사하지 않음을 나중에 무척 후회하였다.
지산동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처음 발굴되었는데 구,1~3호분과 39호분, 甲호분, 乙호분, 절천정총(折天井塚) 등 7기가 조사되었다는데 말이 조사이지 부장품이 탐이나 도굴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1976년에는 봉분이 뚜렷한 대형과 중형분 72기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1977년 파손상태가 심한 44호분과 45호분 등 대형분 2기를 조사했으며 1978년에는 중형분에 속하는 32~35호분을 차례로 발굴하여 다량의 유물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44호 고분의 경우 도굴로 유물이 상당량 반출되기는 했지만 땅을 파고 위에 돌로 덮는 형태의 덧널의 규모나 배치상, 잔존유물의 양상 등으로 미루어 대가야의 최고지배자급의 고분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고분군은 묘지의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잡목들이 뒤덮고 있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고분이 나타났다면 일본넘들이 연구 발굴을 내걸고 더 많은 고분을 도굴했을 것이다.
암튼 도굴 등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발굴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확인결과 44호 고분에서 도굴했음을 나중에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44호 고분의 모형이 대가야 왕릉 전시관이라고 한다.
44호 고분은 덕곡재 북쪽에 위치하는데 아마도 소나무 아래 벤치가 있던 곳 서쪽인근의 고분으로 여겨지는데 우리 일행 중 박상훈 아우 부부가 그곳을 갔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내 생각이 맞는다면 상훈네는 큰 행운이 함께할 것이네.....
지산동 고분은 덕곡재 남측보다 북측이 지위가 높은 지배층들이 묻혔으며 무덤이 클수록 피장자의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덕곡재는 현재 터널이 있는 곳으로 터널 북쪽구역과 남쪽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오래전에는 덕곡재라는 고개가 있어 고분군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고분을 훼손하고 길을 냈었는데 2004년 군사업을 통해 터널형 교량을 설치해 끊어진 고분군을 연결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과 함께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를 시작했다가 2017년 심의가 보류됐고, 2018년 합천 옥전, 송학동. 남원 유곡리, 두락리. 창녕 교동, 송현동 등 4개 고분군을 등재 대상에 추가한 이후 조건부 심의, 최종 등재신청 대상으로 확정, 현지실사 등을 거쳐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된 상태라고 하는데 앞으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고 하니 기대하는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분군 사이로 나있는 탐방로를 따라 내려서면 철쭉이 피어있는 평지길을 지나 서서히 오름이 지속되는데 바로 철쪽이 있는 곳이 덕곡재이며 덕곡재를 막 지나며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뒤돌아보면 아주 멋있는 풍경이 전개되는데 이제까지 지나온 고분군이 보이고 그 뒤로 주산이 보이며 덕곡재 우측으로 돔형태의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2000년 9월 개관한 대가야왕릉전시관으로 사적 제79호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 무덤인 지산리 제44호 고분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덕곡재 위로 올라선 일행들은 그늘에서 갈 생각을 안 한다.
이곳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갔으면 하는 의사였으므로 임대장에게 내려가자는 뜻을 전달하자, “무슨 소리냐? 이제 조금만 가면 되니 따라 오라“며 또 앞장을 서니 일행들은 그저 따라 나설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임대장이 아주 현명한 판단을 한 것으로 그곳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섰더라면 지금은 엄청 후회를 했을 것이다.
다시 고분 사이를 지난다.
1호 고분을 내려서면서 고분이 300개는 되나?라고 생각했는데 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한 것으로 보면 300번을 훌쩍 넘어, 기록에 의하면 크고 작은 고분을 합쳐 그 수가 무려 706번이 된다하니 대단하다는 생각과 고분의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 일본넘들에게 수난을 당한 고분이 얼마 되지 않음을 다행과 행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덕곡재를 올라서서 따가운 뙤약볕으로 15분을 지나자 남측 마지막 고분에 닿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고령테마관광지로 놀이터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잡히고, 가운데 작은 개천을 따라 내려서는 주변으로는 관광 시설물들이 넘쳐난다.
아기자기한 꽃들을 보며 20분을 내려서서 넓은 주차장으로 내려서자 반가운 우리들의 애마가 반겨준다.
○합천야영들머리에서 대가야테마관광지 정문까지 산행거리12.01km, 소요시간6시간15분, 해발44m, 현재시간15시42분이다.
첫댓글 매우 자세한 산행경로 정리와
엄청난 역사적인 자료정리에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대가야단맥 또는 고령단맥 또는 주산단맥 또는 고분군단맥 등으로 이름 붙일수 있는 산줄기를
대구팀과 같이 하셨네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산행을 하신 것 같습니다
5월 중순에 벙개 한번 하자는 의견을 어찌 하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