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여성 자의식의 성장과 학문 활동
여성들이 정규교육을 받게 된 것은 근대에 와서였다. 전통시대에는 학문과 교육 모두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유교를 제일의 이념으로 받들었던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고 명분의식과 편견이 심하여 여성들의 사회·문화적 활동이 심하게 제약받았다. 여성들이 받은 교육이라고는 예의범절과 가정관리에 국한되었고, 이 또한 왕실이나 양반가 여성들에게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경직된 조선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17세기에 이르면 유교 경전을 이해하고 시문을 남기기는 양반 부녀자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사임당을 비롯하여 허난설헌, 정부인 장씨 등이 대표적이다.
18세기에 들어와 양반부녀자들의 학문과 문예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영·정조대의 문예부흥과 함께 국문 소설의 보급과 독서 열풍은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또한, 조선전기에는 볼 수 없었던 학문적 성숙을 갖춘 여성들이 등장했다. 임윤지당을 비롯하여 강정일당, 서영수합, 이사주당, 이빙허각 등이 그들이다. 특히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은 남자들에게도 힘든 성리학을 깊이 있게 탐구했고, 이를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다를 바 없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영·정조대 여성 자의식의 성장은 근대적 맹아가 사회·경제적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방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정일당은 누구인가?
강정일당(姜靜一堂)은 정조-순조 대에 활동했던 여성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외가인 충청도 제천 근우면 신촌이다. 1772년(영조 48)에 출생한 강정일당의 본관은 진주이며 세조 때 공신인 강희맹이 10대조이다. 명문 가문 출신이나, 조부인 강심환과 부친인 강재수가 모두 단명하여 가문이 영락하게 되었다. 정일당의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성리학자 권상하의 동생인 권상명의 현손이다.
정일당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특이한 태몽을 꾸었다.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옆에 함께 온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에 덕을 갖춘 사람이 있으니 이제 너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꿈을 꾼 뒤 정일당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정일당의 이름을 태몽에 따라 ‘지덕(至德)’이라 지었다.
그녀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에 따르면, 정일당은 매우 조용한 성품이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조용하게 지냈으나, 부모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는 열성이 넘쳤다. 지금의 여성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유교적 여성관이 지배했던 시절이었기에 정일당은 “아녀자는 나쁜 일도 하지 말고, 훌륭한 일도 하지 말라.”는 [시경(詩經)]의 말과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히고 다니라.”는 [예기(禮記)]의 말을 실천하려 애쓴 여성이었다.
가난과 질곡의 세월을 버티다
정일당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싸워야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읜 탓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어머니를 따라 바느질하고 베 짜는 일이 일과였다. 정일당은 1791년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윤광연과 혼인했지만, 두 집안 모두 형편이 어려워 시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찍이 시아버지가 정일당을 보고 흡족하게 여겨 “우리 가문이 부흥하겠구나.” 하였다 한다. 결혼한 지 3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시집으로 들어갔다.
3년 만에 들어온 시댁 또한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남편 윤광연이 집안 생계를 책임지느라 공부에 손을 뗀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경기도 과천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남이 버리고 간 외딴 집을 빌려 살았고 계절마다 양식이 떨어졌다. 과천에 살면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정일당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정일당은 어머니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5남 4녀를 낳았으나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죽고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의료시설을 갖추지 못한 시대에 자녀를 잃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9명의 자녀 모두 사망한 것은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정일당은 알뜰하게 살림을 하여 만년에는 상당한 저축을 하였고 서울 남대문 밖 약현에 정원 딸린 집을 얻어 살았다. 경기도 광주부 대왕면(청계산 동쪽)에 산을 사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였다.
정일당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게 된 것은 결혼 이후였다. 본인이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에게 과거시험 준비를 권유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없습니다. 정도를 버리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학문을 하면서 빈한하게 사는 것만 못합니다. 제가 비록 재주가 없지만, 바느질과 베 짜는 것을 조금 알고 있으니, 당신은 성현의 책을 공부하시고 집안일에는 마음 쓰지 마세요.”
남편 윤광연은 정일당의 말에 감동하여 밤낮으로 공부했다. 그녀 또한 매번 바느질하면서 구석에 앉아 남편의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 들으면서 간혹 글자의 음과 뜻을 묻곤 했는데 한번 보고는 암송했고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재능은 남편을 능가하여 남편과 학문적 토론을 함께할 정도에 이르렀다.
윤광연은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못했다. 윤광연은 정일당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재야의 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인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보냈다. 남편인 윤광연에게 있어 정일당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부인도 내가 한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였고, 한가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걱정하여 충고하였다. 내가 우둔하여 모두 실천하지 못했지만, 부인의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 (윤광연-부인 강씨 기리며)
정일당은 가난했던 삶 외에도 몸이 허약하여 평생을 고생하였다.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1832년 9월 14일에 타계했다. 타계하기 하루 전에 남편이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니, 어찌 슬퍼하십니까?” 하며 다독거렸다. 향년 61세였다. 10월 30일 광주 청계산 동쪽 대왕면 둔퇴리 선영에 안장하였다.
선비 같은 삶을 살다간 여류성리학자
영·정조시대 성리학자였던 임윤지당보다 50년 뒤에 태어난 정일당은 만나지도 못한 윤지당을 평생 존경하며 흠모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에서도 각고의 노력을 하여 1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하였고, 이것이 현재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로 정리되어 전하고 있다.
평소 정일당은 유교 경전을 읽으며 연구하고 홀로 암송하였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간혹 사람들이 남편 윤광연에게 글 지어주기를 청하여 미처 응하지 못할 때 대신 지어주기도 했다.
정일당의 문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남편 윤광연에 의해서였다. 윤광연은 정일당을 아내로서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녀를 잃고 난 뒤 슬픔이 지나치자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자네의 슬퍼함이 심한 것은 홀아비가 되어 살자니 신세가 처량하여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 제대로 제사를 올리지 못해서인가?” “내가 아내가 죽어 슬픈 것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훈계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세. 아내가 나를 버리고 떠나니 나는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아 슬픈 것이네.”
윤광연은 정일당의 시문을 잘 보존하였다가 그녀의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특이한 일이었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광연은 남의 빈축을 사면서도 전 재산을 기울여 문집을 간행했다.
정일당의 3종 형제인 강원회는 그녀의 죽음을 기리며 이렇게 적었다.
“정일당은 어찌 우리 가문의 장부로 태어나지 못하고, 다만 명직(운광연)의 좋은 배필이 되고 말았는가! 이것은 명직에게는 다행이지만, 우리 가문에는 불행이다. 내가 어찌 그를 위하여 비통해하지 않겠는가!”
뛰어난 재주와 덕을 갖춘 여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활동이나 학문활동을 남성처럼 활발하지 못하고 아내로서 혹은 어머니로서의 삶만 살다간 이가 비단 강정일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지 못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1888년 여성을 위한 근대 학교가 설립되고 나서야 여성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