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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속 야생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정종무
1, 심마니가 되는 사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산삼 자원이 완전히 고갈 상태에 이른다.
나라에서 책정한 산삼 봉물량을 도저히 충당할 길이 없게 된, 산골 고을 수령들은 자기 고을에서는 아예 산삼이 나지 않는다고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많아진다. 따라서 백성들이 바치던 봉물에 산삼 품목이 빠지게 된다.
대신, 고을 수령들은 과거 산삼이 자주 발견되던 산악 지대에 금표 푯말을 세워서, 관청의 허락을 받지 않은 심마니들의 입산을 막았다. 미구에 산삼이 발견될 경우 나라에 바치기 위함이었다.
옛날 심마니들은 대개 몰락한 양반이거나 중인 계급에서 대물림한 경우가 많았다.
산삼을 돋운 적이 있는 구광자리는 비밀 장소로 여기고,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심마니는 어느 정도 학문을 익힌 사람들이며,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권문세가에 연줄이 닿을 정도로, 대인관계 폭이 넓은 사람이라야 심마니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개 심마니들의 우두머리 격인 어인마니가 되었으며 그 자리를 대물림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전문 직업인으로 분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호패에 채삼꾼임을 적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지방의 영림서에서 심마니들을 관리했다. 심마니 세 사람을 한 무리로 하여 석 달 기한으로 입출 허가증을 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심마니를 관리하는 제도가 사라졌다.
2, 옛날 심마니들은 산삼을 어떻게 팔았을까?
산삼이 너무 귀해진 나머지 산골 사람들도 산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산골 농사꾼이 우연히 산삼을 돋웠다해도, 판로에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었다. 산골 농사꾼이 산삼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온다해도, 아는 이도 없고 권문세가나 부자집에 직접 찾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채삼을 주업으로 삼는 심마니에게 의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심마니들은 산삼에 대한 특성과 자생지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산삼을 판매하는 고도의 상술을 갖고 있었다.
심마니들은 일 년 내내 산속에서만 지내는 게 아니다.
채삼 계절이 아닐 때에는,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산삼을 살만한 사람들을 물색한다. 주로 한양의 권문세가나 부유한 집 사랑방을 드나든다. 출세를 하려는 양반들이 뇌물로도 산삼이 소비되었지만, 중병에 걸린 환자가 있는 집이 목표가 된다.
산삼의 약효는 당시 사람들로선 절대적이었다.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심마니들은 환자를 직접 진맥해보고, 환자 가족에게 산삼을 섭취해 볼 것을 은근히 권유한다. 백가지 약을 써도 차도가 없어서 실망에 빠진 환자 가족들은 산삼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이게 마련이다.
채삼시기가 되면, 환자가 있는 마을 서낭당에서 입산 고사를 올린다. 사실 심마니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고사를 지내지 않는다.
입산 고사는 산삼을 살 사람에게 채삼하러 산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푸짐하게 차린 고사 제물은 서낭당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심마니가 산삼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는 소문을 퍼뜨려 준다. 산삼은 아무나 찾는 약초가 아니며, 산신령의 점지가 있어야만 하는 신비의 약초란 걸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환자 가족들은 심마니가 하산할 때까지 애를 태우며 기다린다. 그리고 수시로 머슴이나 하인을 심마니 집에 보내서 산삼을 돋웠는지 알아본다.
이윽고 심마니는 입산을 한다. 이럴 때에 심마니는 모르는 낯선 산을 향하는 게 아니다. 누대로 대물림해 왔거나, 자기가 발품을 팔아서 발견한
구광자리로 곧바로 간다. 구광자리에는 남모르게 숨겨 둔 산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미처 발견되지 않은 산삼을 찾을 확률이 아주 높다. 구광자리에 있는 산삼을 모두 돋우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가 나타날 때마다, 필요한 만큼만 돋우기 때문에, 심마니로선 고갈되는 일이 거의 없다.
더욱이 현대처럼 냉장시설이 발달되지 않은 옛날에는 산삼 보관이 문제였다. 산삼을 건조시켜 약재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싱싱한 상태로 섭취해야 효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마니는 일단 돋운 산삼을 이끼로 써서 산속에 묻어두고 하산을 한다. 그리고 자기 집에 환자 가족이 얼마나 찾아왔었는지를 파악하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보관 중인 산삼을 갖고 내려온다.
이 때에, 심마니가 짊어진 망태에 짚신을 매단다. 짚신이 매달려 있으면 산삼을 찾았다는 뜻이다.
심마니는 곧장 환자의 집으로 가지 않는다. 10여 리 떨어진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심마니가 산삼을 돋웠다는 소문이 환자 가족에게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애가 탄 환자 가족이 하인이나 머슴을 심마니에게 급히 보낸다. 심마니는 느긋하게 그리고 지엄하게 환자의 집으로 간다.
황급히 심마니를 맞은 환자 가족에게 산삼 가격을 흥정한다. 이때쯤이면 심마니가 부르는 게 값이다.
심마니는 우선 환자의 집에 금줄을 띄우게 한다. 그리고 황토 흙으로 집안 곳곳에 뿌리게 한다. 이는 부정을 타거나 잡귀를 물리치려는 의식이었다. 환자 가족들도 부정 타면 산삼의 약효가 떨어진다고 믿었다.
심마니는 환자의 용태를 살핀 다음, 산삼을 섭취하는 방식까지 알려준다. 산삼은 달이기도 하지만, 생식을 할 때에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민간 처방을 여러 가지 해준다.
환자는 심마니가 일러준 대로 산삼을 섭취한다. 그리고 점점 차도를 보이며 회복한다. 중병을 치유한 소문은 마을에 돌고 돌면서, 심마니는 한껏 주가가 올라간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산삼을 동경하며 갖가지 이야기꽃을 피우게 된다. 거기에다 얼토당토않은 전설들이 주막과 저자거리와 우물가나 사랑채에서 탄생하게 된다. 대부분은 산삼을 본 일이 없는 이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변모한다.
이토록 고난도 상술이 없으면 산삼을 제값에 팔 수가 없다. 또한 사회의 중상류층에 접근할 있는 심마니라야 산삼을 팔 수 있었다.
판매능력이 있는 심마니들은 가업으로 대물림하며, 여느 마니들을 거느린 어인마니 노릇을 했다. 그리고 비록 의원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의술을 지닌 이들이 전업 채삼꾼 내지는 어인마니가 될 수 있었다. 산삼의 유통과 가격조절도 심마니들이 했다.
3, 심마니들의 가업 잇기
심마니를 따라다니며 채삼 일을 배우는 이를 초동마니라고 한다. 이들은 대개 10여 살 어린 소년시절부터 채삼 일을 배운다.
초동마니들은 산삼의 생김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터라, 처음에는 오갈피 줄기를 꺾어들고 다닌다. 오갈피는 잎 모양새가 산삼하고 아주 닮았다. 산삼은 풀이고, 오갈피는 나무인데 같은 과에 속한다.
하지만 전혀 낯선 소년이 초동마니가 되는 경우는 없고, 거의 심마니의 집안 형제거나 아들일 때가 많았다.
초동마니들은 산삼을 찾는 산행도 중요하지만, 한의학 비방도 배웠다. 이들 심마니들이 끊임없이 산삼을 유통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구광자리 때문이다.
구광자리는 산삼이 자주 발견되기도 하지만, 심마니들이 어린 삼을 돋우지 않고 가꿨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 흐를수록 어린 삼은 상품가치가 높은 큰 삼이 되었다. 여기에다 심마니들은 아예 산속에다 삼을 재배하기에 이른다. 이런 삼은 산삼이 아닌 장뇌삼이다.
아버지인 심마니에게 아들이 채삼업을 물려받는 일을 내림이라고 했다. 아버지 심마니가 늙어서 더 이상 산행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삼통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이와 함께 구광자리도 아들이 물려받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어인마니의 아들은 계속 어인마니가 된다.
여느 심마니와 달리 어인마니는 산삼의 유통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권문세가와 누대로 줄이 닿는 사람이다. 그래서 권문세가 고객 명단도 어인마니의 아들이 물려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심마니와 달리, 어인마니의 아들은 고객을 확보하며 산삼을 판매하는 상술을 아울러 배우고 물려받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느 심마니는 어인마니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심마니 사회는 어인마니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구조가 되었다. 산삼으로 생업을 짓는 전업 심마니들은 극소수였다. 일반 백성들은 산삼을 채취해도 제값을 받고 팔기가 힘들었다.
심마니들은 혼자 산행을 하지 않았다. 대개 홀수로 무리를 짓는데, 세 명 다섯 명, 많게는 일곱 명 정도로 무리를 지으며, 음력으로 홀수 날 입산하는 게 통례였다.
4, 정월 대보름 첫 고사 지내기
옛날 심마니들은 새해 정월 대보름날 산신령에게 세일고사를 지냈다.
지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 해 풍삼을 기원하는 의식은 아주 경건했다.
그리고 유교의식이 산신제에 많이 응용되었다.
이 때에 심마니 무리를 이끄는 어인마니가 고사를 주관한다.
제물로 쓰일 물건들은 깎지 않은 게 예의이다.
제수 비용은 심마니들끼리 갹출하기도 하지만, 어인마니가 대부분 충당한다.
때에 따라서는 권문세가에서 부조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부조금이 많이
들어올수록 어인마니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다.
부조금은 곧 그 어인마니에게 산삼을 구매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새로 산신당을 짓기도 하지만, 누대로 물려오는 제단에서 고사를 올린다.
보통 돼지를 잡아 제물로 쓰기도 하지만, 어인마니가 특별히 능력이 있다면
소를 잡는 일도 있었다.
고사는 아주 경건했다. 고사에 참여하는 심마니들은 부정한 것을 일체 보지
않는다. 심마니들은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를 한다.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심마니들이 정성스레 산신당에 제물을 진설한다.
그 사이 어인마니는 심마니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한지에 적어서 제단 옆에
걸어둔다.
그리고 그 해 풍삼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는다. 강원도 심마니들에게 구전으로
이어오는 축문은 아랫 글과 같다.
해동 조선국 강원도. 00군 00면 00리 박 아무개, 김 아무개, 최 아무개,
한 아무개 마니가 여기로 왔습니다. 노구매 정성을 드리니 설악산 산신령님,
태백산 산신령님, 열두 대왕님, 제물을 변변히 못차리고, 이렇게 노구메 정성을
드리니, 소례를 대례로 받고 온갖 부정을 씻은 듯이 잊으시고, 재수 소망
이루게 해주소사.
대산소산 산왕대신, 대각소각 산왕대신 외양명산 산왕대신, 명단토산 산왕대신,
긍기다득 산왕대신, 현모주작 산왕대신, 대축소축 산왕대신, 사하피발 산왕대신,
금기대덕 산왕대신, 원상길상, 산왕대산‥‥‥
유세차 ○년○월 ○일에 마니들이 이 산천에 입산하여 산신령 전에 정성발원
올리오니 내로 희망하시옵시고 빛으로 감흥하옵소사. 이 마니들이 입산할 매
부정하고 영정할 일이 많습니다. 부정하고 영정한 일은 수하로 소멸하시옵시고,
그릇되고 잘못된 일은 풀어 해괄하시고 소례로 드린 정성 대례로
희망하시옵시고, 대례(大禮)로 드린 정성 반가이 희망하옵소사.
산신령 전에 축원하올 일은 산삼을 돋우러 왔으니, 이 마니들을 어여삐
생각하고 기뻐이 생각하셔서, 산에 산삼을 돋우러 나갈 적에, 산신령님께서
마니들을 직성을 높여 주고 의기를 돋우어서 산삼밭에 인도할 적에 마대를
이끌고 아쟁이산에 산삼을 캐러 나갈 적에 산신님께서 마니들을 직성을
높여 주고 의기를 돋우어서 산삼밭에 인도할 적에 마대를 이끌고
아쟁이에 걸려서, 육구만달 사구 오구 육구 삼구밭에 들어 가서 억수
만금 산삼을 점지하여 주옵시구, 산에 다닐 적에 험한 산천
고분성(산등성이) 배운성(골짜기) 찌기(岩)틈틈이 다닐 적에
손톱 발톱 다치지 않고, 층층이 상에 오르고 내릴 적에 받들어 올리고,
받들어 내려 몸수 곱게 점지하옵시고 기천만금 산삼을 점지하여 주십소사.
축문의 문장은 소박하지만, 산삼을 점지해달라는 간절한 뜻을 가득 담았다.
이 때에 어인마니는 제관이 되고, 그 다음 연장자 심마니가 축문을 낭독한다.
고사가 끝나면 제물을 음복한다. 제물들은 심마니 말고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여기에 한 가지 의식이 또 있다. 까마귀들에게도 먹이 감을
나무 위에 올려 놓는다. 심마니들은 유달리 까마귀를 좋아한다. 산삼씨앗을
까마귀가 먹고 배설하기 때문이다. 산삼씨앗은 땅에 떨어져도 싹이 잘 트질
않는다. 까마귀 뱃속에 들어갔던 산삼씨앗이라야 싹이 잘 튼다.
이런 삼을 조복삼이라고 한다.
심마니들은 제물을 싸들고 하산을 한다. 그 사이 잠시 사람들이 모였던
신신당에는 을씨년한 겨울 찬바람이 불어온다. 까마귀들은 심마니가 두고
간 먹이 감을 향해 하나 둘 내려앉는다.
고사를 지낸 심마니들은 어인마니 집으로 모인다. 어인마니는 첫 번
입산할 날짜를 의논 한다. 첫 입산은 묘절이라 고해서 곱세삼이 올라올
무렵에 시작한다.
“어인마니님, 올해는 그럼 원앙메로 할까요, 독메로 할까요?”
심마니 한 사람이 어인마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원앙메와 독메는 심마니들의
산삼 분배방식이다. 원앙메는 심마니 일행이 공평하게 나누는 방식이고,
독메는 산삼을 찾는 사람이 독차지하는 방식이다.
심마니들은 거의 원앙메를 원한다. 어인마니라고 늘 산삼을 보는 게
아니기에 원앙메로 결정한다. 심마니들은 손에 손을 잡는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원앙메, 원앙메, 원앙메.”
이 의식은 심마니 무리의 결속을 다지는 행사이다.
그리고 서로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에 어인마니가 덕담을 소리친다.
“올해는 육구만달이나 많이들 보시게.”
육구만달은 잎자루가 여섯 개인 산삼이다.
“그러문입쇼.”
이렇게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세일고사는 마무리 된다.
심마니들은 즐거운 희망을 가슴에 품고 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5, 입산
심마니들은 제각기 집에서 입산할 준비를 한다. 피나무 속을 파내어
삼통을 만든다. 피나무는 가볍고 질겨서 산삼을 담는 도구로 으뜸이다.
또 지난 여름에 벗겨놓은 피나무 껍질로 망태나 주루묵을 짜기도 하고,
질긴 삼줄로 신을 삼기도 한다. 짚으로 삼은 짚신보다, 삼줄로 삼은 신이
질기도 오래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나브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심마니들의 마음은 한결 분주해진다.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산삼을 발견할 꿈을 꾸게 해달라고 기원을 한다.
심마니들은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꿈에 많이 의지하며 희망을 갖는다.
심마니들은 예전 가 본 산자락, 그 중에서도 산삼이 나온 구광자리를
상상하며 꿈을 꾼다.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심마니들 꿈결에 나타난다.
송장을 짊어지고 하산하는 꿈, 엄청나게 큰 무를 뽑는 꿈, 사람을 죽이는
꿈, 어린아이를 안는 꿈. 이런 꿈이 길몽이다.
심마니들이 다시 어인마니 집에 모인다. 저마다 꾼 꿈 이야기를
어인마니에게 털어 놓는다.
어인마니는 꿈 해몽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수하 심마니들의 꾼 꿈
해몽을 하면서 첫 입산지를 선택한다.
첫 입산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강원도 북부 산악지역이나, 함경도
지역은 대개 소만(양력 5월 20일 경)에 시작한다. 이 무렵, 깊은
산악지대에도 새풀이 돋아나고 숲이 짙푸르게 된다.
심마니들은 솥단지와 이불, 옷가지, 식량을 잔뜩 짊어지고 입산을 한다.
우선 산에 들어가면 모둠을 짓고 제단을 쌓는다. 모둠은 심마니들이
지낼 보금자리이다. 다른 심마니가 지내던 모둠은 사용하지 않는 게 예의이다.
산삼이 아주 발견되는 깊은 산속에는 다른 심마니 무리도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둠터는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자기들만의 자리가 있다. 구들장까지
놓아 모둠 안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한다. 숫자가 많은 경우
어인마니가 지낼 모둠을 따로 짓는 일도 있다.
심마니들은 산신령이 점지해 준 자기 삼은 따로 있다고 굳게 믿는다.
여러 심마니가 같은 산자락을 돌아다녀도 산삼을 발견하는 심마니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심마니들은 산삼 외에 다른 약초는 채취하지 않는다. 모둠을 다 지은
심마니들은 모둠 옆에 쌓은 제단에서 고사를 지낸다.
세시고사 때보다는 조촐하지만, 돼지머리와 과일 육포 떡을 놓은 채삼을
기원하는 고사를 올린다.
그리고 음복을 하며, 어인마니에게 일을 분담 받는다. 비교적 어린
입적마니들은 식사 수발을 하거나 땔감을 마련한다.
황득(모닥불)을 피워놓고 어인마니에게 산삼을 찾는 비법, 산삼을 돋울 때의
주의할 점을 듣는다. 이 때에 어인마니는 심마니들의 사기를 높이는 덕담을
주로 한다.
첫 입산 날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온데다, 모둠을 짓느라
몹시들 피곤해 한다. 하지만 단잠을 자야 좋은 꿈을 꾼다고 새벽까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윽고 모둠 안으로 들어간 심마니들이 코를 골면서 단잠에 빠진다.
6, 심마니들이 산속에서 사용하는 말이 사뭇 달랐다
심마니들은 산속에서 엔간하면 말을 아꼈다. 이는 산 속에서 소리를 지르면
호랑이나 늑대 곰 멧돼지들이 흥분하여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하면 산신령의 노여움을 산다고 믿었다.
산 속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산신령의 영역이라 믿었기에 가급적이면
말을 줄이고 산 아래에서 사용하는 낱말대신 은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여느 사람이 옆에 있더라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산삼을
채취한 곳을 비밀에 부치는 지혜도 스며 있다.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라고 세 번 외친다. 하지만 산삼을 발견한
사람이 혼자 차지하자고 약속한 독메일 경우에만 그랬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가 “심봤다.”라고 외치면, 일행들은 모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야 한다. 그 심마니가 한참동안 일대를 살펴보고 더
이상 산삼이 보이지 않으면, 동료 심마니들에게 찾을 것을 허락한다.
그 다음에야 동료 심마니들이 다른 산삼을 찾게 되는 것이다.
심마니들은 산 속에서 지내는 말을 왜 만들어 냈을까? 심마니들은 은어를
만들기를 즐겨 했다. 지방마다 다르게 변모하긴 했지만 거의 엇비슷하다.
7, 산속에서 어인마니의 역할
산속에서 심마니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마대로 나무를 두드려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산삼을 찾았어도, “심봤다.”를 외치는 경우는 독메일 경우이다.
원앙메에서는 “심봤다.”를 외치지 않는다.
입산한 심마니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산삼을 찾았다면 즐거운 일이다.
원앙메니까
팔아서 공평하게 나누면 된다.
그런데 입산할 때마다 산삼을 보는 게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산자락을 대엿새씩 돌아다녀도 산삼 한 뿌리를 보지 못할 때가 다반사이다.
이럴 때에 어인마니는 책임을 져야 한다. 어인마니를 따라 입산한
심마니들의 가족들이 산 아래에서 굶주릴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입산하면서 고사를 지낼 제물이며, 식량 준비로 적지 않은 돈이
지출되었다.
어인마니는 고심을 한다. 선조 때부터 대물림 해온 구광자리가 저
산 너머에 있다. 아니면 자기가 아무도 모르게 발견한 생자리가 저 앞산
자락에 있다.
만일 산삼을 돋우지 못하면 수하 심마니들에게 신망을 잃게 된다.
어쩌면 패가 깨지고 수하 심마니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경우까지 생긴다.
어인마니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다음 대를 이을 심마니나, 아들을 데리고
모둠을 떠난다. 이 때부터 어인마니의 목숨을 건 산행이 시작한다. 먹을 것은
변변치 않고, 잘 곳도 마땅치 않다.
두 사람 심마니는 날이 어두워지면, 피나무 가지를 베어서 덮고 잠을 청한다.
밤이슬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늑대나 여우 곰들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으려면
피나무 가지를 덮고 자는 게 좋다.
이런 잠자기를 선잠자기로 하는데, 그야말로 힘든 역정이다.
어인마니는 조상 때부터 물려오던 구광자리를 헤매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계곡에서 생자리를 찾아 무진 고생을 한다.
그러나 불현 듯, 어느 구광자리에서 산삼을 발견한다. 이렇게 어인마니는
아무도 몰라야할 구광자리를 아들이나 다음 대를 이을 심마니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선잠자기를 거듭하며, 모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이틀이 걸릴 수도 있고,
나흘이 걸릴 수도 있다.
모둠에서 어인마니를 기다리던 수하 심마니들이 기쁘게 반긴다. 심마니들은
어인마니가 어디서 어떻게 산삼을 찾았는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문율이다. 구광자리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인마니는 기쁜 얼굴이 아니다. 힘들게 찾은 산삼을 판다해도
어인마니 몫이 없다.
어인마니는 그 산삼을 팔아서 수하 심마니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
심마니들은 어인마니가 나누어 준 돈으로 쌀도 사고, 옷감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평소 산삼같이 일행이 산삼을 돋웠다면 어인마니가 3분의 1,
산삼을 찾은 이가 3분의 1,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3분의 1을 나누어
가진다.
이토록 어인마니는 심마니들에게 군림하는 위치이면서도, 때로는
자기 희생을 해야 하는 역할도 할 때가 있었다. 이것이 옛날 심마니 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