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57)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愚公移山
어리석은 영감, 산을 옮기다.
일전에 몇몇 원로(元老) 역사학자들과 역사학의 당면 문제를 가지고 좌담회를 가진 일이 있다. 이때 여기에 참석한 어느 분이 나를 만나자 느닷없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이야기하였다. 그대로 해석하면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라는 우화이다.
이 일화는 《열자(列子)》의 〈탕문(湯問)〉에 실린 간단한 이야기이다.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은 사방으로 7백 리(里)이고 높이는 1만 길인데 본래는 기주(冀州)의 남쪽, 하양(河陽)의 북쪽에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북산(北山)에 우공(愚公)으로 불리는 나이가 90세인 영감이 산을 마주하고 거처하였다. 그런데 산의 북쪽이 막혀 있어서 외부로 출입하려면 고통스럽게 빙빙 돌아가야 했다.
식구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나와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험한 산을 평평하게 만들면 예주(豫州)의 남쪽으로 갈 수 있고, 한음(漢陰) 지역으로도 갈 수도 있을 것인데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식구들은 분분하였지만, 집안의 어른 말이라 대체로 찬성하였다. 이때 그의 부인이 말하였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하남(河南) 땅에 있는 조그만 괴부산(魁父山)에 있는 언덕배기를 덜어낼 수도 없을 것인데, 태행산과 왕옥산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파낸 흙과 돌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그거는 발해(渤海)의 해변과 은토(隱土)라는 곳의 북쪽에다 버리겠소.” 현실감 없는 대답으로 들렸다.
드디어 자손을 인솔하고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은 세 명밖에 안 되었지만,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에 담아서 발해 해변으로 운반하였다. 이웃 사람으로 경성(京城)이란 성(姓)을 가진 과부(寡婦)의 유복자인 7, 8세 정도의 아이가 뛰어와서 도왔는데 추운 계절과 더운 계절이 한 바퀴 돌아 1년을 넘겼다.
이를 본 하곡(河曲) 사람으로 스스로 지혜로운 늙은이라고 부르는 지수(智叟)가 웃으면서 이를 저지(沮止)하면서 말하였다. “정말 너무 심하시오. 그대는 지혜롭지 못하군요. 남은 세월 남은 힘으로는 산에 있는 터럭 하나도 헐어낼 수 없을 것인데 흙과 돌을 어찌하려는 것이요?”
우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은 완고하고, 완고하면 고칠 수 없을 것이요. 일찍이 과부의 어린애만도 못하구려. 비록 내가 죽는다고 하여도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은 자식을 낳을 것이고 그 손자는 또 아들을 낳아서 다하지 않을 것이지만, 산은 커지지는 않을 것인데 왜 평평해지지 않을까를 근심하시오.” 생각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은 무궁하게 대를 이어 갈 수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산이야 덜어낸 만큼 적어지고 높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하곡에서 온 스스로 지혜롭다는 늙은이 지수(智叟)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뱀을 부리는 신(神)이 이 소문을 듣고 그가 중지하지 않으면 자기 집이 없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천제(天帝)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나 천제는 우공을 혼내는 대신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기력(氣力)이 아주 큰 과아씨(夸娥氏)의 두 아들에게 명령하여 두 산을 짊어져다가 하나는 지금 산이 많은 산서지역인 삭동(朔東)에다 놓게 하고, 다른 하나는 지금 섬서(陝西), 감숙(甘肅)지역인 옹(雍)의 남쪽에다 놓게 하였다. 이후로 기주(冀州)의 남쪽과 한수(漢水)의 남쪽에는 구릉이 없게 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원(中原)지역의 탄생 설화인 셈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우공(愚公)과 지수(智叟)가 대비된다. 보통 어리석다는 우(愚)는 싫어하고 지혜롭다는 지(智)는 갖기 좋아한다. 그러나 작자는 왜 어리석다는 사람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어를 붙이고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에게 수(叟), 즉 늙은이라는 말을 붙여 주었다. 왜 그랬을까?
요즈음 세상은 약아빠진 사람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고 부채 대신 에어컨을 집집이 들여놓았다. 청소하기 싫다고 청소 로봇을 장만한다. 어디 그뿐인가? 공부하고 보고서 쓰기 싫다고 Chat GPT를 애용한다. 이것을 사용하지 못하면 뒤떨어진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고 법석이다. 드디어 이러다가는 로봇에게 인간이 지배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각설하고, 그 원로 교수가 나에게 왜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끄집어내어 말을 걸었을까? 나를 우공(愚公)으로 부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기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붙들고 이미 50년의 세월을 보냈고, 아직도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역주를 시작하여 220권 중에 이미 140권까지 마쳤으니 앞으로 3, 4년을 더 해야 끝날 판이다. 이것이 끝나면 우공의 우화에 비유컨대 빙빙 돌지 않고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자치통감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는 효과가 겨우 예주에 가고 한음에 가는 정도의 편리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되었듯이 몽골족 쿠빌라이는 자치통감을 공부하며 몽골제국을 건설하였고, 우리의 세종대왕은 자치통감을 가지고 5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모택동은 이 책을 읽으면서 1850년 아편전쟁 이후로 4분 5열 된 중국을 통일하였다. 현재의 이 혼란한 국제정세나 남북이 대치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이러한 위대한 지도적 인물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환경작가는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을 집필하면서 나의 역주 자치통감을 읽으며 50부작을 완성하였다. 이를 통하여 출연진과 진행요원들을 합하면 몇 명쯤 될까? 이렇듯 자치통감은 미래 우리 먹거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자치통감과 속자치통감 합하여 근 1천 8백 년의 통사라는 도도한 인간의 변화를 그려낸 것을 바탕으로 우리 젊은이들의 예술적 감각으로 만들어질 멋진 드라마, 영화, 음악 같은 예술작품을 기대한다. 이것이 소소한 일을 기계로 대신하게 하는 시대에 우리를 먹여 살릴 자료의 광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 원로 교수의 말대로 학자들 가운데 정년하고 연구를 계속하는 사람이 드물다. 우공은 적고 지수는 많은 셈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 하루살이 삶도 아닌데 1백 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短見)으로 인문학은 활용성이 적다고 이를 멀리하고 AI로 몰린다. 안타깝게도 인문학 없이 AI는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공이산 같은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첫댓글 1970년대인지 그보다 앞서 인지 잘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우공이산>이란 글을 아동용 중국어교재(?)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끊임없이 추진하다 보면 그 언젠가는 ,
자식의 세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는데
오늘 권교수님의 칼럼을 읽어보니 더 한층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역사와 철학의 조화를 보는듯하고 그 교훈적 의미가 매우 깊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익한 글을 읽을 수있도록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우공과 같은 인물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청계산 ~ 고림)
권교수님 우공이산이란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전후에 깔린 자세한 사연을 배우게 되어 제가 질문한 것이
오늘 이런 큰 과일로 선물을 받을 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90세가 넘은 노인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분 세 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선배님들의 의지와 노력이 우리 사회를 밝히는 촛불이 될 것입니다.
촛불 하나로는 칠흑 같은 어둔 밤을
밝힐 수 없지만 여러 개의 촛불이 합치면 캄캄한 어둔 밤을 밝혀 큰 터널을 뚫을 수 있는 光明燈(광명등)이 된답니다.
90노인들이여! 우공처럼 10년, 20년을 하시는 산을 옮기는 일을 계속해주세요.
제발 내 나이가 많아서 이제는 그만이라는 말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르는 저희들 과부의 아들들이 협력하겠습니다.
조국의 평화, 인류의 공영을 위해서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1.
우공이산이란 말이 전국시대 열자에 나오는 간단한 내용이라면 권교수님 설명처럼 자세한 이야기는
어데에 나오는 것입니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소개 드린 것이 열자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국어 시간에 배우는 정도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지요.
정교수님이 정년한 교수들 가운데 꾸준히 자기가 연구한 것을 지속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씀 때문에 몇 자 적었던 것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오늘날 초고령사회인 우리나라에는 좋은 경종을 울려주는 훌륭한 역사평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이 함께 협력하였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세대 간 단층이 생기는 것에 대한 좋은 경구입니다.
그리고 뱀신과 천신의 이야기는 불교적 신화 내지는 민간신앙이 후일 가미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