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바다로 간 진흙소☆]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바다로 간 진흙소]
박호영 시집 / 서정시학시인선 087 / 서정시학(2014.02.10) / 값 99,000원
================= =================
바다로 간 진흙소
박호영
오래 전에 용산* 스님은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간 후 소식이 없다 했거늘
그 까닭을 모르는 후세의 중생들이
또 다른 진흙소가 되어
악다구니로 서로 싸우다가
어느덧 바다에 빠지고 있다
* 당대의 승려 마조도일(709~788)의 제자.
즉비卽非*
박호영
백합이 지고 작약도 지고
우아함과도 잠깐
화려함 역시 한 순간
그 꽃들이 남긴 말
맹목盲目의 어리석음 벗어나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기대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눈여겨 볼지니
그러면 백합이 항상 그대 곁에 있고
작약도 비로소 작약일지니
* 눈앞에 있는 사물이 눈에 보이지만 그 실체는 아니라는 말
산사일기 1
박호영
새벽 바람이
마당을 쓸고 있다
가을이 아직 한창인데
떨어진 잎들 어떠냐고는 질문에
먼 곳만을 바라보던 노승이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는다.
선방禪房을 굳게 걸어 잠근
녹슨 자물쇠만이
간 곳을 아는 듯
가만히 달그락거리고 있다
시다림尸陀林*
박호영
꽃이 피고
그 꽃 이내 지듯이
사철 깨어 있는 강물
하냥 흘러가듯이
어디선지 불어온 바람
어디로 가는가 묻지 말고
무심히 편안하게
왔던 길 돌아가게나
* 죽인 이를 위하여 설법하고 염불하는 것
대오大悟
박호영
누구냐, 넌!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 거미줄에
찬 이슬이 맺혀 있다.
이별다리
박호영
오대산 상원사 가는 길에
섶다리 하나 놓여 있다
여름 홍수에 떠내려가면
가을에 다시 세워져
만남과 헤어짐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법문法文의 이별 다리.
나만났다고 반가워 할 것도 없고
헤어진다고 슬퍼할 까닭도 없ㄷ건만
살아오면서 나 얼마나
이 상정常情에 얽매였던가.
오늘 이 다리 위;에 서니
만남과 해어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대립된 모든 것들이
둘이 아님을 새삼 알겠네.
바닷가 마을 1
- 귀촌의 밤
박호영
오래전에 헤어진 별들을 다시 만났다
뜨락에는 수시로 달이 기웃거린다
그때마다 풀들이 달빛을 따르고 있다
봄이 오면 울타리에 회양목을 심겠노라고
작고 예쁜 강아지도 기르겠노라고
아내의 꿈이 서울을 떠나
이곳 바닷가에 온 뒤부터
밤새도록 부산하다
작은 채마밭을 만들어 가꾸겠노라고
나도 또 하나의 꿈을 보탠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소중한 꿈들을
모처럼 늘그막 부부가
하나 둘 반갑게 챙기고 있다
만추晩秋
박호영
그동안 이별 참 많았지만
아름다운 이별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았어야 할 것 같은
왠지 괜한 눈물이 나는
담홍색 여백.
가을 블루스 1
박호영
폭염 끝에 오는 서늘함보다 반가운 것은 없다. 모두 가 뜨거워지고 모든 것이 용광로가 되는 화택火宅의 세상, 어릴 적 키 큰 미루나무의 바람으로 너는 온다. 잠 재울 수 있는 것들은 잠 재우라.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전부 벗어버려라. 이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답게 지는 꽃
박호영
아름답게 지는 꽃을
보고 싶다
모질게 목을 치는
동백의 떨어짐도 아니고
애초의 고아함은 아랑곳 없는
목련의 이울음도 아닌
소리 소문 없이 왔다가
조용히 자신의 삶을 딛는
아름답게 지는 꽃을
꼭 보고 싶다
어떤 꽃도 꽃은 꽃이다
박호영
꽃을 보는 사람에게만
꽃은 꽃이다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꽃은 피고 진다
꽃나무 그늘 쪽에서 태어나
채 피기도 전에시들은
꽃을 본 적이 있는가
꽃다운 삶을 살려다
일찍이 낙화가 되어 버린
꽃의 모습을 살핀 적이 있는가
어떤 꽃도
꽃은 꽃이다
모든 꽃들을 꽃으로 사랑할 때
꽃은 우리에게 꽃으로 다가온다.
절리節理
박호영
만물은 이치에 어긋나면
틈이 생긴다
절리節理다
틈이 커지면 절벽이 된다
누구도 건너갈 수 없는
절벽이 된다
절벽은 절망이다
틈은 보이는 대로 메워야 한다
우리가 살 길이다
고봉高峯
박호영
예전에는 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말이 있었다.
고봉高捧.
되질이나 마질을 하면서
안다미로 쌓아 올린
인정人情의 질량.
언제부터인지 깎이고 덜어져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피정避靜
박호영
베란다 양지 바른 곳에
별처럼 피어나건 호야꽃이
일주일 만에 졌다
매일 밤 별꿈을 심어주더니
돌연 이별이다
무릎이 다시 시려 온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서랍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신문을 들여다본다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오는
시정市井의 소란한 소식들
내일은 짐을 챙겨
폭설이 내렸다는 설악산이라도
다냐와야겠다
작은 들꽃
박호영
일찍이 대여* 선생은
서로 이름을 불러 주어야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고 했지만
나는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 들꽃의 이름을 모른다.
가시 많은 엉겅퀴와
마구 뻗어 나간 칡넝쿨 속에
당당한 푸르름으로 그는 서 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엄숙한 화두로 내게 다가온
이 작고 온전한 우주.
*대여大餘 : 시인 김춘수(1922~2004)의 호.
석양의 강물을 바라보며
박호영
흘러간 과거가
저처럼 빛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석양이 드러누운 강물
그 강물 위에선
웃음도 빛이 나고
눈물도 빛이 난다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긴 강물과
저물어도 아름다운 석양
그곳에선 슬픔도 기쁨도
다만 빛이 될 뿐이다
물이 별이 되어
박호영
물의 몸 속 깊은 곳에
별이 들어앉았다
물이 별이 되어 별이 물이 되어
하염없이 흘러간다
세상 소리 닿지 않는
심심 산곡의 여울
물의 꿈과 별의 꿈이
한밤중에 흥건하다
거울 속의 나
박호영
오늘도 거울을 봅니다
하루 만에도 달라진 것 같은 내가
거울 안에 있습니다
흰 머리가 몇 가닥 어제보다 늘고
이마와 눈가의 주름은
좀 더 깊이 파인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허나 정말 걱정인 것은
세상의 삶에 익숙해져
조금 더 비뚫고 허물어진 내가
거울 속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일 텐데 말입니다
나의 눈이 더 어두워져
거울을 볼 수 없기 전에
진정한 나와 마주치고 싶습니다
하여 어쩌면 지루한 일과일지 모르지만
내일도 거울 앞에 서려고 합니다
반려伴侶
박호영
당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 만큼
등이 굽은 옆집 할머니가
담벼락을 뚫고 자란
이번 장맛비에 쓰러진 풀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잡초인데 왜 뽑아내지 않고
그런 수고를 하시느냐고
지나는 사람들이 무심한 말을 하면
담 밑에서도 힘들게 버텨온 생명인데
어떻게 죽게 놔 두느냐
봄에는 보랏빛 예쁜 꽃도 피운다고
한사코 풀을 일으키신다
저녁 어스름
어느덧 할머니와 풀이 서로 기대어
해동갑을 하고 있다
노경老境
박호영
멎;l 않아 팔순이 되는 큰고모가
눈이 점점 침침해지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눈과 귀가 먼저
저승길을 가는 것 같다고
힘없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숱 많은 머리칼도
저승길 앞서려고 떠난 것일까
큰고모 정수리가 환하니 길이 나 있다.
목련꽃 하나 둘 떨어지는
어느 봄날.
다시 읽는 묵시록
박호영
지구의 종말에 이르니 마침내 일곱 대접에 담긴 하느님의 분노가 땅에 쏟아졌다. 우선 짐승의 낙인을 받은 자들과 온갖 우상을 섬긴 자들의 몸에 불치의 부스럼이 생겼다. 신종 바이러스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바닷물은 오염된 방사능과 폐수의 방류로 검붉게 되어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죽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악령들은 태양의 불화살을 맞아 화상을 입고 울부짖었다. 정신 차리고 자기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행복하리라 하셨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만을 입고 다녔기에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다. 땅 위에 일찍이 없었던 대지진이 일어나 큰 도시가 세 조각으로 갈라지고, 웅대한 건물들은 힘없이 무너졌다. 산들도 자취를 감춘 땅 위에는 하늘로부터 무게가 오십 근이나 되는 우박이 떨어졌다. 우박 속에는 우주에서 부딪친 소행성도 있었다. 인류의 파멸을 부른 수많은 사탄들이 불과 유황의 바다 속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죽은 자들은 하느님 앞에 불려 나가 자기의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다. 말씀 그대로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
■ 시인의 말
사십여 년의 교직 생활 마감에 즈음하여 강릉 바닷가 마을로 내려온 지 벌써 일 년이 가까워 온다. 두 번째 시집 이후 써 놓은 시들과 바다를 끼고 펼쳐진 솔숲 길을 산책하며 시상이 떠올라 지어낸 시들을 묶어 또 한 권의 시집을 낸다. 그저 한두 편이라고 공감하여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14년 1월 江陵 宣山齋에서
박 호 영
=============== == = == ===============
박호영 詩集 [※바다로 간 진흙소※]
[ 시인의 산문 ] -
자기 구제를 위한 수행 과정
1.
시인은 사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물의 말, 그렇다.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식물도, 아니 무생물조차도 말을 하고 있다. 화초를 기르면서 꽃잎을 어루먼져 주거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생기가 돌고, 나뭇가지나 강물이 바람의 강도에 따라 달리 음향을 내는 것은 그 때의 정황에 맞게 그들 나름의 말을 하기 때문이다. 생물은 물론이거니와 무생물조차도 기를 발산하는 ‘우주적 일심의 한 가족’이다. 그야말로 만물은 조응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얼마만큼 우리에게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들의 실상을 보고 듣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현상에만 의존할 뿐 본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눈 앞에 있는 사물이 눈에 보이지만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즉비卽非이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그에 집착하여 산다. 우리는 사물들의 이 화합된 울림, 그 울림의 내밀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근원적인 들음’과 ‘근원적인 봄’을 주장한다. 그 태도를 취할 때 참으로 그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를 본다고 할 때 나무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깡그리 없애고, 어떤 권위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주의력을 오로지 나무에게만 쏟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로 달리 표현하면 ‘귀기울여 들음’이요, ‘눈여겨 봄’이다. 우리는 과연 사물들에 대해 귀기울여 듣고, 눈여겨 봤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대개 사물의 현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상을 본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근원적인 봄’과 ‘근원적인 들음’이 가능하게 독자들에게 눈과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 그를 위해 결코 어려운 시적 장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적 장치가 퍼즐의 성격을 띤다면 그것은 그냥 보고 듣게 하는 것만도 못하다. 불행히도 많은 시인들이 독자들의 반응을 외면하며 비유의 미로를 즐기고 있다. 그에 따라 사물들의 본질이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분명 사물은 시시각각 그들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원적인 말을 시인은 찾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끄집어낸 사물의 말이 시적 형상화에 성공하여 감동을 주며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 생활을 접고 바닷가 마을에 내려와 산 지도 일 년이 가까워진다. 거의 매일 바다를 끼고 펼쳐진 솔숲 산책로를 걸으며 단골처럼 만나는 대상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나와 부딪친다. 어느 때는 소나무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와, 왜 저들은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놈은 쭉 뻗어자랐고, 그 옆의 놈은 저렇게 뒤틀어졌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그 뒤틀어짐이 그가 겪은 슬픔과 고통 때문이 아닐까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본다. 그런가 하면 늘상 보는 파도가 구별되어, 높은 파도와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의 전언傳言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갈매기도 어느 때는 무리지어 활기찼지만, 또 어느 때는 외롭게 저마다 테트라포트 하나씩을 차지한 채 혼자 앉아 있음을 보기도 하였다. 강문 바닷가 카페에 묶여 있는 진돗개도 늘 만나는 대상이었는데, 짖지도 않고 바다만 바라보는 모습이 묵언수행을 하는 것 같았다. 일련의 이런 대상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대상들을 예사롭게 보고 듣고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연작시 ‘바닷가 마을’은 미숙하게 엮어졌지만 그들과의 이러한 만남에서 산출된 것이다.
2.
툭하면 냉담을 하는 엉터리 가톨릭 신자이지만 나는 불교의 교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작고한 최인호 작가가 가톨릭 신자이면서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듯이 나 역시 불교 신자는 아니면서 삶의 지혜를 깨우쳐주는 불교의 교리가 마음에 든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수박 겉핥기의 수준이지만 육십 중반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불교 철학이다. 우리의 시인들 중 불교에 경도하여 그 시세계를 펼쳐보인 시인은 만해와 미당을 비롯해 여러 명이다. 그만큼 불교의 교리 중 전달할 메시지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요즘 나를 각성케 하는 불교의 교리가 몇 가지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적시해 보려 한다.
하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다. 너무 많이 세간에서 인용되어 그 진리가 퇴색된 바 없지 않지만, 이 말은 양자택일적인 형식논리를 경계한 것이다. 색과 공,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없던 것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색에 집착하지만 잘 알다시피 색은 영원불변하지 않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렇다고 공의 세계가 절대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색의 뒷받침 하에서 공은 존재한다. 색과 공은 교호한다. 우리가 눈에 보는 것 중에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거대한 빌딩도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으며, 귀하게 여기는 보석들도 가치 전락이 되어 버려질 수 있다. 그러나 텅비어 있음 가운데서 새로운 것이 생겨 우리의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현실에 너무 집착하여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얼마 안 있어 없어질 허상이요, 환유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우주 만유에 상주불변하는 본체, 진여眞如이다. 이 진여는 우리가 아집을 버리고 방하착할 때에만 파악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불교 교리는 원효의 평등사상이다. 여기서 ‘평등’이란 말은 오늘날 현대인이 사용하는 용어인 ‘평등’관느 좀 다르다. 아무런 이기주의적 조건이 없는 보편성과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 자비로움이 포함된다. 이 사상은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연계되는 바 없지 않다. 우리는 귀하고 천함, 아름답고 추함, 깨끗하고 더러움, 부유하고 빈곤함 등 가치의 대립을 설정하여 놓고 차별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절대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 대립은 우리가 구별한 것일 뿐,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장미보다 할미꽃이 아름다울 수 있고, 다이아몬드보다 강가의 조약돌이 귀할 수 있다. 상대성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이를 초월하여 공평무사한 마음을 지닐 때 우리는 비로소 나로부터 자유자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원효는 “행과 불행, 적멸의 고요와 생멸의 번뇌도 모두 상대방이 있기에 생기는 환유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실상도 순식간에 사라지므로, 기쁨과 슬픔도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평등사상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개인으로서 겪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수 없으며, 소외감이나 불행도 극복할 수 있다. 나를 누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남보다 모자라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나 혼자 단독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남과 더불어 살되 차별심을 갖지 말고 욕심의 결박에서 벗어나 아무 구애 없이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나는 ‘대아大我’가 될 수 있다.
3.
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이상스러울만치 시와 얽혀 있었다. 남의 시 흉내 내며 시를 쓰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시는 줄곧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 질긴 인연으로 오십이 넘어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의 삶 역시 시와 함께 하는 여생이 될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생각하면 허망한 욕심이기도 하다. 시가 많이 쏟아져 나와 시의 홍수를 이루어도 시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누가 내 시를 읽어준다고 시작에 매달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시 창작이란 자기 구제를 위한 수행 과정이다. 앞에서 말한 불교의 교리를 미흡하나마 시에 반영하여 내 나름으로 한 편의 시를 지으려고 하면 그 창작 과정 자체가 수행이요, 완성하고 나면 나 자신이 구제됨을 느낀다. 더불어 시 한 편의 완성에 흡족하여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한다. 자기 구제란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마치 유치환이 사막이란 허적의 공간 속에서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지닌 ‘나’(「생명의 서」)를 차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물으며, 거짓의 나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도로徒勞가 된다 할지라도 시를 통한 자기 구제의 노력을 꾸준히 하고자 한다.
항간에서 떠들긴 현대인이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문상을 가보면 팔십 넘어 돌아가신 분들은 보통이요, 구십이 넘어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그러나 몇 살까지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몇 살까지 육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만큼 건강하게 사느냐가 문제다. 그것을 따지게 되면 내 나이가 적지 않음을 깨달으며, 자연히 어떤 존재로 삶을 마칠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를 위해 내가 마음 속에 새기고 있는 시가 두 편 있다. 하나는 ‘작은 시편’이란 제목을 달은 고은 시인의 책『순간의 꽃』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 작품이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요즘 시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글이나 강연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는, 같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그 꽃」전문)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은 시편이다. 지금까지 나는 앞만 보며 열심히 노를 저어온 어리석은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노를 놓치고 주위의 넓은 물도 돌아다보는 삶을 살고 싶다. 돌아다보면 아마도 내가 노를 저어 지나온 길이 얼마나 좁고 비뚤어졌는지를 알리라. 또 그 길과는 다르게 평온하고 넓은 길이 있음도 보리라, 다른 하나는 이성선 시인의 「미시령 노을」이란 시이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 이성선「미시령 노을」전문-
노을 속에서 가볍게 기척도 없이 자신의 삶을 마치는 나뭇잎, 그러한 삶이 거대한 우주 한 구석에서 살다가 가는, 티끌 같은 우리의 바람직한 삶이 아닐까. 산에 둘러싸여 살며, 산을 사랑하던 이 시인에게 그 가벼운 나뭇잎은 바로 우주의 참모습이요,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인의 바람대로 그는 결코 길지 않은 육십의 나이에 나뭇잎처럼 삶을 마치고 그가 좋아하던 산에 유해가 뿌려졌다. 내가 어찌 그와 대비될까마는 나 역시 이 시에 나오는 나뭇잎과 같은 삶을 마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의 구제를 위해 이번 시집 이후에도 간간이 시가 써지기를 소망한다.★.
.♣.
=================
◆ 표사의 글 ◆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얼마만큼 우리에게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들의 실상을 보고 듣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현상에만 의존할 뿐 본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눈 앞에 있는 사물이 눈에 보이지만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즉비卽非이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그에 집착하여 산다. 우리는 사물들의 이 화합된 울림, 그 울림의 내밀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인의 산문」중에서
.♣.
=================
▶ 박호영 시인∥
∙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 1979년『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 2002년『시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 시집『오두막집에 램프를 켜고』『그대 아직 사랑할 수 있으리』
∙ 평론집『몽상 속의 산책을 위한 시학』『무명화를 위한 변명』등이 있고,
∙ 그 외에『한국현대시인논고』『현대시 속의 문화풍경』『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서정주』『한국근대기 낭만주의 전개연구』『한국현대시의 층위와 진폭』등이 있다.
∙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로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