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전신은 해태타이거즈로 창단시 가장 적은 숫자였지만 지역민 뿐 아니라 전국 각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지금은 잠시 주춤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했고 기억에 남을 경기를 했다.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있었고 초창기엔 김봉연 김성한 같은 대선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메이져 리거였건 거포 최희섭, 잠수함 투수 김병현 , 현재 투수코치로 있는 서재응 등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해외에 갔다 다시 복귀하여 타이거즈에서 김병현을 빼고 은퇴를 했다.
토요일 은퇴한 이범호 선수는 어쩌면 타이거즈를 거쳐간 막강투수나 거포는 아니었으나 꾸준했고 결정적 순간에 기여하는 선수로 KBO통산 만루홈런을 가장 많이 때렸다고 한다.
프로야구가 생겨날 때 지역을 연고로 생겨나 한 때는 지역주의를 부추긴 적도 있었고 방화사건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특히 지역에 내려간 원정팀의 경기는 분위기 때문에 선수도 선수지만 팬들도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 부터 인가 그런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정치적 소신을 떳떳하게 밝히듯 원정팀 옷을 입고 섞여서 관람도 하고 때에 따라선 상대팀의 선수가 힘들어 할 때 격려를 해주기도 했었다.
대구출신인 이범호 선수는 대전의 한화이글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며 '꽃봉오리'를 만들었고 일본선수생활을 마친후 광주의 기어타이거즈에서 은퇴할 때까지 선수생활을 했으며 '만개'했고 토요일 '낙화'라는 시의 느낌 그대로 떠날 때를 알고 후배들 앞에서 관중들 앞에서 가족들에게 꽃다발을 받으며 은퇴했다.
보통 고향팀이나 서울에서 선수생활을 하는데 이범호 선수는 객지에서 생활을 하고 팀의 주장도 했으며 기아의 상징이 되었다.
개인의 성적과 기록이 어느 것보다 우선인 야구에서 만루홈런을 그만큼 때리고 은퇴후 '영구결번'이란 자기이미지 관리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고 자신의 번호를 후배인 '박찬호'선수에게 주었고 박선수 또한 선배의 번호를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연수를 마치면 가아타이거즈에 다시 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타이거즈란 팀은 특히 호남인들에겐 80년대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던 야구팀 그 이상의 존재였고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고향의 그리움을 느끼게 해 준 연결고리였다.
물론 타지역민들이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볼 땐 집착이며 극성일 수 있었겠지만 타이거즈는 그만큼 대단한 팀이었고 그럴 위치에 있었다고 본다.
여전히 동서간의 지역갈등이 있고 정치인들은 아직도 지역을 나누고 계파를 나누었지만 스포츠에선 지역이나 계파를 없애고 그 벽을 넘기 위해 선수들과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만들어질 당시엔 국민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하나 경기 때 마다 지역팀만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고 타지역 주민들을 반기고 교류하면서 꼭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즐기는 과정을 택했다.
토요일 광주 챔피언스 필드의 은퇴식은 이범호라는 한 야구선수의 야구인생을 아쉬워 해주고 앞날을 축복해주는 행사이기도 했지만 이땅의 정치인들과 특히 갈등을 조장하고 지역을 가르는 자들에게 또한 권력욕 때문에 은퇴를 못하는 원로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