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병매 (059) 재혼(再婚) 5회
대문 두들기는 소리에 수춘이가 일어나 뛰어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곧 되돌아 뛰어들어온 수춘이가 방문밖에서 말한다.
“서문 대관인님, 댁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는군요”
“뭐, 급한일?”
“예, 대안이가 나귀를 몰고 모시러 왔어요”
“그래? 이 밤중에 무슨 일인지?”
서문경은 침상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본다.
이병아는 기분 잡쳤다는 듯이
이불 속에 알몸을 묻은채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다.
대안이는 서문경이 나타나자 허리를 굽신 깊이 꺾으며 말한다.
“주인어른, 급히 집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저... 동경에서 누가 온 모양입니다.”
“동경에서? 누군데?”
“양제독님의 딸이라 그러는 것 같던데요.
내외간에 같이 왔나봐요”
“뭐? 양제독의 딸과 사위가...”
“예, 큰마님께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속히 가서 주인어른을 모셔오라고 그러시던데요”
“무슨 일일까... 오냐, 알았다. 잠시 기다려라”
서문경은 뜻밖의 일에
약간 당황하는 듯한 표정으로 도로 내실로 간다.
침상에 누워있던 이병아가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 아랫도리를 이불로 감고 앉아서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동경에서 누가 왔다는군”
“동경에서요?”
“응, 곧 가봐야겠어”
서문경의 기색이 어쩐지 불안해 보이자,
이병아는 말없이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주워 입는다.
그리고 서문경을 뒤따라 대문 밖까지 나가서 배웅을 한다.
나귀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며 서문경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데 제독의 딸, 즉 자기의 이종 생질녀(甥姪女)인 양교랑(楊巧嫏)이가 그 남편인 진경제(陳經濟)와 함께 이 밤중에 당도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공연히 심란했다.
대안이가 한 말로 미루어 보아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
무슨 불길한 사연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하니
오월랑이 바짝 긴장이 된 표정으로 대뜸 말했다.
“양제독이 옥에 갇혔다지 뭐예요”
“뭐라구?”
서문경은 너무나 의외의 일에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만다.
“교랑이 내외가 왔는데, 글쎄 그러잖아요.
양제독이 탄핵을 받아서 체포되었다는 거예요”
“탄핵을 받아?”
이번에는 서문경의 입까지 딱 벌어진다.
“자세한 얘기는 교랑이 내외한테 직접 들어보세요.
지금 응접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가보자구”
“그러죠”
서문경의 뒤를 따라 오월랑도 방을 나서 응접실 쪽으로 간다.
서문경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원로에 지쳐서 의자에 축늘어지듯 기대앉아 있던 양교랑과 진경제가 얼른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한다.
방 한쪽에는 그들이 가지고 온 덩실한 보따리가 두 개 놓여있다. 제각기 말을 타고 오면서 한 사람이 한 덩어리씩 싣고왔던 것이다.
“아니, 별안간 어떻게 된 일인지?
찾아온 것은 반가운데, 얘기를 들으니...”
서문경이 의자에 앉자,
양교랑과 진경제도 다시 의자에 궁둥이를 내린다.
오월랑도 앉는다.
양교랑이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입을 연다.
“아버님이 구속되었어요. 탄핵을 받았지 뭐예요”
“탄핵을? 누구한테?”
“과도관(科道官)의 감사에 걸린 모양이에요”
“음- 야단났군”
과도관이라면 육해군을 감찰하는 황제의 직속 기관이 아닌가. 그 과도관에 의해서 탄핵을 받아 구속되었다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서문경은 크게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듯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있었다.
서문경이 안색이 변할 정도로 놀라는 것은 양제독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화자허의 석방을 부탁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과도관의 탄핵을 받아 구속되었다면 황제의 칙명(勅命)이 내린 게 틀림없고, 그렇다면 이제 양제독의 일가친척은 모조리 날벼락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양제독의 처이종 사촌인 서문경 자신에게까지 그 화가 미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으나, 만약 취조 과정에서 자기가 뇌물을 제공한 사실끼지 밝혀지는 날에는 틀림없이 그 벼락이 자신의 머리 위에도 여지없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양제독께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탄핵을 받게 되었는지 자세히 좀 얘기해 보라구”
탄핵의 원인이 뭔지, 서문경은 무엇보다 그 점이 궁금하다.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지 어떨지 그 원인을 들어보면 대체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양교랑이 남편에게 말한다.
“여보, 어머님의 서찰을 드리라구요”
그러자 진경제가 안 호주머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어 서문경에게 건넨다.
“장모님께서 이 사찰을 갖다드리라고 주셨습니다.
서찰을 읽어보시면 자세한 내막을 아실겁니다.”
“음, 그래?”
그 서찰을 받아 서문경은 천천히 펼쳐 읽기 시작한다.
<동생 받아보게>
너무 마음이 조급하여 인사말은 줄이기로 하네.
얼마 전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을 당하여 웅주(雄州)가 그들 손아귀에 떨어졌는데, 병부(兵部)의 왕상서(王尙書)가 병마(兵馬)를 증파하지 않은 실책탓이었네.
그일로 인하여 자네 자형도 함께 과도관으로부터 엄한 탄핵을 받게 되었고, 황제폐하께서도 진노하시어 벌하도록 칙령을 내려서 어제 아침에 체포당하여 중범(重犯)의 감옥인 남로(南窂)에 갇히고 말았네.
앞으로 국사범(國事犯)을 다루는 삼법사(三法司)에서 심리를 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서서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네.
당사자와 일가일문(一家一門)은 물론이고, 외척(外戚) 처족(妻族)까지 모조리 볍규대로 국경을 수비하는 수졸(戍卒)로 끌려가고 말 것이네.
이 청천벽력 같은 환란을 당하여 누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딸과 사위를 동생한테 보내어 피신해 있도록하고, 나는 멀리 산간벽지에 살고있는 친척한테 가서 숨어있기로 하였네.
그러니 아무쪼록 자네가 교랑이 내외를 잘 좀 데리고 있어 주기 바라네. 이 서찰과 함게 은화 오백냥을 보내니 폐를 끼치는 대가로 우선 받아두게.
나중에 다시 좋은 세월이 오면 그 때 응분의 보답을 하겠네.
동생, 반드시 다시 자네 자형 앞에 좋은 세월이 온다는 것을 믿어주게.
자네 자형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지고 말 분이 아니네.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 그럼 잘 부탁하고, 이만 붓을 놓네.
동경의 누나로부터.
서찰을 다 읽고난 서문경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양제독이 왕상서와 함께 웅주 실함(失陷)의 책임 때문에 탄핵 당하여 구속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중신(重臣)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얽혀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자네 자형 앞에 좋은 세월이 온다는 것을 믿어주게.
자네 자형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지고말 분이 아니네’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서문경은 사건의 내막을 알자 불안과 긴장이 약간 가시는 듯한 느낌이다.
패전(敗戰)으로 인한 권력 암투의 결과라면 뇌물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듯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종 사촌 누님인 고진화(高珍華)가 자기 딸 내외를 서문경 자신의 집으로 피신을 시켰을 때는 자기에게 까지는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겠는가.
“이거 정말 큰 야단이 났군”
그러나 서문경은 몹시 걱정이 된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진경제가 보따리 한 개를 끌러 그 속에서 은화 오백냥이 든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서문경에게 건네주며
“잘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깊이 숙인다.
자기의 거처로 돌아간 서문경은 침실에 혼자 들었다.
서문경이 자기 혼자 침상에 눕기는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자기 방에서 잘 때는 으례 반금련 몰래 춘매를 오게 해서 그녀와 즐기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하도 심란하고 기분이 무거워서
여자고 뭐고 전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밤이 이슥했으나 서문경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국사범의 경우는 일가일문은 물론 외척, 처족까지 벌한다고 하나, 양제독의 처족으로 이종 사촌뻘이 되는 자기에게까지 그 화가 미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취조 과정에서 자기가 뇌물을 바친 사실이 탄로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또 당사자의 딸 내외를 숨겨주게 되었으니, 그 일이 알려질 경우 꼼짝없이 자기도 당할게 뻔했다. 불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몰아닥친 환란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가 있을 것인지...
서문경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생각을 거듭했으나 뾰족한 무슨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는다더니,
바로 그런 격이라 싶으며 무거운 탄식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이튿날 서문경은 두 하인을 동경으로 보냈다.
전번에 양제독에게 화자허의 석방을 위한 뇌물을 가지고 갔던 그 두 사람이었다.
동경에 가 머물면서 이번 사건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판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시킨 것이다.
그리고 약국을 비롯해서
집 대문과 일체의 출입문을 전부 굳게 닫아 버렸다.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해 버린 셈이었다.
만부득이 바깥출입을 해야 할 경우에는 서문경 자신에게 직접 허락을 받고 조그마한 뒷문을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개축공사도 물론 중단되었다.
이병아를 여섯 번째 아내로 맞아들일 그런 일이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날벼락을 맞느냐, 피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된 셈인데
한낱 여자 따위가 염두에 있을 턱이 없었다.
양교량과 진경제 내외는 집안에서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별채의 방 하나를 내주어 그곳에서 기거토록 했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그들 내외가 이곳에 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바깥출입을 차단했으니 외부 사람들과는 이제 접촉의 기회가 없게 된 셈이지만, 만부득이 외출을 했을 경우는 물론이고, 집안사람들끼리도 그 일로 서로 얘기를 나누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만약 그 일을 입 밖에 내어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서문경 자신에게 알리라는 분부까지 했다. 은밀히 알리면 알린 사람이 누군지 절대로 비밀로 할 뿐 아니라, 후한 상금을 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말하자면 집안사람끼리
서로 감시하고 밀고하라는 명인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 별안간 집안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소리도 적어졌으며,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둡게 굳어 들어서 마치 죽음의 집 같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쇄가(鎖家)조치를 취한 서문경은 자기 방에 들어앉아서 노상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술을 안 마시면 공연히 이런저런 망상이 머리를 어지럽혀 심란하고 뒤숭숭해서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심장에 털이 난 듯, 혹은 낯가죽이 두 겹 세 겹이나 되는 듯 매사에 뻔뻔스럽고 자신만만하며, 안하무인으로 콧대가 높은 서문경도 국사범에 연루가 되어 처벌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커서 소심증 환자 같은 작태를 보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셔대니 며칠 뒤에는 마치 한물 간 사람 같았고 살짝 실성한 것 같기도 했다.
오월랑은 속으로 몹시 걱정이 되어 하루는 그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자리에 가서 마주 앉았다.
“여보, 당신 신수가 말이 아니라구요. 웬 술을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마셔대죠?”
정실의 걱정 어린 말에 서문경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한다. 두 눈의 눈빛이 흐릿할 뿐 아니라, 초점도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아요. 당신만 걱정인가요. 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나 여보,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지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가 있다는데, 아직 호랑이에게 물린 것도 아니잖아요”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서문경은 불쑥 내뱉고는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켜버린다.
입술 한쪽으로 술이 지르르 흘러내리기도 한다.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 정신을 차리는 건가요?”
“내가 말이야, 다 알아서 하고 있다구.
현천에 오서사(吳書司)를 보내어 동경에서 내려오는 관보(官報)가운데 혹시 이번 사건에 관한 것이 있으면 베껴오도록 하고 있어. 만약 나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바로 담당 관원이 나한테 알려주기로 했다니까. 그러면 도리없이 그때는 도망을 가야지 뭐”
“아, 그래요?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죠?”
“오서사의 누나가 이웃 양곡현의 어디라더라...
산간벽지에 산다는군.
그곳으로 피신하면 절대 안심이라는거야”
오월랑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한다.
“여보, 그렇다면 말이에요 집을 처닫아버리고 이렇게 매일 술만 자실게 아니잖아요. 그냥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지내는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문을 처닫아버리면 오히려 이웃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니예요”
“그건 당신이 모르는 소리라구.
지금으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랑이 내외가 우리 집에 와서 숨어있다는 것을 절대 비밀로 하는 일이라구.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꼼짝없이 우리도 붙들려 가게 된다니까.
그 사실을 비밀로 하려면 집안사람들이 바깥출입을 못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지 뭐야. 하인과 하녀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말이야. 그들이 밖으로 나가서 입주둥이를 안 놀릴 것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