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도 모르는]<13>
'차이나타운'과 '화교'들
부산의 '왕서방들', 일제 이간질에 생업 잃고 中 돌아갔던 수난사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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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 청관거리 풍경. 비단, 포목, 거울 , 꽃신 등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들이 많이 거래됐다. 김한근 제공 |
- 中 무역상 정익지·위생 형제
- 부산 日人지역 상점 설립 좌절
- 동아시아 삼국 외교문제 비화
- 1884년 초량 淸조계지로 귀결
- 식칼·가위·면도칼로 생계 잇는
- 음식·포목·이발업 주로 종사
- 차이나타운 싹 틔운 中음식점
- 조선 제일 대중요리점 발전
- 1931년 만주 만보산 지역서
- 조선인과 중국인 충돌 사건
- 日 제국주의자들 오도해 전파
- 조선내 화교 배척 폭동 비극
■ 부산 속의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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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께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된 부산 초량 해안 일대. 청나라 영사관이 설치되고 청나라 사람들이 거주했다. 김한근 제공 |
부산은 타국 문화의 용광로였다.
이 용광로에서 외국 문화를 뜨겁게 녹여 새로운 문화를 뽑아냈다.
최근에는 부산 문화 속에 용해된 중국 문화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산역 앞 상해거리 일대는 차이나타운 특구로 지정돼
부산과 중국의 짬뽕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중국 문화를 부산에 들여온 사람은 화교들이다.
"바닷물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연기 나는 곳에 화교가 있다"는 표현을 들어봤을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화교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든 고국을 떠난 화교들을 맞이한 것은 행복과 기쁨이 아니었다.
부산 화교들은 먼 이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감내해야 했다.
■ 덕흥호 사건과 청나라 조계지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서는 오장경(吳長慶)과 3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때 청국 상인들도 함께 따라왔다.
본격적으로 청국 상인들의 무역 활동이 시작된 것은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고부터다.
허약해진 조선은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와도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으로 우리나라 개항장에 청나라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청국 조계지의 조성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청국 조계지가 설치된 것은 덕흥호(德興號) 사건 때문이었다.
덕흥호는 중국 무역상이었던 정익지(鄭翼之)와 정위생(鄭渭生) 형제가
부산의 일본인 전관거류지에 설립하고자 했던 상점 이름이었다.
청나라를 견제했던 일본이 자신의 심장부에 청나라 무역상점의 설치를 용인해 줄 리가 없었다.
동아시아 삼국의 외교 문제로 비화한 덕흥호 사건의 결과는
개항장에 청나라 조계지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귀결됐다.
1884년 현 부산 초량동 일대에 청나라 영사관과 청나라 사람이 거주하는 조계지가 설치됐다.
■ 초량동 청관마을의 청나라 상인들
청국 조계지가 설치된 후 10년간 청나라 상인들은 호황을 맞았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군이 개화파를 진압했고, 청나라에 줄을 댄 관료들이 요직을 장악했다.
바야흐로 조선에서 '친청파의 시대'가 열렸다.
부산의 청국 조계지는 청나라 상인들의 근거지였다.
이곳은 용두산 일대의 왜관과 대비하여 '청관(淸館)' 혹은 '청관거리'라 불렸다.
청관은 오늘날 부산역 앞에 있었는데, 당시 이곳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백사장이 펼쳐진 해안가였다.
초량동의 청나라 영사관 주변에는 청나라 상인들이 연 상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산 청관을 왕래하는 청나라 상인들은 출신이 다양했다.
인천처럼 중국 산둥성 출신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광둥성과 절강성 출신이 다수였으며, 여러 항구를 오가며 장사하는 뜨내기 무역 상인도 많았다.
게다가 일본에 본점을 두고 부산 청관에 지점을 둔 중국 상인들도 있었다.
앞서 덕흥호를 개업하고자 했던 중국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부산의 청관을 중국, 일본과 조선을 잇는 네트워크로 활용하고자 했다.
화교들의 힘은 이렇게 무역의 연계망에서 나온다.
나라마다 물건의 가격과 매매 양상이 다른데, 화교들은 이를 국제 무역에 이용하여 큰 차익을 남겼다.
■ 비단장사 왕서방만 있었을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크게 패했으나
1899년 대한제국이 중국과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상거래는 계속됐다.
강제적 국권침탈 이후에도 청국 조계지가 폐지되는 대신 화교들의 집단 거주는 인정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부산의 청관을 '시나마찌(支那町)'라 불렀다.
1920년대까지 식민지 부산의 시나마찌는 번성했다.
시나마찌에는 비단, 포목, 거울, 꽃신 등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들로 넘쳐났다.
1920년대 부산의 화교들은 주로 포목점과 요리점, 만두점 등에 종사했다.
1934년 박시춘이 작곡하고 김정구가 부른 '왕서방 연서'란 노래가 있다.
비단을 팔아 번 돈을 기생 명월이에게 모두 털어주고 빈털터리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화교들은 정작 비단뿐만 아니라 삼베를 수입해 팔아 이문을 남겼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이 비싼 비단을 구입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직물류 장사로 가장 많은 세금을 냈던 부산 화교는
서태호(瑞泰號)를 운영했던 '두수신(杜樹新)'이란 인물이었다.
실은 조선에 들어온 화교 가운데 채소를 심어 장사하는 농사꾼이 많았다.
현 부산화교협회의 총용자(叢湧滋) 회장은 "중국인은 옛날부터 채소를 잘 심었으며, 화교들은 중국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조선에서 재배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배추도 중국의 바이차이(白寀)에서 온 것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채소 재배의 역사에 화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 띵호와, 부산의 청국 요리점
왕서방의 포목점뿐만 아니라 부산의 청국 요리점에서도 '띵호와'가 흘러나왔다.
화교 사회에서는 '삼파도(三把刀)'라는 말이 있다.
삼파도는 식칼, 가위, 면도칼 등 세 자루의 칼을 의미한다.
화교들은 외국에서 이 세 자루의 칼을 쓰는 업종, 즉 음식점, 포목점, 이발소 등에 주로 종사했다.
그중 중국 음식점만큼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업종은 없다.
차이나타운에서 싹을 틔운 중국 음식점은 우리나라 제일의 대중적 외식점으로 발전했다.
일본인도 이 중국 음식을 꽤 좋아했다.
점차 번성한 청국 요리점은 창선동, 동광동 등 일본인 거리까지 뻗어 갔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유명한 중화 요리점은
인화루(仁和樓) 영기호(永記號) 동승루(東昇樓) 중화원(中華園) 의성관(義盛館) 등이다.
당시 중국 음식점 가운데는 만두 가게와 호떡집도 많았다.
현재 상해거리에는 홍성방, 사해방 등 만두를 잘하는 중화 요리점이 많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전통이라 볼 수 있다.
청관거리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급 요릿집은 역시 봉래각(蓬萊閣)이었다.
봉래각이 들어선 건물은 원래 서구식 병원 용도로 지어졌다.
폐업된 후 중국인 양모민(楊牟民)이 인수해 고급스러운 청국 요리점으로 탈바꿈했다.
봉래각은 동래 권번의 기생과 중국 기생까지 나오는 호화판 중화 요리점으로서 청관거리의 최고 볼거리였다.
■ 디아스포라의 굴곡을 넘었던 화교
하지만 부산 화교의 디아스포라가 결코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타국에 온 화교들은 가슴에 고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의 근대 시기에 벌어진 군벌정치, 국공내전 등 연이은 전쟁과 수탈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까운 조선으로 탈출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안정을 찾아가던 화교들에게 갑자기 터진 만보산(萬寶山) 사건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1931년 만주의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들 간에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일제가 이를 오도함으로써 조선 내에 화교를 배척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해 7월 부산에서도 3000명의 시위대가 몰려다니면서
화교들의 음식점과 포목점 등을 파괴했다.
중국인을 보호하는 중국 영사관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부산에서는 400명 이상의 화교가 중국으로 돌아갔고,
요리점을 경영하는 업주들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