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볼산 -
☆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수원] 자존심과 믿음은 반 비례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민수 13, 1 - 2. 25 - 14, 1. 26 - 30. 34 - 35
† 복음 : 마태 15, 21 - 28
★ 모세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앞의 파란 광야에 이르러 사람들을
보내 가나안 지역을 정찰하게 한다. 그러나 그곳을 둘러보고 돌아온 이들은
그곳 주민들이 너무나 강하여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한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부족한 믿음을 책망하신다(제1독서).
★ 이민족들의 지방에서 온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을 살려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어서 그
청을 거절하시지만,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닌 것보다 더 깊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린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부인의 청을 거절하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께 다시 한 번 청하며 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여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부스러기 은총’이 그 가정에 내려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때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부스러기)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 부스러기들은 그저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아닙니다. 열두 광주리에 부스러기들이 가득 담겼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곧 열두 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에 이제 ‘부스러기 은총’이 충만히
주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부스러기 은총’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민족인 가나안 여인에게까지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빵의 은총’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그 은총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부스러기 은총’이라도
간절히 원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다른 민족들이든 모두에게 부스러기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내리신 은총은 부스러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 스스로 빵이 되시어 당신 백성인 교회에
‘빵의 은총’을 새롭게 내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랑에 힘입어 빵도, 부스러기도 모두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 15,21-28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
(마태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주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 곁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음식물 국물이
제 옷에 묻은 것입니다. 마침 밝은 색 클러지 셔츠를 입고 있어서
음식물 묻은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지요. 아주 당황스러웠지요.
더군다나 식사 후에 중요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음식 묻은
옷을 입고 나간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또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워도 그 옷을
입고서 모임에 참석해야만 했지요.
모임이 끝난 뒤에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음식 묻은 옷을 그냥 입고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옷에 묻은 음식물 자국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까이에 와서 보면서 “뭐 보이지도 않는데요?”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나는 잘
보입니다.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볼
수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잘 볼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삶이 아닌 주님과 가까이에 있는
삶을 살아야 더욱 더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더욱 더 가까이에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더 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그 결과 나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계속해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하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을 멀리하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여인은 굴하지 않고
예수님 가까이에 다가서려고 더욱 노력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모욕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도 여인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으로
부터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딸의 치유를 얻게 됩니다.
주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유혹을 해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 자신도 몰랐던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가까이에서 그 사랑과
은총을 충만히 느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여든 살에 태어나서 열여덟 살까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면
인생은 훨씬 행복할 것이다(마크 트웨인).
주교님과 한달피정 후 농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인천교구 신학생들.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가녀린 소프라노 목소리를 지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수가
되고 싶어 성악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노래를 배웠고, 얼마 뒤에
친척들이 모여 있는 가족 모임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노랫소리를 듣고는 배꼽 빠지게 웃을 뿐이었습니다.
이내 쉬고 갈라지는 그의 노랫소리는 감동이 아니라 재미만 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년은 크게 실망했지요. 그런데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노래로 남을 감동시킬 수는 없지만, 웃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곧바로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코미디언으로
변신했습니다.
그가 바로 최고의 코미디언이라고 불리는 밥 호프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또 다른 희망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게 필요한 것만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이 세상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모성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오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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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하나.
병든 자식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방인 여성. 어떻게 해서라도
그분을 만나 그분께 자신의 소망을 전하고자 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외의 말씀으로 그녀를 대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한 모멸적인 답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을 설득시킨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시며 그녀의
딸을 치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왜 여인에게 그토록 모진 말씀을 하셨을까?
나름대로 짐작해본다. 예수님의 움직임에 군중들은 모여들었고,
제자들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님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무 반응을 보이시지 않는다.
제자들의 반응을 기다리신 것이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어떻게
좀 해달라 하자, 그제서야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을 거신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고, 그녀가
보여줄 태도도 알고 계셨음이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제자들을 비롯한 군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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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둘.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모성(母性, Maternitas)이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나누어 본다.
모성이라는 말은 완성된 개념의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원초적 본능에 가깝다. 즉 모성이 완전에 가까운 사랑이라던가
숭고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성이란 하느님께서 여성에게 심어주신 하나의 커다란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식에게 집중되는 힘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그 힘은 자녀를 향한 올바른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일그러진 형태의 애착이나 집착으로 변할 수도 있다.
요즈음 아이들의 학교를 들여다보면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보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무색하다. 너무도 이기적인 아이들이 만들어져 세상에 던져지고
있다. 더욱 빠른 속도와 더한 무게를 갖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엄마들의 길을 잘못 찾은 모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이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못한 이들 뒤에는 그렇지 못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여성이 자녀에 대한 모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 모성이
꽃을 피우느냐 마느냐는 모든 엄마 자신에게 달려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 대한 삐뚤어진 감정 세계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물론 그 여성들도 그 어머니들에게 잘못
해석된 모성으로 사랑을 받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졸업장도 든든한 경제적 배경도 아니다.
유전적 뛰어난 외모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가치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마음이다. 신앙인이라면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참 신앙인의 모범, 가나안 여인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 주간 수요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 15,21-28
<참 신앙인의 모범, 가나안 여인>
오늘 복음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자세는 정말 큰
묵상꺼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호되게 마귀 걸린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딸만 치유된다면
하는 마음에서 너무 크게 소리 질러 사도들의 마음까지 상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귀가 따가울 정도였던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거듭되는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보십시오. 그녀는 지금까지 딸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정말 장한 어머니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딸만 낫게 된다면 지구
반대쪽까지라도 뛰어갔다 올 사람입니다. 정말 극진한 모성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딸을 위해 자신을 모두 버릴 각오, 대신 죽을
각오가 단단히 선 가나안 여인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참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신앙의 바탕인
겸손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꼭 내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그녀 안에는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폭풍의 밤, 조각배로 큰 풍랑을 견뎌내던 베드로, 주님께서 함께
배에 타고 계셨지만, 혹시 이러다가 단체로 익사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며
질책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보여준 이방인
여인은 큰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교부들은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여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본다. 자기 딸의 회복을
믿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처럼 여기는 지극한 겸손...”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8월7일
지난 7월 24일부터 있었던 여름캠프가 오늘 끝이 납니다. 오랜 만에
아이들과 함께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날씨를 주셨습니다.
여름캠프를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외우는 아이들, 친구들에게 양보를 하는 아이들, 율동을
힘차게 따라하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아이들과 함께 해 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내년에는
더 알찬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아이들과 만나야 갰습니다.
건물들은 화재경보기가 있습니다. 센서가 열을 감지하면 물이 나와서
불을 끄는 것입니다. 화재경보기의 센서는 예민한 것이 좋다고 합니다.
너무 예민해서 가끔 오작동을 할지라도, 센서가 작동하지 않아서
실제로 화재가 발생 했을 때 작동을 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건실을 자주 찾아 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날씨가 덥고,
캠프에 참여하는 것이 귀찮아서 아프다고 보건실을 찾아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꾀병인 줄 알지만,
만약에 정말 아픈 아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보건실을
찾는 것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수련장에 온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꿈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사무실의 구조 변경이었습니다. 사무실은
수련장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을 넓혀서 회의실, 사무실,
화장실, 싱크대, 사제 집무실을 마련했습니다. 사무실 앞에는
성모님 상을 모셨습니다. 사무실이 깨끗해지니, 제 마음도 깨끗해진
것 같았습니다. 수련장은 외관이 하얀 색입니다. 하얀 색인 외관의
벽에 벽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냥 하얀 벽보다는 벽화를 그리니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숙소, 강당, 성당, 식당을
리모델링하면 더 좋은 수련장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꿈꾸는 일들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해야 할 것입니다.
수련장의 프로그램은 좀 더 다변화 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여름
마르코 성경캠프, 겨울 복사학교는 계속하고, 봄과 가을을 대비해서는
구역장 반장, 레지오 단원, 사목위원, 본당의 단체들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연수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여름캠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수련장은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시설이 될 것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으면
적어도 1년에서 2년 앞의 일을 구상하는 편입니다. 그러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저와 익숙해지면
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일을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문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또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음악적 재능이나 뛰어난
추진력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재산이나, 업적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끝까지 믿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던 자캐오처럼 우리들이 소유하기
보다는 나눌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행복해 하실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존심과 믿음은 반비례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복음 : 마태오 15,21-28
< 자존심과 믿음은 반비례 >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님에게 오래 전 한 임종직전
냉담자에게 병자성사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 가보니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담한 것에 대한 고해성사를 들으려고 하는데 입도 꿈쩍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하기 힘든가보다 싶어서 여러 죄들을 신부님이
열거하면 해당하는 것에 그냥 고개만 끄덕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꿈쩍을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가려고 하는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더랍니다.
“나 죄 없어!”
그러나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왜 그깟 자존심을
위해 영생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미국에서 사목하시는 어떤 목사님이 냉담하고 있는 한 교우를 위해
병원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이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대로 세상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루카복음 23장에 나오는 강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함께 처형당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지금이라도
이 강도처럼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든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을 강도취급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강도취급 당하는 것이 뭐가 큰 대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존심을 부여잡고 영원한 생명을 놓아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방인 여자를 ‘개’ 취급합니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이나 이방인을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자녀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는 말에, 발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자존심이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발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하며
칭찬하십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고, 성령님은 자아가 클수록 그 사람 안에 들어오지
못하시기에 믿음도 열매 맺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자존심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아람 군대 장수이며 나병이 걸렸던 나아만이란
사람과 엘리사 예언자와의 만남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위대한 예언자가 있다고 하여 병을 고쳐달라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엘리사 예언자는 밖에 손님이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고 자신의 종에게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병이 낫는다고 일러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한 나라의 위대한 장수가 찾아왔는데도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또 자신의 나라에도 좋은 강들이 많은데 이 작은
강물에 몸을 씻으라는 하찮은 일을 시키는 것에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면서 갈등을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예언자의 말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그냥 나병이 걸린 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것인지. 나아만은 자존심을 버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으면 부하들 앞에서 그런 망신은 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병이 고쳐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믿음은
많이 배운다고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릴 때 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고 싶으십니까? 자기를 벗어던지십시오.
자존심을 치워버리십시오. 사람은 자신을 믿든지, 하느님을 믿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자연의 힘도 하늘의 힘도 양보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자식에 대한 엄마의 열정, 딸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말입니다.
관습이나 예의 절차 등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열정은 자연의 힘도 하늘의 힘도 양보해야 될 정도로 강했습니다.
우리는 관습 예의 절차 외에도 위신 욕심 자만 등 거치는 게 참 많습니다.
특히 기도하는 목적이나 조건에 이런 잡다한 것들을 잘 끼어 넣습니다.
세상에 살며 세상조건에 물들어 멍든 순수한 마음 되찾도록 노력합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오 15,2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부인은 끝까지 믿음의 태도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시험은 그의 깊은 믿음을 드러나게 해준 두레박이었다. 이방인인 가나안
부인이 소리를 질러댄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으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재촉한다. 이에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신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다음 말씀은 더욱
놀랍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설마 예수님께서 이런 모욕적인 표현을 쓰셨을까?
여기서 여인의 믿음이 드러난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모든 상황을 뒤엎는 이 한마디! 오직 마귀 들린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로서, 지극정성으로 오직 한 가지만을 간청하는 그
믿음에 짐짓 무심한척했던 예수님이 무너지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믿음 앞에서
허물어지신다.
믿음은 이방인과 유다인, 주류와 비주류, 여성과 남성 사이에 쳐놓은 모든
장벽을 허물고 만다. 문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믿음의
선물을 간절히 구해 본다. 내 믿음이 시험을 받는 순간 가나안 부인을 떠올릴
수 있기를, 모욕과 업신여김을 당할 때 그 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자애로운
초대를 잊지 않기를 …. 가나안 부인의 용기와 믿음이 넘어질 것 같은 내
믿음을 일으키는 지렛대가 되기를 빈다.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기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2013년 다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마태 15, 21-28)
밤에 비가 내린 후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어느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서너 살 된 어린 영아가 그 빛이 아름다워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가는 길바닥에 아름다운 민들레꽃과 그 꽃 위에
보석처럼 빛나는 물방울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어린이는 그 꽃을 꺾어 청소하는 엄마에게 갖다 드리며 “엄마 이 꽃
좀 봐!”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꽃보다도
그 아기의 발에 묻은 진흙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에고 이녀석,
엄마 청소하는데 이 진흙이 뭐니?” 하면서 아기 엉덩이를 두드리며
화장실로 데려갔습니다.
나 자신은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무엇을 먼저 볼 것인가? 영아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마음을 볼 것인가? 아니면 발에 묻은
진흙을 보면서 힘들다고 생각하겠는가?
오늘 민수기에서 열두지파에서 파견 받은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놓습니다.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반대하며 투덜거리고, 자신들을 메뚜기로
비하하며 비관을 하며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그러자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치고, 밤새도록 통곡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실 때
이집트인들의 맛배를 치신 일과 홍해바다를 건넌 일, 광야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고, 맛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시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메뚜기로 비하하며 투덜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지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더욱 간절하게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은 그래도 포기 하지 않고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면서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고 의탁합니다. 신앙은 바로 나를 믿기보다 예수님 자신을,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주 죄에 떨어지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행위를 기쁘게 하고 기쁘게 주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없을 때
우리도 투덜거리게 됩니다.
성당을 전의 본당에서 신축했는데, 또 봉헌해야하나? 왜 나만 이 단체에서
고생을 해야하지? 다른 사람들은 봉사하지도 않고 잘 지내는데.......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믿는다면, “주님 제가 또 주님의 일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더 많이 봉헌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고,
더 많이 활동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 오늘 하루 나의 삶에서 투덜거리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감사드리는
삶을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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