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대인들은 대중문화에 열광하는가
대중문화의 약점 또는 결점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보인다. 우선 돈벌이 제일주의, 상업주의가 대중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특히 대중문화는 대량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조에서 판매에 이르기까지 일반 공업제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의 획일성 ․ 균일성 ․ 모방성은 절대적으로 창조서이 결핍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는 우리의 삶을 누비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현재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고 거의 매일 우리가 접하는 대중문화에, 왜 현대인들은 열광하는가? 다음 글을 통하여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바람직한 대중문화 발전에 기대와 희망을 품어 보도록 하자. |
현대의 대중문화 비평가들은 자기 자신들의 ‘속물성’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헤어날 길 없는 어려움 속에 빠져 들고 말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좋지 않은 성격을 밝혀 준 것은 바로 이들 출신성분이 좋고, 교육을 많이 받은 까다로운 사람들의 대중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엘리트는 항상 저속한 무리들이 침투하는 것에 저항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의 인문과학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저 ‘약간의 교육을 받은 정도의’ 사람들이 멋대로 만든 문화 기준에 대항하여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운 지적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대중문화는 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동전의 한 면인 대중문화의 현상에 대한 논의를 할 때는 언제나 이 다른 면인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그로부터 추출해 낼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해결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민주주의를 버리고 대신 어떤 귀족주의적 체제를 대치시키려고 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얼마만큼 그런 대로 마음이 편한 우리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면 최소한 용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대중문화를 인정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와서 소홀한 취급을 받게 된 것은 오히려 언어 예술인 것이다.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이제 와서는 정확한 국어를 구사할 수 없게 되었고, 이상한 문체를 구사하는 문법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음악의 감상, 비전문적인 연극, 심지어 회화 같은 분야에서는 1세대 전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널리 대중화되어 나갔다. 감상적 소비 예술은 어디에서고 번성하고 있다. 전통 음악, 그다지 어렵지 않은 연극, 시각 예술 분야에 있어서 대중의 취향이 이렇게 발달되어 본 적은 일찍이 유례가 없었다.
감각적 예술들이 가진 공통점은(독서, 대화, 논리적 논쟁, 보다 지적인 형태의 미술과 음악 분야에 비해 볼 때) 그 예술을 받아들이는 수용 상태가 지극히 수동적 자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동적 자세에 대해서 현대문화의 비평가들은 되풀이해서 통탄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과거의 모든 진실하며 예술적이거나 지적인 내용물의 특질을 찾아내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계속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이들 비평가들은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 젖어 버렸다고 보여진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문화유산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심지어 학생들에게까지 그렇게도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일까?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학생들에게 과거의 우수한 문화산물을 요즈음은 읽지 않는다고 화만 낼 문제도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사람들이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사람들이 말하려고 한 내용의 대부분이 우리의 현대적 삶에는 들어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적 반응 양식에 있어서의 사람들의 수동적 자세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진 특징인 수동성을 반영해 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세계는 이유가 없는 세계이다. 아니 어쩌면 단 하나의 이유만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나 광범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결코 입에 올리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세계이다. 우리 학생들이 고전을 하품 나도록 지겨워한다면, 그것은 그 학생들이 촌스럽고 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학생들 중 상당수가 이들 위대한 작품이 보여 주는 주제가 자기네들 현재의 삶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만큼 예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적 행동의 시도라든가 순수함과 정숙함, 빈곤과 질병, 신학의 좋은 명제들, 완전한 사회, 이 모든 고상한 옛 주제들이 현대인에게는 멀고 공허한 벙어리 놀이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사상가가 가진 가장 어려운 과제는 한때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 때문에 목숨조차 버렸던 명제였지만, 오늘날에는 건조하고 학문적으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이게 도니 이들 명제들을 어떻게 독자들이나 학생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 일반사람들이 갖은 문화적 태도와 이전 사회 내에서 갖고 있던 평민적인 문화적 기준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둘 다 감각적인 쾌락을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과거에 혜안을 가지고 있으며 예민한 사람은 자기네들의 삶과 가치 기준이 완전한 것과도 어딘가 거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 언제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한구석에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인식에서 분명함을 못 느꼈다. 최소한 그들은 그들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대 드라마가 연출되는 위대한 무대로부터 자신들은 이 시대가 연출하는 드라마의 무대 뒷전에 처지고 드라마로부터 제외되었다는 소외감을 느꼈다. 오늘날 대중은 이와는 다르다는 소외감을 갖고 있다. 전과 달리 사람들은 무대의 가장 앞줄 관객석에 앉아 있으며, 무대의 연극을 잘 보고 있으며, 매스미디어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일한 문젯거리는 아무것도 특별히 그들에게 흥분될 만한 사건이 무대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중요 모습을 알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갖고 있지 못하다. 수용자가 인간사를 통틀어 지배해 온 위대한 전통적 이유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더 이상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대 위에선 배우가 기계적으로 그들의 역할만을 할 뿐 그 역할 속에 배우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관객이 느껴질 때 그 연극을 보는 사람은 자연 나태한 마음의 수동적인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세대 전의 상황과는 사태가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감동, 그러한 확신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무엇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혹은 자기의 아이들이 현재의 자신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되리란 믿음도 갖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그 정반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고대했던 지상 낙원에서 이미 살고 있다고 되풀이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 수준에서 좀더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들이 느끼는 것은, 그러한 지상낙원은 이미 영원히 사라졌다고 하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유토피아를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문화를, 또 더 나아가서 20세기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인 특징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절대로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 또 그러한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그렇게도 불안하게 보고 있는 대중문화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연구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지 지적하였던 것처럼 새롭고 위협적인 것은 대중이라는 특성이 아니고 오히려 대중에게 팽배한 무감각과 무의미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바로 사회가 가진 포괄적인 특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고, 대중문화란 다만 그것이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미국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다시 여기서 강조하는 바이다. 최근에 서구와 주앙 유럽에서도 미국과 같이 사회문화적으로 복잡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 비해 좀 늦게 나타났지만 미국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전통적인 옛 문화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노에 차서 ‘미국화’라 하여 이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하듯이 문화가 미국화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대중문화는 외래문화의 수용으로 나타나는 문화 양상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에서 2차 대전 이후에 진행되고 있는 광범한 사회문화적 변화가 가져온 토착적이고도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미국 문화를 직접 모방하는 데서 그런 현상이 생긴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사회적 이데올로기적인 국면을 훑어보면 서구의 주요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놀랍게도 서로 대단히 유사성을 띠고 있음을 보게 도니다. 다만 아직도 분명히 이견을 보이는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라로서 영국만을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불길한 사상의 유사성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기독교 민주주의, 프랑스에서는 드골주의, 그리고 미국에서는 양당의 구분이 사라져가는 현상 등 이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 대단히 비슷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명칭이나 형식적인 조직으로나 자유롭고 민주적인 듯하지만 실상 그 내용은 자유민주주의의 내용을 제거하는 반민주적인 것이다.
우리가 앞서 말한 그 희망적인 모습을 이미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들이 추하다고 해서, 그 모습에 대해서 별로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경제적 낭비에, 지도자의 호인스러운 무능에 대해, 공적인 교제 또는 사교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우리를 위협하는 엄청난 위험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이에 무감각해졌음을 별로 개의치 않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위험에 의분을 느낄 인식 능력조차 상실했다. 이러한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 이에 대한 인식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서는 문화는 현재의 상태로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피로에 차 있고, 펑퍼짐하고 시들하고 쓸모없는’ 그런 문화인 것이다.
참고문헌 : 휴즈(H. Stuart Hughes) 『대중문화의 사회적 비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