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산에 다녀왔는데, 너무 춥네요.”
장흥 아틀리에 작업실에서 커피를 건네며 조각가 박선기가 입을 연다. 인터뷰가 있던 날 오전, 그는 남산에 다녀왔다. 서울 르네상스 남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올봄 그의 작품이 설치되는 산책로 주변의 자연생태공원을 둘러보고 온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여느 조각가의 작업실과는 달리 유난히 깨끗했다. 그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장흥 아틀리에에 자주 오지 못한다. 그가 주로 가 있는 곳은 실제 작품이 만들어지는 남양주의 작업실이다. 바쁠 때는 남양주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스스로 워커홀릭이라 할 정도로 그는 밤낮없이 일한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와 전시 일정이 촘촘하기 때문이다. 우선 내년 3월 프랑스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이 있는데, 건물 2층 전관을 다 채우는 큰 규모의 전시다.
여러 갤러리와 싱가포르 아트페어, 키아프, 홍콩 아트페어, 피악 등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참여할 예정이며, 10월에는 밀라노의 로렌스 루빈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의 2010년 계획은 2009년에 이미 다 짜여 있었다. 정확히 이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그는 밤낮없이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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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ggregate 08-01 숯과 나일론실로 만든 높이 8m 설치작품으로, 삼성물산빌딩 로비에 설치돼 있다. |
박선기는 2003년 귀국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으며, 우리나라 굵직한 화랑들의 러브콜이 쇄도했다. 한국 조각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김종영미술관 2005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 국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유학길에서 귀국하기 이전부터 박선기는 이미 베니스의 아레스날레 전시에 초빙되는 등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잘 알려진 조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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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ggregate 09-09 숯과 나일론실로 만든 높이 1m 설치작품. |
1994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 지 2년 만에 그는 밀라노의 로렌스 루빈 갤러리에 발탁되어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뉴욕・LA・밀라노・리스본・마드리드・베를린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화랑들이 있다. 그는 남양주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하지만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천장에 투명한 낚싯줄에 매달려 있는 숯 조각은 바스러지고 흐트러지듯이 공중에 떠 있다. 동양화의 붓자국 같은 형상이든, 계단 형상이든, 서양식 건물의 형상이든 윤곽이 멀리서 읽히는 이 작품들은 조각의 물질성을 초월하여 마치 조각의 영혼을 보는 듯하다. 작은 숯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는 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정확히는 사물의 흔적이다. 쉽게 부서지고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숯의 허약한 물성과 군데군데 단절된 형태는 그의 조각을 마치 환영처럼 느끼게 한다. 숯 조각들은 형태론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색채감에서도 동양 서예의 필선을 연상하게 하며, 사물의 직접적인 재현보다는 추상적인 정신성을 앞세운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형태의 추상성에 전전긍긍하던 추상 조각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진일보시킨 작품들이다.
바람을, 산을, 나무를 조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숯이라는 전통 조각에는 생소한 소재를 그는 17년 이상 다루어왔다.
경북 선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자연을 주제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자연 중에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나, 생각해보니 첫째가 바람이었다. 강한 바람은 강한 대로, 부드러운 미풍은 미풍대로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조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번째는 산이었으나 이 역시 조각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좋아하는 것은 나무였다.
나무는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그가 가장 잘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숯은 변화한 나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의 전작을 꿰뚫고 있는 소재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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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ggregate 07-11 서울 신라호텔에 설치된 높이 11m 설치작품. |
얼핏 보기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시점 놀이> 시리즈 역시 나무의 일종인 MDF를 이용한 작품이다. 숯도 나무의 흔적을 없앤 것이며 <시점 놀이> 시리즈의 작품도 대부분 나무의 물성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도록 깔끔하게 흰색으로 도장되어 있다. 부조처럼 납작한 정물 조각 시리즈인 <시점 놀이> 시리즈는 숯 조각과는 달리 좀 더 구체적인 사물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사물은 예사롭지 않다. 세잔의 정물화를 펼쳐놓은 듯한 작품은 정면에서 보면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방향에서 보면 형태가 왜곡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회화적인 원근법을 조각에 적용한 결과다. 일점 원근법은 원래 회화에 적용되는 것이지, 입체 작품인 조각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무릇 조각이란 어느 방향에서 보거나 입체적이며 온전하게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각에 일점 원근법을 적용하고 나니 하나의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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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of view 05-03 |
관람객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작품의 형태가 온전히 읽히는 위치를 찾아가서 작품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놓은 위치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관념을 보아야 마음이 편하다고 느낀다. 결국 눈으로 보이는 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 수 있다”며 작가는 허허로이 웃는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면서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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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of view 08-11 |
그의 작품에는 조각의 양감이 배제되어 있다. 이는 그의 작품이 모두 촉각적인 것보다는 시각적인 것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감은 내게 맞지 않는다. 내 성격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찾아보았다. 센서티브하고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면서 그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의 가늘게 뜬 눈이 바라보는 것은 양감을 배제한 형태다. 무채색 조각을 하는 것도 형태에 집중할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작한 <무한 놀이> 시리즈는 이런 형태의 유희에 탐닉하는 작업이다. 구체적인 사물을 만들지만, 그는 그 사물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인 것을 그곳에 담고자 한다. 뫼비우스의 띠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입체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하나로 연결되며 안팎이 같은 기하학적 추상의 형태에 그는 도전하고 있다. 박선기가 설명한 대로 ‘안 될 것 같은데 되는 것’이 바로 ‘박선기 스타일’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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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y of infinity 09-09 |
“미술가는 요리사와 같다. 똑같은 재료를 주고 누가 더 맛있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섬세한 감각의 차이가 중요하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된 감각이며, 고도로 발전한 사유다”라고 그는 말한다.
작가가 온전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를 팔아서 작업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한국의 미술 시장은 성급하고 잔인하며 여기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자기 스스로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잔인한’ 시장에서도 박선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던 듯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4년 만인 마흔다섯 박선기의 머리는 은발에 가깝도록 바뀌었다. 은발은 젊으면서도 노회한 듯한 지금의 그의 모습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좋은 작품에 대한 열정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엄격성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는 기꺼이 컬렉터가 되어 동료작가의 작품을 구입한다. 그의 작업대 위에 있는 것은 조각가 이유미의 작품이었다. 강형민, 김철유 등 30~40대 우리 작가의 작품 3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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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y of infinity 09-08 |
그의 작품은 FIAT그룹의 회장 움베르토 아넬리, Buffetti그룹의 대표 마시모 뷔페티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물산 본사 로비, 신라호텔 로비, 웨스턴 조선호텔, 현대카드 여의도 본사, 오크밸리, 레이크우드 CC 등 국내외 유명 기업들의 사옥과 명소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신세계백화점 부산 센텀시티에서는 44.5m에 달하는 그의 대형 작품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