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흉노의 2차 분열
울란바토르 지역의 전투에서 대패한 포노 선우와 을지 담열 소왕이 전사한 지,
5년의 세월이 흘러 갔다.
그동안 자연스럽게 초원의 상당 부분은 승리자 일축왕이 지배하게 되었다.
사정 沙井 부근에 자리하였던 금성부도 일축왕의 세력을 피하여, 서쪽의 항가이산맥으로 진영을 옮겼다.
* 항가이 산맥은 몽골 중부에 위치한 산맥으로서, 몽골고원의 척추 노릇을 하고 있다.
수도 울란바토르 서쪽으로 약 400km 가량에 위치해 있다.
최고봉은 옷곤 텡거(Otgontenger)로써 산 정상의 높이는 약 3,905m다.
산의 험준한 정상은 년중 年中, 만년설 萬年雪로 뒤덮혀있다.
그동안 사로국으로부터 연락단 連絡團 40여 명이 초원에 도착 하였는데,
모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신체가 당당하고, 체력이 튼튼한 장정들이었다.
사로국 출신의 젊은 눈에는 드넓은 초원과 끝없이 펼쳐진 삭막한 사막이 생소하다.
이중부와 사로국 1기 출신들은 이제 20대 중반으로 군무 軍務에 익숙한 관록 貫祿이 몸에 배어 보였다.
모두 병사들 훈련에 여념이 없다.
지난번 전투에서 대패한 이유가 병력 수와 전투 물자 부족으로 인하여 패퇴한 것이 주원인이지만,
개인적인 무용과 전술이 제대로 갖추어지면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사로국에서 온 연락단원들의 무예 수련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중부 천부장은 후한군 진영에서 탈출할 때,
극적으로 도움 준 고적 탕후 백부장과 병사 십이 명을 자신의 호위병으로 삼았다.
그날 밤 전투에서 보았듯이 동족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적인 무예가 뛰어난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어찌 되었든, 사로국의 혈족들과 서로의 연락은 지금처럼 계속되어야만 한다.
사로국으로 입국한 이주민들이 석탈해 이사금의 지원과 뛰어난 제철 기술을 활용하여,
토착민들과 잘 융화되어 현지에서 인지 認知도가 높아지고
따라서, 협조하는 토착 土着 세력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흉노의 지도급 인사 중의 몇몇은 사로국의 귀족층으로 자리 잡는 등
차츰 안정화 되어간다는 희소식 喜消息이 들려온다.
투후부의 적자 嫡子 김알지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로국의 제2인자 대보 大輔직을 수행하며,
국가의 대소사 정책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흉노족에게 박지형과 이중부 남매를 볼모로 보낸 가족,
박달거세와 이진도 조정 朝庭의 요직 要職에서 각자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초원의 흉노족에게 자녀를 볼모로 보낸 아픔도 감안 되었겠지만,
사로국으로 입국한 용맹한 흉노족이 사로국의 변경 邊境에서 위세를 떨치던
서쪽의 이서국 伊西國과 영천 永川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동쪽으로 흐르는 형산강 북쪽의 비화현(안강 安康)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족 土族 부족인 음질국 音質國을 물리쳐, 육통 六通과 기계 杞溪쪽으로 내쫓는 등,
크고 작은 전공을 월성 외각 外角 변경 이곳저곳에서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안강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족 土族 부족들을 하나씩 복속시키며,
형산강 유역을 차지하여 월성 月城에서 근오지 斤烏支(현재의 포항시)를 거쳐
동해 東海로 통하는 안전한 수로 水路를 확보 하는 등,
국경선을 서서히 넓혀가는 국경확장 國境擴張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이역만리 異域萬里 사로국으로 입국한 무리들이 흉노인들의 원 고향인 초원으로 되돌아간 무리보다
오히려 더 빨리 안정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본래의 고향으로 되돌아 온 무리의 정착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극심한 한해 旱害로 인하여 내분 內紛이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인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일어난 내란이다.
이 모든 내란 內亂 발생의 내부적 원인과 그 후유증 後遺症은 후한 後漢의 개입 介入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다.
개인적인 권력에 대한 욕심을 후한 後漢이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술로 적절히 이용함으로 인하여,
초원 전체가 내부지란 內部之亂으로 발생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심한 고통을 받고있는 실정이다.
같은 동족끼리 화목 和睦했던 이웃 간이 이제는 서로가 눈을 부라리고 호통치는 원수가 되어
상대를 향하여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걸걸추로 소왕은 유목민들의 일그러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병사들을 육성 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힘을 쏟아부어 이제 병력이 일만 명이 넘었다.
그 사이 이중부는 걸걸추로 소왕의 중매로 고 故 을지 담열 소왕의 딸 미앙과 혼인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요람 속의 귀여운 아기를 보니 중부는 아비로서의 뿌듯함을 느낀다.
중부는 결혼 전,
미앙에게 처음 만났던 일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술에 만취한 이중부가 비틀거리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미앙이 ‘혹, 넘어질까’ 염려되어,
직접 부축하여 가까이 있었던 자신의 게르로 데리고 들어갔고,
없는 언니를 가공 架空으로 만들어 말한 것은 자신이 어린 나이이기에
나서기 부끄러워 거짓말로 둘러대었다고 하였다.
박지형도 이슬비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가마우지와 민들레 부부도 아들과 딸을 얻어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축왕이 포노선우를 대패시킨 후, 자신을 따르던 무리로부터 추대되어 선우 직위에 올랐고,
호칭을 후한 後漢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던, 왕소군과 결혼한 조부 祖父 호한야 선우를 평소에 존경하였던 바,
할아버지의 뜻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칭을 호한야로 자칭 自稱하였다.
[* 후일 後日 역사학자들은 호칭의 혼란을 방지하고자, 일축왕 출신 선우를 후 後 호한야라 칭하였다.]
그리고 후호한야 선우는 후한의 광무제에게 입조 入朝하였다.
입조하면서 흉노인들 삶의 터전인 몽골초원의 지도를 광무제에게 바쳤다.
당시, 지도는 그 나라만의 특급 비밀이다.
즉, 자신의 관할 지역지도를 상대방에게 준다는 것은, 지도에 표기된 그 지역을 바친다는 것과 같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초원의 흉노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호도이시도고 선우를 선출하여 북 흉노를 세웠다.
드넓은 초원에 또다시, 전운 戰雲이 감돌기 시작한다.
겨우내 휘몰아치던 차가운 삭풍 朔風이 잠잠해지고,
대지를 뒤엎은 흰 눈과 얼음들이 사그라들더니,
하얀 민들레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봄이 어김 없이 초원을 찾아왔다.
헨티산맥에서 오 년간 절치부심 切齒腐心으로 병사들을 모으고 힘을 키운,
우문 무특 소왕이 먼저 궐기 蹶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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