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영적인 야심이 영적인 에고를 갖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나요?
답 : 그것이 단지 야심으로만 남아 있는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내맡김과 겸손을 통해 야심은 사랑과 영감과 헌신이라는 동기들로 대치됩니다.
흔히 '영적인 자만'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는 어떤 상태는
그런 영적인 수행을 하는 개인적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환상의 소산입니다.
겸손과 감사는 그런 경향들과 맞서며,
그런 자세는 참나가 후원하는 에너지로서 방출하는 영적인 격려에 다름 아닙니다.
영적인 의도는 은총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더 높은 에너지 장들을 끌어들입니다.
문 :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어떻게 명상하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지요?
답 : 행위하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관찰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기만 하면 돕니다.
이것은 언어를 동반하지 않는 주시의 초점입니다.
영적인 스승 라마나 마하리시는 그런 과정을 '자아 탐구(self-inquiry)'라 불렀으며,
그는 어떤 행위를 할 때든 항상 적합한 테크닉으로서 그것을 추천했습니다.
지속적인 명상은 모든 행위를 일종의 예배행위로 비침으로써
모든 행위가 다 성스럽게 되는 무드라, 마음가짐, 태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태도가 일종의 헌신과 같은 것이 될 때
신성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문 : 타인들을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칠 수 있을까요?
답 : 연민 어린 마음을 통한다면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사실상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에, 그리고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특정한 에너지 장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프로그램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평균적인 마음은 무의식증에 세뇌되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끌리는 의식의 장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하나의 전형적인 예로서, 비교적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준다는 것이
일종의 쓸모 있는 금언으로 뒤바뀝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준다는 주장은 운동역학 테스트에서 근육을 약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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